〈75〉
“뭔데 그러냐? 마음속에 생각해둔 디자이너라도 있어? 말만 하거라. 내가 꼭 구해다 주마.”
“결혼식 예복은…… 드레스 대신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한복을 입고 하고 싶어요.”
“한복?”
“사실은 할머니께서 예전에 저랑 신후 씨 결혼할 때 입으라고 한복을 만들어 주신 게 있어요……. 웨딩드레스는 그걸로 대신 입고 싶습니다…….”
다시는 입을 일이 없다고 생각한 옷이었다.
그저 할머니의 마지막 손길이 담긴 옷이니 버리지 못했다.
할머니가 보고 싶을 때마다 한 번씩 꺼내보며 그리움을 달랬다.
한데 결혼을 한다니 꼭 그 한복을 입고 싶었다.
할머니는 참석 못 하시더라도, 할머니의 손길이 담긴 옷을 입고 결혼을 한다면 하늘나라에서 할머님도 기뻐하지 않으실까.
“그럼 그때 한복이…….”
신후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미안해. 그것도 모르고 내가 함부로 대했네.”
“괜찮아요. 알고 그런 것도 아닌데요 뭘.”
“신후도 본 적이 있어? 그럼 전통 혼례복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게냐?”
성식은 얼핏 기억에 남은 신랑 신부 혼례복을 생각하며 식장을 어떻게 꾸밀지 계산했다.
“아니요. 본 적 없는 디자인이었어요. 디자인은 전통 결혼식 혼례복이긴 한데 파스텔 톤에 무척이나 고왔어요.”
“아, 그건 원래 결혼식이 여름이라……. 할머니께서 더울까 봐 얇은 원단으로 만드셨어요.”
“신경을 많이 쓰신 모양이로구나.”
“네. 금박 하나, 자수 하나 아주 품격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때의 한복을 떠올리는 신후의 목이 콱 막혔다. 기억나지 않는 할머님에 대한 죄스러움이 사무쳤다.
초연은 신후의 손을 덮었고,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제 말로 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느끼는 둘이었다.
‘미안해. 내가 너와 할머니께 너무 못 할 짓을 많이 저질렀네.’
‘괜찮아요. 신후 씨가 일부러 그런 거 아니잖아요. 우리 잊고 앞으로 솔이랑 행복하게 살아요. 그게 할머니께서 진정으로 바라시는 걸 거예요.’
‘그래. 행복하자. 행복하게 만들어줄게.’
신후는 제 손위의 초연이 손 위로 다른 손을 덮으며 눈으로 맹세했다.
“할머니가 네 결혼식에 아주 기대가 크셨던 모양이로구나. 그럼 입어야지. 입어야 하고말고.”
“감사합니다.”
어느새 초연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감사할 게 무어냐. 이 좋은 날은 나만 보는 게 송구하지.”
그러고 보니 신후도, 초연도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었다.
그 공통점 때문에 서로에게 끌린 것인가.
부모 없이 자란 며느리가 꺼림칙하지 않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성식의 입장에서는 신후의 오랜 외로움을 이해해줄 수 있는 초연이 마음에 쏙 들었다.
게다가 솔이를 이만큼 잘 키운 걸 보면, 초연을 키운 할머니 역시 훌륭한 분이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돈이 넘치게 많은 자신도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고, 아버지의 사랑도 없이 자란 신후만 보면 가슴이 시렸는데.
그 양반 초연이가 솔이 임신까지 하고 눈을 감았으니 그 마음에 얼마나 대못이 박혔겠누.
“걱정 말거라, 아가야. 내가 네 할머니 하늘에서 웃으실 수 있게 최고로 멋있게 결혼식 준비해주마.”
***
마침내 강원도로 유성우를 보러 가기로 한 날이 되었다.
솔은 며칠 전부터 잠자기 직전 손가락을 꼽으며 디데이를 챙겼다.
덩달아 초연의 마음에도 오늘을 기다리는 마음이 커갔다.
사실 그건 신후도 마찬가지였다.
저녁 식사 후 세 식구가 머리를 맞대고 캠핑용품을 고르는 게 일과였다.
집에 도착한 용품들은 꼭 한 번씩 미리 작동시켜보기도 했다.
아침 일찍, 신후와 솔이 아래채와 주차장을 오가며 캠핑용품을 차에 싣는 사이 초연은 음식을 챙겼다.
캠핑 가서 저녁으로 먹을 바비큐 재료와 밑반찬, 즉석밥에 식기 수저까지 챙기려니 정신이 없었다.
가는 길에 먹을 음식은 간단히 휴게소에서 사 먹자고 신후가 제안했지만 그러기는 싫었다.
아침부터 정성스레 김밥을 싸고 과일까지 손질해서 아이스박스에 담았다.
그때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 네. 지난번에 연락드렸던 강재구입니다.
상대방이 이름을 말하기 전부터 심장이 뛰고 있었다.
신후와 솔이에게 중요한 사람이니 벌써 번호를 외운 지 오래였다.
“안녕하세요. 혹시 수혈해주실 분 섭외된 건가요?”
- 네. 안 그러면 제가 연락을 왜 드렸겠습니까? 사모님이 하도 재촉하시는 바람에 아주 똥줄이 탔습니다 하하.
“고맙습니다.”
지난번 신후에게 수혈을 말한 후, 신후는 순순히 얼른 브로커와 연결해보라고 했다.
오히려 돈은 상관하지 않을 테니 최대한 빨리 사람을 구해보라고 재촉하기까지 했다.
덕분에 벌써 브로커를 만나 1차 계약금까지 치른 상태였다.
- 그분들 오늘 시간이 될 것 같은데 어떠십니까? 오후에 병원에서 검사받고, 통과되면 그냥 수혈까지 한 큐에 진행하시죠.
“네. 지금 바로 출발할게요.”
초연은 전화를 끊고 주차장에 있는 신후에게 달려갔다.
“신후 씨 신후 씨.”
앞치마를 한 채 주차장까지 뛰어오느라 숨이 찬 초연을 보곤 신후가 웃으며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했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신이 났어? 당신도 캠핑 갈 생각하니까 신나?”
“그 사람한테 전화 왔어요.”
부드럽게 풀어져 있던 신후의 표정이 한순간에 굳어졌다.
“사람들 준비됐대?”
그녀와는 달리 기대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긴장해서 그런가.
하긴 지은에게 수혈도 못 받고, 솔이도 있으니 말은 못 했지만 신경이 쓰였겠지.
“네. 오늘 오후로 예약 잡아놨다고 병원에서 보고 검사에 수혈까지 한 번에 진행하자고 하네요.”
“그럼 우리 천문대는.”
가만히 둘의 이야기를 듣던 솔이 그녀의 치마를 잡으며 칭얼거렸다.
그제야 자신이 캠핑 가기로 했다는 사실을 깜박했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어린 마음에는 서운할 수 있다.
초연이 몸을 낮췄다.
“오늘 검사받고 유성우는 다음에 보러 가자, 솔아.”
“싫어요. 몇십 년 만에 엄청 많이 쏟아지는 유성우랬단 말이야.”
아랫입술이 툭 튀어나오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게 한마디만 더 하면 울기 직전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아무 말도 못 하는 그녀 대신 솔을 달랜 건 신후였다.
“그러면 수혈은 하지 말고 검사만 받자 솔아. 검사는 얼마 안 걸려.”
신후가 솔을 번쩍 안아 들며 달래는 말에 초연이 기겁했다.
“신후 씨. 기껏 거기까지 가서 수혈 안 받고 검사만 받겠다니요.”
“어차피 잡아놓은 사람들 어디 안 가. 하루 이틀 사이에 무슨 일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요. 안 그래도 수혈도 안 받고 여행 가기 찜찜했는데. 수혈하고 여행은 다음 주에 갈 수 있잖아요.”
사실 이번 여행을 결정하고 초연은 나름 신경이 쓰였다.
천문대 자체가 서울에서 너무 멀었다. 서울뿐 아니라 강릉 시내와도 멀었다. 산속에서 무슨 일이라도 당한다면 병원 후송에는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우리 첫 가족 여행이잖아. 솔이도 저렇게 기대하는데.”
그럴 때마다 신후는 별거 아니라는 듯 그녀를 달랬다.
솔이 걱정을 너무 오래 하다 보니 사서 고민을 하는 성격이 되어버린 건가.
하긴 몇십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유성우랬는데.
설마 무슨 일이 생길까.
“알았어요. 당신이 알아서 해요.”
초연은 애써 불안한 마음을 감추며 대답했다.
***
잠시 후 네 사람은 〈K 병원〉 검사실 앞에서 마주했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사모님은 지난번에 한 번 뵈었는데. 강재구입니다.”
강씨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신후는 눈을 살짝 내리깐 후, 악수 대신 눈만 까딱했다.
“사람들은. 준비됐습니까?”
머쓱해진 강씨가 손바닥을 바지 엉덩이에 문지르며 자신의 뒤쪽을 가리켰다.
“네네. 저기 네 분. 혹시 혈액이 안 맞을까 봐 제가 넉넉하게 준비했습니다.”
강씨가 가리킨 곳에서 한국인 남녀 셋, 동남아시아인 여자 한 명 총 네 명이 대기 의자에 앉아 그들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다른 나라 분들도 계시네요.”
그저 국내 인맥만 가진 줄 알았는데. 브로커의 능력에 초연은 새삼 놀랐다.
“그럼요. 제가 어떻게든 사람들은 맞춰드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능력이 탁월하시군요. 잔금은. 지금 계좌이체 해드리면 됩니까?”
사람들을 확인한 신후가 핸드폰을 꺼내 은행 어플을 화면에 띄웠다.
“아, 네네.”
강 씨는 핸드폰을 조작하는 신후의 입꼬리가 살짝 뒤틀리는 것을 봤다.
잘못 봤나 싶었지만 처음 자신에게 보인 고압적인 자세에 이미 빈정이 상한 후였다.
제 목숨이 자신의 손에 달려있는데도 다른 의뢰인처럼 설설 기지도 않고 당당했다.
그래 돈이 있으니 아쉬울 일 없다는 거지? 하긴 돈 있는 놈들이 언제 고개 숙이는 걸 봤나.
그래도 깎아달라고 진상을 부리지 않는 게 어딘가 싶었다.
액수를 강 씨에게 확인시키고, 전송 버튼을 누르기 전 신후가 멈칫했다.
덩달아 화면을 지켜보던 강씨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신후를 올려다보았다.
“아 참. 그쪽 신분증 한 번 보여주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