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깊숙한 각인-74화 (74/84)

〈74〉

“와……. 똑같이 생겼어요.”

솔이 여전히 헷갈리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성식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치. 우리 민씨 집안 남자들이 대대로 잘생기긴 했다. 네 아빠, 할아버지, 나, 내 아버지도 인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지.”

초연도 허리를 굽혀 사진을 보았다.

그녀의 기억 속 7년 전 처음 만났던 신후의 모습과 무척이나 닮았다.

오토바이를 타느라 반항적으로 보였던 신후와는 달리 부드러운 눈빛이 차이라면 차이일까. 놀랍도록 닮은 두 사람의 모습에 초연도 감탄했다.

“와……. 저도 헷갈리겠어요.”

덩달아 그녀의 시선이 졸업식에 온 성식에게로 향했다.

“할아버님 젊으셨을 적 사진 보니 신후 씨가 할아버님 많이 닮았네요.”

“그럼 그럼. 내가 나이를 먹어서 그렇지 젊은 시절에는 동네 처자들이 나 때문에 밤잠도 좀 설치곤 했지. 하하하.”

“할아버지. 그냥 던진 인사치레에 과하게 답하시면 초연이 민망합니다.”

“아니에요 신후 씨. 나 신후 씨랑 솔이 미래 스포 본 느낌인걸요.”

“예끼 이놈아. 부정해봐야 소용없어. 우리 민씨 집안 남자들 피가 세서 다 닮는 것을 어째.”

가족사진 한 장에 분위기는 금세 웃음꽃이 피었다.

성식이 얼른 제 방에서 앨범 하나를 더 가져왔다.

성식을 위주로 구성된 사진첩이었다.

그의 초등학교 시절 사진부터 사춘기 시절, 성인이 된 이후의 사진까지 줄줄이 넘기는 성식의 얼굴에는 설렘이 가득했다.

성식은 아예 단체 사진들을 펴놓고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것 봐라. 이게 민씨 집안 족보 같은 가족사진이야. 여기 있는 건 다 우리 집안 가족, 친척들이니 잘 봐라.”

성식은 지난 세월 동안 솔이 모르고 있던 뿌리를 이렇게라도 알려주고 싶었다.

“이게 나고, 이분이 내 아버님. 그러니까 너한테는 고조할아버님이 되겠지?”

“네.”

솔이는 지루한 기색도 없이 손가락으로 사람과 사람을 집어가며 사진에 몰두했고, 그 바람에 성식의 설명은 끝없이 이어졌다.

“이 사람은 내 동생. 그러니까 네 증조 작은할아버지가 되려나.”

“그만 하세요. 솔이 머리 터지겠어요.”

투덜거리는 신후를 초연이 팔짱을 끼고 말렸다.

물론 잔소리를 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구시렁거리는 신후의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 걸 봤기에, 간질거리는 마음에 그의 팔짱을 끼고 눈을 맞추고 웃었다.

“어허. 그래도 사람이 뿌리를 알아야지. 뭐 한 번 보고 외워지겠냐. 자꾸 보고, 익히고 하다 보면 익히겠지.”

그때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진을 살피던 솔이 어느 한 곳에 손가락을 가리키며 물었다.

“근데 이 사람은 가족 아닌데 왜 가족사진에 있어요?”

지난번 성식의 칠순 잔치 때 찍은 가족사진 속 지후였다.

가족사진에는 성식과 도재 내외, 지후와 신후까지 모두 있었다.

처음 솔이 본 앨범은 신후의 앨범이라 지후와 지은의 모습이 없었는데, 이 앨범은 성식의 앨범이라 지은과 지후 모자의 사진이 있었던 것이었다.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으응. 가족 맞아. 네 삼촌이다.”

성식이 신후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굳은 신후의 시선이 사진에 닿았다.

예전에는 그저 새엄마가 낳은 동생이니 저와 다른 건 당연한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달랐다.

그 강한 유전자도 바깥에서 바람을 피울 때는 제 기능을 못 하나.

신후의 한쪽 입꼬리가 절로 뒤틀어졌다.

“지금 미국에서 공부 중인데 겨울 방학 때 올 거야. 이 사진이 좀 안 닮게 나왔나…….”

초연은 잔뜩 굳은 신후의 단단한 팔뚝을 손바닥으로 몇 번 쓸었다. 긴장을 풀라는 의미였다.

신후가 양 눈썹을 한 번 밀어 올린 뒤 표정을 풀었다.

일부러 입꼬리를 올리는 미소는 편안해 보였지만 신후의 굳은 눈매에 초연은 아직 그의 마음이 불편하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하나도 안 닮았는걸요? 여기 이 사람은 이 사람이랑 눈이 닮고, 이 사람은 이 사람이랑 귀가 닮았는데……. 할아버지가 가족끼리는 닮는 거라고 하셨잖아요.”

마치 틀린 그림 찾기처럼, 솔은 여러 사진 속 인물들을 콕콕 짚으며 지적했다.

“것 보십시오. 잘못된 정보 전달을 하니까 막히는 거 아닙니까.”

마침 주방에서 식사가 다 준비되었다는 신호가 왔고, 신후는 밥을 먹자며 솔을 번쩍 안아 들고 주방으로 가버렸다.

지은이 사고를 치지 않았다면 그래도 한 가족이랍시고 솔이에게 지은이나 지후를 소개할 날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은이 솔의 목숨을 가지고 초연을 협박한 순간부터 지은과 지후는 그에게 더는 가족이 아니었다.

다만 아버지가 뿌린 씨니 최소한의 살길만 챙겨줄 뿐.

신후에게 지은 모자는 이미 남보다 못한 존재였다.

***

“솔아 다음 주에 이 할아버지랑 필드 나가련?”

“필드? 소풍이요?”

확실히 집안에 아이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예전 같으면 회사 일이나 집안일로 문제가 생기면 몇 날 며칠 집안에 냉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식탁 앞에 앉자마자 자신이 오늘 본 책들에서 얻은 지식을 뽐내는 솔이 덕에 분위기는 금세 누그러졌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성식이 솔이에게 미끼를 던졌다.

“그렇지, 그렇지. 소풍이지. 가면 할아버지가 귀여운 차도 태워주고, 아이스크림도 사주마.”

성식은 이미 친구들에게 손주가 생겼다고 몇 턱이나 낸 차였다.

하도 똘똘한 증손주라고 자랑한 덕에 그의 친구들이 그럴 거면 한 번 데리고 나오라며 성식을 다그쳤다.

그 역시도 매번 친구들이 손주 자랑하는 것만 지켜보다가 이제 자신에게도 손주 자랑할 기회가 온 걸 놓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보통 손주던가! 제 목숨을 살려준 똘똘한 손주 아니던가.

“솔이 다음 주말에 천문대 가기로 했습니다.”

평온한 어투였지만, 가족끼리의 여행에 끼지 말라는 뉘앙스에 성식은 곧 입맛을 다셨다.

아무리 솔이와 같이 있고 싶어도 가족끼리 정을 쌓을 시간을 줘야 한다는 걸 아는 그였다.

“아 참, 할아버지 저 유성우 보러 천문대 가요. 할아버지도 같이 가실래요? 이번에 천 개도 넘게 볼 수 있을 거래요!”

“그래요. 할아버님. 같이 가요. 신후 씨 한 명 더 예약하면 되지 않아요?”

“됐다. 그건 네 아빠랑 갔다 오고 그다음 주에는 이 할아버지랑 놀아주는 거다.”

“네!”

성식은 유성우보다 더 반짝이는 눈을 가진 솔이의 작은 머리를 쓸었다.

죽기 직전에 이렇게 예쁜 솔을 보게 된 것만으로 성식은 만족하기로 했다.

***

저녁 식사 후 아래채로 가려는데 성식이 잡았다.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는 이유였다.

이삿날이라 여기저기 뛰어다니다가 기력이 소진한 솔은 신후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다.

“결혼식은 생각해 둔 게 있느냐?”

“아니요. 딱히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6년 전 처음 솔이를 임신했을 때는 초연 역시 결혼식이라는 걸 하고 싶었다.

어린 나이에 결혼에 대한 환상이라고 할 수도 있고, 할머니 앞에 떳떳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기도 해서였다.

하지만 신후를 다시 만난 후 초연은 결혼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미 솔이도 이만큼 컸거니와 비밀이 밝혀지고, 신후를 따라 급작스레 혼인신고에 합가까지 하다 보니 결혼식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어차피 외할머니도 돌아가셔서 결혼식을 보여드리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여기저기 한 곳에 정착해 살던 삶이 아니다 보니 부를 사람도 마땅치 않았다.

“오트 쿠튀르 프로젝트 마무리하면 슬슬 상의해 볼 생각이었습니다.”

생각지 못한 신후의 생각에 놀란 초연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결혼을 준비 중이었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프로젝트? 아서라. 그러다가 또 일 터지고, 초연이 둘째 임신이라도 하면 또 어영부영 결혼 못 해.”

신후의 시선이 초연의 배에 닿았다.

얼마 전 신후는 초연을 졸라 솔이를 임신했을 때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임신 막달에 청도 한옥 대청마루에 단정히 앉아 찍은 사진이었다.

너무 살이 쪘었다며 초연은 부끄러워했지만 신후에게는 신기하기만 한 모습이었다.

동그랗게 부푼 배 안에 어떻게 한 생명을 담고 있는 것인지.

당시 그녀의 모습을 생눈에 담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게다가 초연은 임신 막달에 몸무게가 갑자기 늘어 무척 힘들었다고 했지만, 그의 눈에는 지금과 별다른 바 없을 정도였다.

오히려 말라서 만지면 부러질 것 같은 지금의 팔다리보다는 적당하게 살이 오른 팔다리가 사진 속으로 들어가 한번 조물거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

그래도 결혼 준비를 하다 보면 바쁠 텐데 몸무게까지 늘면 거동이 불편할 것이다.

게다가 임신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드레스를 입지 못하게 되면 더 속상하겠지.

“그럼 서둘러야겠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계산이 끝나고 계획이 세워졌다.

“신후 씨 결혼식 안 해도 돼요.”

“내가 하고 싶어. 너랑 결혼식 사진 찍어서 두고두고 솔이한테도 보여주고, 솔이 동생한테도 보여주고, 내 손주들한테도 보여주고 싶어.”

단호한 그의 눈빛에는 협상을 위한 일말의 여지도 없었다.

힐끗 제 앨범을 가리키는 시선은 무언의 압박이었다.

제 뜻을 따르라는 부드러운 강압에 초연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해요.”

“그치? 그러면 다음 달에 계열사 호텔에 날짜 하나 빼놓을 테니 거기서 하거라. 올해가 가기 전에 해치워야지. 웨딩드레스도 내가 최고급으로 공수해주마.”

“저 근데…… 드릴 말씀이 있어요.”

초연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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