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신후 엄마.
당신이 죽은 지 벌써 3년인데 아직도 난 당신 이름을 부를 때면 떨리고 마음이 아프다오.
혹시 다른 여자와 결혼한 내가 미워서 꿈에도 안 나타나는 거요?
미안하다는 말을 해주고 싶은데 당신은 내 사과를 받아주지 않을 모양인가 보구려.
그렇다고 내가 당신 탓을 할 처지가 아니란 것은 잘 알고 있다고.
당신의 생일이 되니 염치없게도 당신이 무척이나 그립소.
한편으로는 지금 당신이 하늘나라에서 내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드오.
날 잊어도 좋소.
다만 그곳에서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다면, 나는 외면해도 좋으니 우리 신후만은 지켜주시오.
그 아이가 건강히 자라나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한 가족을 이루고 당신이 나에게 주었던 모든 삶의 기쁨을 알 수 있도록 보살펴주시오.
그거면 난 충분하오.
내가 당신 곁으로 돌아가는 날.
그래도 신후를 이만큼 잘 지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당신 곁에 사과의 말이라도 할 잠깐의 곁이라도 내준다면.
당신의 무릎 아래 조아려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당신 마음속 응어리가 풀릴 때까지 사과하겠소.
그때까지 나를 잊고 살되, 완전히 잊지는 말아 주오.
사랑하는 내 단 하나의 여보.
오늘따라 달빛조차 사무치는 밤이오.』
모친이 죽은 지 3년이면 이미 지은과 결혼한 지 2년은 넘은 시점이었다.
그것도 세 살짜리 아들을 둔.
구구절절한 러브레터처럼 보이지만 실은 바람난 남자의 변명에 불과한 편지였다.
속이 갈고리로 긁는 것처럼 아렸지만 화를 내는 것도 아까웠다.
심각해진 신후의 표정에 솔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해졌고, 초연은 별거 아니라며 솔의 머리를 쓸며 안심시켰다.
“신후 씨 괜찮아요?”
“별거 아냐. 올라가자. 할아버지 짐 제대로 풀었는지 확인만 하고 올라간댔는데 안 올라가시면 궁금하시겠다.”
신후는 편지를 뒷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솔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자, 솔아 이리와.”
솔이 그의 품에 폴짝 뛰어오르더니 책상 한쪽에 빼놓은 앨범을 가리켰다.
“저거 가지고 올라가도 돼요?”
“당연하지.”
신후가 두꺼운 앨범을 솔의 품에 안겨주었다.
“그게 뭔데?”
“앨범이요. 아빠랑 어릴 때 나랑 진짜 똑같이 생겼어요, 엄마.”
신기한 것이라도 발견한 듯 솔의 두 눈이 반짝이며 사진첩을 펼쳤다.
자신과 신후가 어디 어디 닮았나 찾기 놀이가 또 시작된 듯싶었다.
솔이 보여준 사진 속에는 솔이 또래 시절의 신후가 그의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아래채를 배경으로 나란히 서 있었다.
휠체어에 앉아있는 그의 어머니는 병색이 깊었으나 아름다웠다.
그녀의 어깨에 한 손을 올린 그의 부친 역시 아내를 바라보는 눈에는 다정함이 가득했다.
어쩌다가 저런 분이 지은과 바람이 났을까.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이니 신후의 배신감은 안 봐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 어디 어디가 닮았는데? 내 눈에는 내 아들이 더 잘생긴 것 같은데?”
초연은 신후의 기분을 환기하기 위해 말을 돌렸다.
“무슨 소리야. 우리 엄마 들으면 서운하시게.”
“아냐 엄마! 나랑 아빠랑 똑같아. 여기 봐봐. 아빠도 친구들보다 키가 이만큼 크잖아. 나도 친구들보다 키가 이만큼 크단 말이야.”
***
사진을 펼쳐놓고 어디가 얼마만큼 같은지 토론을 하는 사이 세 식구는 어느새 본채에 다다랐다.
세 가족이 시끌벅적한 소리에 성식이 한달음에 현관으로 달려 나왔다.
“어서들 오너라. 우리 솔이 방은 마음에 드누? 지난번에 네가 말한 아지트 모양 고대로 나왔어?”
“네! 예쁘게 꾸며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새 하룻밤 같이 잤다고 솔이와 성식은 아주 친해졌다.
성식의 집에서 자고 난 다음에는 오후 산책 시간 어린이집 근처로 산책 나오는 성식을 제 증조할아버지라고 친구들에게도 자랑하고, 성식과 영상 통화도 쫑알쫑알 잘했다.
그새 성식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건 초연도, 신후도 느낄 정도였다.
이번에 성식이 초연에게 말했다.
“위쪽에 작업실 공사도 내주에 들어갈 거다. 아주 능력 있는 사람으로 섭외했으니 기대해도 좋아.”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어요. 아래채 다락이랑 옥상이 괜찮더라고요. 그냥 다락에서 작업하고, 옥상에다 원단을 널면 될 것 같아요.”
초연이 손을 내저으며 난감해했다.
성식이 자신을 생각해주는 마음이 감사해서 지난번 성식의 말끝에 덥석 이사하겠노라 말씀드린 것을 작업장 때문에 이사를 결심했다고 착각하신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에이, 내가 알아보니 천연 염색 하는 사람들은 장독대도 많이 두어야 하고, 이것저것 필요한 게 많던데 다락은 좁지. 그리고 그 무거운 걸 들고 오르락내리락하면 허리 나가. 도면 봤는데 꽤 그럴 듯하더구나. 아니다. 안 그래도 지금 건축사무소 소장이 나왔는데 가서 한 번 얘기해보련?”
“그래. 한 번 가서 봐봐. 보고 필요한 거 있으면 미리 말하고.”
난처해하는 초연을 보며 신후가 채근했다.
“민솔. 아빠가 네게 미션을 내리겠다. 지금 당장 저기 위에 가서 엄마한테 필요한 거 찾는다, 실시.”
신후가 솔을 내려놓자 솔이 그녀의 손을 잡고 바깥으로 이끌었다.
“엄마 가자.”
초연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완벽하게 파악한 신후였다.
***
집안의 생기를 주던 두 사람이 사라지자 집 안은 고요해졌다.
원래 이 집안의 분위기였으나 신후는 어쩐지 이 분위가 낯설었다.
그동안 초연과 솔과 함께 지내면서 제 삶이 얼마만큼 달라졌는지 또다시 느끼는 순간이었다.
“지후 카드도 끊었다며.”
성식의 질문에 신후는 생각을 갈무리하고 대답했다.
“네.”
좋건 싫건 25년간 같이 살던 며느리를 쫓아낸 상황이었다.
게다가 정 상무의 사퇴와 〈K 병원〉에 대한 지원까지 중단되자 회사 내에서도 말들이 많았다.
그중에서 가장 사람들의 말이 많은 건 지후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번에 민 이사가 앞으로 회사에 들어올지 모르는 이복동생의 싹을 잘라버렸다는 소리가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네 동생인데. 지후는 챙겨라.”
지후도 지후지만 형제의 난 때문에 신후에 대한 소문이 나쁘게 날까, 성식은 걱정했다.
게다가 지은이 미워도 지후는 반은 이 집 핏줄이 아니던가.
물론 회사는 회사의 미래를 위해 신후에게 물려줄 것이지만 적어도 지후가 상처를 받지 않길 바랐다.
“어차피 제가 아니더라도 외가에서 그 정도는 챙길 겁니다. 지후도 정신을 좀 차려야 나중에 회사에 들어오면 욕먹지 않을 테고요.”
“그래. 그래도 나 죽으면 네 형제는 지후 하나야. 세상에 의지하고 살 사람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냐.”
“의지는 초연이랑 솔이한테 하면 됩니다. 그저 아버지가 뿌리고 가신 씨 책임지려는 거니 정이니 뭐니 다른 건 기대하지 마세요.”
아버지가 바깥에서 낳아온 씨.
아무리 피의 반이 같다 한들, 신후는 지후에게 어떠한 정도 없었다.
나이 차이도 너무 났거니와 그와 성격도 너무 달랐다.
주변의 생각에 예민한 그와는 달리 지후는 앞뒤 재지 않고 사고부터 치고 보는 성격이었다.
덕분에 지후의 뒤처리는 모두 도재와, 도재가 죽은 후는 그의 차지였다.
자기 스스로 정신이라도 차리면 회사에 한 자리라도 마련해주겠지만, 한 사람 몫을 못 한다면 그 역시 더 챙겨줄 생각은 없었다.
***
잠시 후 초연과 솔이 돌아오고, 넷은 거실에 모여 텔레비전을 보며 저녁 식사를 기다렸다.
앞으로 아침은 모르겠지만 저녁은 본채에서 같이 먹자는 성식의 제안이었다.
신후는 괜히 초연이 성식의 말 때문에 억지 식사를 할까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초연은 단번에 그의 거절을 저지했다.
‘신후 씨. 이제 할아버님도 내 가족이에요. 좋든 싫든 자꾸 부딪혀야 가족이죠. 신후 씨 자꾸 이런 식으로 벽 세우면 할아버님과 난 영원히 손님 관계밖에 될 수 없어요.’
‘좋든 싫든이라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거 아닌가?’
‘좋든 싫든이라는 말 가지고 꼬투리 잡을 생각 말아요. 말이 그런 거지 지금은 아주 할아버님께 호감 가득한 상태거든요.’
‘저 노인네한테 호감을 갖기가 참 힘든데 말이야.’
‘저한테 건물도 주시고, 솔이도 저렇게 예뻐해 주시는데 제가 싫어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그래도 당신한테 처음엔 모진 말씀하셨잖아. 굳이 애쓸 필요 없어.’
‘당신 저 만나고 했던 모진 말들은 생각 안 나는 모양이죠?’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7년 전엔 얼마나 못된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콧방귀까지 끼며 일부러 화난 척 팔짱까지 끼는 초연의 모습에 신후는 더는 반박할 수 없었다.
사실 신후는 초연에게 고마울 뿐이었다.
그에게는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은 가족이었다.
겉으로는 아웅다웅해도 애틋한 가족임은 틀림없었다.
연세도 있고, 지난번 저혈당 때문에 큰일을 당할 뻔까지 했으니 더욱 혼자 지내게 하는 게 신경 쓰였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알고, 초연이 노력한다는 사실을 그 역시 알고 있다.
과거의 자신이 어떻게 초연을 만나고 이렇게 깊은 관계가 되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앞으로는 다시 이 여자의 눈에 눈물이 나지 않게 하리라.
신후가 초연의 손을 지그시 잡았다.
솔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던 초연이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른 계시는데 무슨 짓이냐는 의미였다.
아무렴 부인 손 만지는 거로 눈치를 봐야 할까. 뭐 어때.
두 사람의 투덕거림을 본 성식이 일부러 솔이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솔이 뭘 그렇게 재밌게 보누?”
“앨범이요.”
아까 아래채에서 가져온 사진이었다.
사진을 넘기다가 앞의 사진과 비교하고, 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보고.
앨범 하나를 과학 서적 보듯 꼼꼼하게 살폈다.
지금 솔이 보는 사진은 도재의 대학 졸업식에서 찍은 독사진이었다.
“앨범? 오호, 네 할아버지 어릴 적 사진 보는 게로구나. 어때 네 아빠와도 똑같이 생겼지?”
“아빠가 아니에요?”
“이건 네 아빠의 아빠. 즉, 할아버지란다.”
솔은 도재의 사진 속 얼굴과 신후를 번갈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