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깊숙한 각인-72화 (72/84)

〈72〉

정 원장의 딸이라는 소리에 강씨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 아직 별말 안 했습니다. 근데 몸이 잔뜩 달았나 봅니다. 돈은 바로 입금해줄 테니 두 사람 가능하겠냐고 묻네요.

“두 사람이라…….”

솔이뿐만이 아니라 신후에게 줄 피도 구하겠다는 소리였다.

자신을 내치고 기고만장하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어?

어쩌나. 이것도 내 손안의 패인걸.

지은의 입꼬리가 얄밉게 올라갔다.

“알았어요. 만나서 수혈해줄 사람 있다고 해요.”

제 할 말만 하고 지은이 전화를 끊었다. 몸 안에 피가 빠르게 혈류를 타고 흘렀다.

이 연놈들을 어떻게 족칠까. 머리를 굴렸다.

“무슨 일이냐? 피를 구하겠다는 게냐?”

다시 신후와 연결고리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정 원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빠. 쓸데없는 희망 갖지 마요.”

“뭘 말이냐.”

“어차피 아빠나 나나 민 이사 눈 밖에 난 건 기정사실이에요. 이 상황에 민 이사한테 피 준다고 아부를 떨어봤자 민 이사가 병원 지원 계속할 거 같아요?”

“그래서 어쩌려고? 피 준다고 연락하라며 네가 조금 전에 말했잖아.”

“휘둘릴 게 아니라 휘둘러야죠. 민신후를. 〈MJ 인터내셔널〉을.”

“너 설마……?”

“네. 피를 주는 척, 했다가 안 주면 되는 거예요. 그때처럼.”

“안 돼!”

지은이 태어난 직후, 정 원장은 그녀가 특수 혈액 보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역시 의료인이었기에 지은의 피가 혈우병 D형 환자들에게 얼마나 귀한지 알았다.

금값보다 비싼 피였다. 그것도 마르지 않는 화수분 같은.

그 순간부터 정 원장은 어떻게 하면 이걸 이용해 돈을 벌까 궁리했다.

의사인 그는 불법 거래를 진행할 수 없기에 강 씨를 통해 혈우병 D형 환자들과 특수 혈액 보유자들을 연결해주고 이익을 거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MJ 인터내셔널〉의 민 회장이 은밀히 그를 찾아왔다.

손주가 혈우병 D형에 걸렸다는 것이었다.

직감적으로 그는 이게 하늘이 주신 기회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후와 지은을 연결해주면서 정 원장은 민 회장으로부터 많은 걸 얻을 수 있었다.

금전적 지원과 더불어 법조계, 정치계 인맥까지.

사실 프라임 센터 설립 관련 역시 〈MJ 인터내셔널〉을 통해 얻은 인맥들의 도움이 컸다.

하지만 지은의 욕심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거지 같은 딴따라 놈을 만나다 버림당하자 민도재에게 들러붙은 것이다.

자신의 딸이지만 독하다 싶었다.

“착한 척하지 마세요. 어차피 아빠는 동조자예요!”

“그땐 네가 죽는다고 난리를 피웠으니까 그런 게지!”

오늘내일하긴 했지만 그래도 멀쩡히 부인이 살아있는 유부남이었다.

해서 한마디 했더니 아예 응급 상황에 벨이 울리지 않게 고장 내고 약물도 투여해 부인을 죽여버렸다.

민 사장 와이프의 병실을 들락거릴 때 말렸어야 했는데.

아니면 사건이 터지고라도 지은을 신고했어야 했는데.

그저 자신에게까지 화가 미칠까 덮어뒀던 게 더 큰 부메랑으로 오는 중이었다.

이러다가 민 이사가 과거까지 싹 알아내고 자신에게까지 그 죄를 물을까 미칠 것 같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한평생 어떻게 버텼는데. 인제 와서 〈MJ 인터내셔널〉을 포기할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 지후. 불쌍한 우리 지후 몫은 챙겨줘야죠.”

희번뜩거리는 지은의 모습에 정 원장이 덜컥했다. 제 딸이지만 딸이 아닌 것 같은 눈빛.

저거 저거 저런 미친 눈빛으로 분명 사고 치지.

“나는 손 떼겠다.”

지은의 손에서 자신의 핸드폰을 뺏으려 정 원장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지은이 핸드폰을 등 뒤로 숨기며 소리 질렀다.

“여태껏 피 장사한 사람은 아빠예요. 제가 입만 뻥긋해도 잡혀들어가는 건 아빠라고요!”

기가 막혔지만 정말 미쳐버린 지은이 무슨 짓을 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25년 전에 민 이사의 부인을 죽인 것처럼.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미쳤다고요? 그러면 아빠는 내가 25년 넘게 고생하고서 맨몸으로 쫓겨났으면 좋겠어요?”

“한 번이면 족하지 그걸 어떻게 두 번이나…….”

“반대하실 생각 하지 마세요. 그랬다가는 아빠 불법 거래도 다 터트려버릴 테니까.”

악에 받친 지은의 모습에 정 원장은 이제 돌이키기에 너무 멀리 돌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저 미친년을 어째. 저 미친년이 제 인생을 망가뜨리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

며칠 후 세 가족은 성식이 말한 본가 아래채로 이사했다.

신후는 인테리어라도 하고 들어가자고 했지만, 초연이 바로 이사를 추진했다.

해서 이삿짐을 모두 옮기고 처음 아래채에 입성하는 순간까지 신후는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집이 좀 낡았지? 인테리어 다시 하고 들어오자니깐.”

“괜찮아요. 그동안 관리 잘 된 것 같은데요, 뭘.”

전체적으로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원목 톤에 화이트 톤의 패브릭.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단정하고 소박한 취향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너무 새것으로 가득한 집보다는 적당히 사용감이 있는 물건들이 초연은 마음 편했다.

게다가 아무나 쓰던 물건들이 아니었다.

신후의 부모님과 그가 쓰던 물건들이었다.

그가 생활하던 공간, 그가 손때가 묻은 물건들.

부모가 없어 공허함을 느꼈던 자신과 달리 솔이는 이 집에서 아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느끼며 자랄 것이다.

사람이 오랫동안 살지 않았지만, 다행히 관리인들이 꾸준히 관리한 덕에 침구 정도만 교체하면 바로 생활해도 될 정도였다.

불만은 신후 혼자일 뿐.

벌써 지난번 방문으로 아래채에 흠뻑 빠진 솔은 이사 오기 전부터 이 집의 서재가 얼마나 근사한지 떠들어대기 바빴다.

지금도 집에 들어서자마자 쌩하니 2층 서재로 올라가서 코빼기도 안 보이는 중이었다.

“여기 신후 씨 어릴 때 살던 그대로예요?”

안방을 둘러보고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중간 휘어지는 연결 부분에 서서 초연이 아래층을 내려보았다.

전체적으로는 2층 건물이었지만 위에는 거실 부분은 2층 없이 천장까지 뚫린 서양식 구조였다.

덕분에 1층 바닥에서 시작된 창문이 천장까지 쭉 이어져 햇살이 가득 쏟아졌다.

남향이라 거실에서는 탁 트인 바깥 풍경이 시원하게 다 보였고, 계단이 있는 건물 좌측으로는 길쭉한 나무들이 청도의 뒷산을 연상케 할 정도로 나무가 우거졌다.

그나마 본채와 가까운 솔이 방에서도 이 나무들 때문에 시야가 가려 문을 열고 소리를 질러도 본채에서 들릴까 말까 궁금한 수준이었다.

“응. 아버지 재혼하고 그 여자 들어오면서는 온 가족이 본채에서 살았어. 엄마 죽고 갑자기 그 여자 밀고 들어오니 혼란스러워하는 날 위한 할아버지의 조치였지.”

“궁금해요. 신후 씨 어릴 적엔 어떤 모습이었는지.”

“앞으로 다 말해줄게. 내가 기억나는 모든 순간을.”

부산에 있던 시절 자신이 그녀에게 솔직하지 않은 탓에 오랜 기간 어긋났다고 생각한 신후는 그 이후로는 아주 사소한 것도 그녀와 나누었다.

출근하고, 짬이 날 때마다 전화를 걸어 자신의 일과를 공유했고, 그녀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

물론 밤마다 낯뜨거운 사랑 고백을 듣노라면 부끄럽긴 하지만, 그동안 어긋나있던 시간을 생각하면 행복한 투정일 뿐이었다.

초연이 양손으로 그의 뺨을 감쌌다.

“그러니까 넌 내 기억 빨리 되살리려고 노력해야 해. 처음에는 적극적이더니 요즘 너무 비협조적이야.”

자신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초연의 눈빛에 신후는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아버지마저 지은과 결혼하는 바람에 누구에게도 마음 붙일 곳이 없었다.

지금이야 그가 회사에서 한 사람 몫도 해내고 나이도 먹어 성식이 부드러워졌지, 예전의 성식은 참으로 모진 어른이었다.

네 병을 사람들이 알면 안 된다고 겁을 줬고, 앞으로 사람들을 부리고 살아야 하는데 기에 눌리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신후에게 감정이란 좋은 싫든 오롯이 제가 감당해야 할 것이었다.

이 자그마한 몸으로 자신을 보듬어 줄 것같이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신후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행여 초연의 앞에 울기라도 할까 봐 말을 돌렸고, 다행히 먹혔다.

“그거야 오빠가…….”

오빠라는 말은 초연이 당황하면 내뱉는 말이었다.

지금 초연이 자신의 말에 당황했다는 사실에 신후가 지긋이 웃었다.

그 모습에 초연이 입을 꾹 닫고 신후를 흘겨보았다.

그 바람에 입 양쪽으로 들어간 옴폭 들어간 보조개가 사랑스러웠다.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그를 보듬던 초연은 어느 순간 수줍은 소녀가 돼버렸다.

그 모습이 좋았다. 가족과 있을 때는 든든하고, 둘이 있을 때는 뜨거웠다.

이렇게 그의 말에 지지 않고 발끈할 때는 귀엽다. 그래서 더 장난이 치고 싶었다.

억누르고 살았던 감정을 초연의 앞에서는 더는 계산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그의 가슴이 간질간질해지는 걸 초연은 알까?

“왜 입을 닫아?”

신후가 웃으며 그녀를 당겨 안았다.

“됐어요. 솔이 들어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착, 안겨드는 몸은 저항 없이 부드러웠다.

신후는 오른손으로 초연의 허리를 더욱 바짝 당겨 안았다. 은밀한 제 속사정을 초연만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의 신체변화를 눈치챘는지 초연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새삼스레. 신후가 말없이 웃으며 초연의 허리를 지분거렸다.

“여기선 뭘 해도 못 들어. 어릴 때 내가 실험해 봐서 알아. 네가 소리만 지르지 않으면 안 들린다고.”

턱짓으로 서재를 가리켰다. 모퉁이를 돌아 있는 서재에서 여기가 보일 리도 없었다.

게다가 2층 나무 바닥은 만약 솔이 나온다면 삐걱거리며 소리를 내줄 터였다.

하지만 이 모든 이 집의 비밀을 모르는 초연은 그저 불안하게 어쩔 줄 몰라 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를 독하게 밀어내지 못하는 초연이 만족스러웠다.

사춘기 때도 못 느끼던 성욕을 최근 신후는 초연에게 느끼는 중이었다.

자기 혼자 안달복달하는 관계가 아닌 처음 본 순간부터 서로에게 끌렸던 관계.

뜨겁게 사랑하고, 서로를 탐했던 관계.

얇은 블라우스 안으로 손을 밀어 넣고 아침내 빨았던 가슴을 다시 빨아주고 싶은데 이 집에 솔이 있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아예 이사를 오면 솔이 방을 본채로 옮겨야 하나.

차마 옷을 벗기지는 못한 채 초연과 눈을 맞추고 애꿎게 허리만 지분거렸다.

스커트 허리 안쪽으로 검지를 미끄러뜨려 겨우 만져지는 맨살을 살살 긁어 음미했다.

그를 밀어내던 초연이 바르르 떨고 살짝 벌어진 입으로 숨결이 조금씩 뜨거워졌다.

이대로 조금 더 있으면, 초연도 자신도 못 버틸 것이다.

신후는 아쉽지만, 초연의 허리춤에서 손을 빼며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솔이는 어디 갔어?”

“서재에서 책 봐요. 지난번에 솔이 두고 간 날도 밤늦게까지 여기서 책 봤대요. 아마 한동안 서점 가자는 이야기는 안 할 것 같아 좋긴 하네요.”

그새 달아오른 초연이 어쩌질 못하고 어색하게 대답했다.

신후는 끙, 한숨을 한 번 쉬고는 초연의 손을 잡고 서재로 향했다.

“솔이 좋아할 만한 책들 좀 더 채워 넣어야겠다. 무슨 책 좋아하려나?”

원래 이 서재는 그의 아버지가 사용하던 공간으로 그가 일곱 살이 된 기념으로 아버지의 서재 한쪽에 그의 책장과 책상을 넣어주었다.

덕분에 마지막 몇 달은 이 서재에서 신후는 아버지와 좋은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가 일하는 동안 그는 지금 솔이처럼 어린이 책상에 앉아 책을 보거나 과외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하곤 했다.

물론 그 모든 추억은 부친이 지은과 결혼하면서 끝났지만.

“솔아 뭐 봐?”

“러브레터요.”

“러브레터?”

“에이. 이런 건 결혼 전에 정리했어야죠. 근데 언제 받은 거예요? 초등학교 때? 중학교? 아, 내가 이런 과거까지 궁금한 건 아니었는데.”

초연이 건수를 잡았다는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나 이 집에서 일곱 살 때까지만 살았다고. 생사람 잡지 마.”

신후가 그녀의 볼을 가볍게 쥐고 흔들었다.

학창시절 무수히 많은 사람이 러브레터를 주려 했지만 단 한 번도 받아 집까지 가지고 온 적은 없었다.

괜히 누구건 받고, 누구건 안 받고, 받고 거절했느니 어쨌느니 말이 오르내리는 걸 애초에 차단하는 성격이었다.

근데 러브레터라니. 유치원 시절에 멋모르고 받은 건가.

“봐봐, 무슨 러브레터?”

웃는 얼굴로 솔이 건넨 편지를 보던 신후의 표정이 차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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