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기사를 본 지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신후에게 치명적인 결함이 있으니 차남인 지후에게 경영권을 서서히 넘기는 게 좋지 않겠냐는 여론을 기대해 흘린 정보였다.
하지만 민신후는 곤란해하기는커녕 병을 당당히 밝히고 오히려 희소병 환우들을 위해 써달라고 기부까지 했다.
지은이 예상치 못했던 신후의 행보로 이미 네티즌들은 신후의 편이었다.
[역시 재벌이라고 다 행복한 건 아니네.]
[마약을 한 것도 아니고, 도박을 한 것도 아니고. 개인 병까지 우리가 알아야 하나?]
[지난번 보니까 예전에 만났던 여자 모른 척하고 다른 재벌 집 여자 만날 수 있었을 텐데 그 여자랑 사고 친 거 인정하고, 혼인신고도 속전속결이더니 나 이 아저씨 마음에 드네ㅋㅋㅋ.]
[그거 일부러 버렸던 거 아니라 사고로 기억 상실 당해서 그렇게 됐던 거래.]
[알지 알지. 우리 학교에서도 소문 다 났었음. 그래서 하는 말.]
[일로 못 까니 별걸로 다 까네.]
[이 사람 일 잘 함?]
[민신후 취임하고 주가 짱 올랐음. 댁도 사셈. 민 이사님 올해 배당금 짭짤했는데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ㅋㅋㅋ]
하지만 그녀의 심기를 건드린 건 그런 댓글들이 아니었다.
[그럼 지금 민신후 엄마는 피 주려고 결혼한 거?]
[허삼관 매혈기야 뭐야.]
자신의 결혼 스토리가 까발려 웃음거리가 되고,
[헐……. 사랑도 없이 돈 보고 들어간 건가?]
[그럼 그 집 둘째는 뭐야? 피 주러 갔다가 어쩌다 생긴 거?]
[사촌 형이 걔랑 같은 학교 다니는데 개판이래. 한인 커뮤에는 소문 다 났다던데? 맨날 여자들 불러다가 파티하고 놀고 다른 주 갔다가 마약 하다 잡히고. 걔 엄마가 돈으로 사고 다 막고 다닌다던데 집안이 이래서 그랬나?]
자신과 지후를 조롱하는 댓글들에 지은은 눈이 돌아갔다.
신후가 흘린 게 틀림없었다.
우리 지후가 한국에 있을 때 소문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데 이딴 소문이라니.
핸드폰을 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벌떡 일어난 지은이 머리에 둘렀던 수건을 신경질적으로 던졌다.
“오일 빨리 닦아.”
“네? 이제 곧 경락 마사지 들어가실 차례인데…….”
“닦아, 당장!”
***
“악!”
집에 들어오자마자 지은이 현관문 앞에서 소리를 질렀다.
그나마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참고 참다가 울분을 터트리는 것이었다.
고용인들은 뭔 일 났나 싶어 나왔다가 정 원장의 눈치에 얼른 자리를 피했다.
쿵쾅쿵쾅. 지은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정 원장의 곁으로 다가왔다.
정 원장이 신문을 지은의 앞에 던졌다.
“조용히 있으면 병원은 놔뒀을 텐데 왜 건드려? 여기 서연대학병원에 십억 기증했다는 말 보여? 이게 우리랑 이제 척을 지겠단 말이지 뭐겠냐!”
어릴 때부터 욕심 많고 제멋대로인 딸이었다.
좋은 남자 물어 이제 정신 차리고 잘 사나 싶었는데 뒤늦게 이런 사고를 칠 줄이야.
〈K 병원〉은 그가 처가 병원을 이어받은 거지만 장인이 경영한 것보다 그가 훨씬 더 오래 경영했다.
게다가 조그만 동네 구멍가게 수준이었던 병원을 이만큼 키운 것도 그였다.
정 원장에게는 자식보다 소중한 병원이었다.
이제 제 할 일 다 하고 늘그막에 사람들 부러움이나 사면서 골프나 치고 살 줄 알았더니.
실은 며칠 전 지은이 집으로 쳐들어왔을 때까지만 해도 불안했지만, 신후가 별다른 말은 없어서 안도했다.
그럼 그렇지. 그래도 지가 내 덕에 목숨을 이어가고 있는데 함부로 병원을 어떻게 할 수는 없겠지, 라고만 생각했다.
근데 지은이 저 몰래 대형 사고를 칠 줄이야.
이게 웬 마른하늘에 날벼락인가 싶었다.
“아빠. 그 인간들을 믿어요? 저 뒤통수 친 거 안 보셨어요? 결국엔 아빠도 뒤통수 맞을 거였다고요.”
“누가 그걸 몰라? 그래도 일단 민 이사 약점을 잡고 있으니 진행 중인 사업은 끝내고 사고를 쳐도 쳤어야지. 너 지금 거기에 돈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몰라서이래?”
〈K 병원〉은 〈MJ 인터내셔널〉과 같이 세계 VIP들을 대상으로 하는 프라임 센터 건립을 추진 중이었다.
세계 부호들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최고급, 최첨단 시설을 표방했고, 그만큼 건설에도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갔다.
그 혼자라면 엄두도 못 낼 사업이었지만 〈MJ 인터내셔널〉의 돈과 인맥이 있어 가능한 꿈이었다.
하지만 지은이 터트린 기사로 〈MJ 인터내셔널〉은 사업 지원 철회 결정을 통보했다.
땅값에 건설비, 이미 수주를 완료한 의료기기와 인테리어 비용 등 얼추 계산해도 몇천억 원대의 손실이었다.
몇 달만 참으면 되는데 지은이 자신이 평생 쌓은 노력을 일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든 것이다.
“아빠는 지금 나보다 그깟 병원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지금 그 말이 아니잖아. 거기에 들어간 돈, 투자금 어찌할 건데! 그 사업 중단하면 병원도 큰 타격을 받는다고!”
두 사람 사이에 고성이 오갔다.
“어차피 우리 지후 줄 것도 아니잖아요. 나도 내 살길 찾아야 할 거 아니에요!”
“뭐라고?”
결국, 악에 받친 지은의 한마디에 정 원장의 말문이 막혔다.
“아버지 병원 정 상무한테 넘길 준비하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요? 회사에서 잘리자마자 병원에 자리 만들어서 턱 하니 앉히고.”
어릴 때부터 그랬다.
머리가 좋은 건 그녀였는데 비싼 과외를 받는 건 정 상무였다.
〈MJ 인터내셔널〉과 친정인 〈K 병원〉에서도, 지은 스스로 제 몫을 챙기지 않으면 제 몫은 없었다.
억울함과 오기로 피가 자글자글 끓었다.
“그러면 그 나이에 한 가정의 가장을 그냥 백수로 둬? 지 애들한테 면은 서게 해야 할 것 아냐.”
“내가 모를 줄 알아요? 청담동 아파트, 혁신 도시 소문 도는 선산 벌써 정 상무 앞으로 돌린 거 다 안다고요!”
정 원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걸 네가 왜 탐내? 그건 우리 집안 장남 건데.”
“딸자식은 자식도 아니에요? 그리고 그 재산 불리게 해준 게 누군데 왜 다 정 상무만 줘요! 나도, 지후 몫도 줘야지!”
막말로 〈MJ 인터내셔널〉의 재산이 모두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그깟 정 원장의 재산 따위 관심도 없었다.
오히려 속으로 ‘그래, 너 가져라.’ 호기를 부릴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제 몫을 어떻게든 찾고 싶었다.
“딴따라 피나 물려받아 사고나 치는 망할 놈의 자식. 내가 어떻게 키운 병원인데 그걸 걔를 줘?”
구석에 몰린 정 원장의 말에 지은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아빠!”
악에 받쳐 눈까지 희번들해진 지은의 모습에 정 원장은 아차 했다.
“지후 반은 내 피예요. 한 번만 더 그딴 소리 하시거나 지후 귀에 들어가게 하심 아빠 가만 안 둬요.”
사실 지은은 도재를 만나기 전 임신 중이었다.
그녀의 집안을 보고 접근한, 음악 하던 바람둥이였다.
지후의 생부는 정 원장이 지은에게 한 재산 떼어줄 생각이 없다는 걸 알자마자 도망쳤다.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의 실체를 알았을 때는 이미 배 속에 아이가 있었다.
정 원장은 당장 아이를 지우라고 닦달했지만 그러긴 싫었다.
자신에게 온 자신의 아이였다.
부모의 관심도, 남자도. 여태껏 완벽히 제 것을 가져보지 못한 지은에게 완벽한 자신의 것이 생긴 것이다.
그러니 낳고 싶었다.
그렇다고 미혼모의 자식이라고 손가락질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
누구보다 좋은 환경과 좋은 아빠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민도재가 딱이었다.
신후에게 정기적으로 수혈을 하는 동안 민씨 일가와도 친해진 지은이었다.
몇 년 동안 아픈 아내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희소병을 앓고 있는 자식도 애틋해 하는 민도재.
거기에 〈MJ 인터내셔널〉 미래의 주인.
이보다 좋은 조건이 어딨을까.
유학을 가야 할 것 같아 앞으로는 신후에게 수혈을 못 해줄 것 같다는 핑계로 도재를 불러내 술을 잔뜩 먹이고 호텔로 데려갔다.
다음날 도재는 같이 잤다는 지은의 말에 절망했다.
하지만 태생이 선비인 그는 유전자 검사를 할 만큼 의심이 많은 이는 아니었다.
게다가 곧 부인도 죽고, 지은도 배 속의 아이를 책임지지 않으면 애를 떼버리고 유학을 가버리겠다고 울고불고하니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부인으로 받아들였다.
물론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민씨 남자들이 그녀를 반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앞으로 우리 지후가 〈MJ 인터내셔널〉을 가질 테니까.
그때까지 꾹 참으리라 생각했다.
한데 모든 게 어그러지고, 제 부친까지 지후를 하대하는 중이었다.
지은은 이 모든 상황을 견딜 수 없었다.
독이 바짝 오른 지은을 보며 정 원장이 큼큼 헛기침했다.
한 번 꼭지가 돌면 그 역시 어쩔 도리가 없는 딸이었다.
그때 정 원장에게 전화가 왔다.
특정 혈액 보유자들을 원하는 혈우병 D형 환자나 가족들과의 연락을 담당하는 브로커였다.
정 원장은 얼른 전화를 받았다.
“어.”
- 형님 지난번에 그 여자한테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 여자가 누군데. 자세히 말해야지 장사 하루 이틀 해?”
정 원장은 지은에게 받은 화를 애먼 사람에게 분풀이했다.
- 아, 왜 몇 달 전에 형님이 접근해보라고 연락처 먼저 준 여자 있지 않습니까. 원장실에서 그 여자 얘기하는데 따님 들어오고, 이야기 급하게 마무리했던 케이스요. 알고 보니 그 민신후 이사 와이프였던.
“민 이사?”
민 이사의 이름이 나오자 지은이 눈을 반짝였다.
정 원장이 아차 싶었지만 한발 늦었다.
이미 지은이 그의 손에서 핸드폰을 뺏어갔다.
- 이 정도 사이즈면 한 십억 정도 땡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건너편 강씨가 하는 말을 듣는 지은의 눈빛이 반짝였다.
곱게 관리받은 엄지손톱까지 자근자근 씹으며 강 씨의 말을 경청했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 누, 누구야?
난데없는 여자의 목소리에 강씨가 놀랐다.
“나 정지은이에요. 계속 말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