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깊숙한 각인-70화 (70/84)

〈70〉

은근히 그의 경영권을 나눠야 한다는 압박. 그리고 〈K 병원〉의 관계자.

“그 여자가 기사를 냈나 보군.”

“근데 병원 측에서 신후 씨 편을 들어줄 거라고 하지 않았어요? 이런 기사를 냈다는 건…….”

“그 여자가 병원까지 장악했다는 소리일 수도 있고.”

정 원장은 나름의 욕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겨우 자신이 지은을 쳤다고 〈MJ 인터내셔널〉과 등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착오였던 듯싶었다.

굳어진 그의 표정에 초연의 표정이 더 심란해졌다.

신후는 얼른 표정을 풀고 초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초연이 결심한 듯 운을 뗐다.

“혹시 혈우병 환자들과 특정 혈액 보유자들을 연결해주는 브로커가 있다는 소리……. 들어봤어요?”

“브로커?”

한쪽 눈썹을 밀어 올리는 신후의 모습에 초연은 역시 그가 브로커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긴 K 종합병원의 병원장과 다이렉트로 연결된 신후가 브로커의 존재를 알 리는 없을 것이다.

신후는 그녀를 안심시키려 자신을 믿어달라고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정 원장이 〈MJ 인터내셔널〉과 척을 진 지금 상황에서 초연은 그의 말만 믿고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그러다가 퍼뜩 떠오른 게 브로커였다.

“예전에 정 원장님이 특정 응고 혈액 보유자 모임의 관리자라는 소리를 듣고 한 번 찾으러 간 적이 있어요.”

“그랬어?”

신후는 초연의 뒷말을 듣지 않아도 초연이 정 원장을 만나지 못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매년 전국 각지에서 혈우병 D형의 환우들이 K 종합병원을 찾지만, 연결이 되는 건 극소수였다.

그건 그 역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수요는 있으나 공급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먹이사슬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먹이사슬 아래 자신의 초연과 솔이 고통받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무언가 날카로운 것으로 속을 찌르는 것처럼 아렸다.

“그분을 만날 수는 없었는데……. 거기서 특정 응고 혈액 보유자들과 연결해 줄 수 있다는 브로커를 만났어요.”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데.”

“솔이 기준으로 수혈 한 번에 이천만 원……. 아직 성장기라 분기마다 맞는 조건으로 팔천만 원, 그리고 응급 수술을 받아야 할 경우를 대비해서 일억을 따로 먼저 입금해줘야 한다고…….”

영 껄끄러운 이야기에 초연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신후가 없다면 무지막지한 금액에 꿈도 못 꾸겠지만, 그래도 신후의 재력 정도라면 한 번 고려해볼 만하지 않을까.

염치없지만 졸라보고 싶었다.

사실 돈도 돈이지만 이 제안이 신후에게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님을 초연은 알고 있었다.

자존심이 센 신후가 자신을 믿지 못한다고 불쾌해할 수 있다.

게다가 불법적인 방법인 것도 문제였다.

만약 국민들이 〈MJ 인터내셔널〉 차기 대표가 불법을 저질렀다는 걸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재벌의 특혜니, 돈 위에 법이 있다느니 손가락질을 할 수 있다.

그러니 말을 하면서도 초연의 두 눈은 불안하게 흔들렸다.

말없이 초연을 바라보던 신후가 그녀를 들어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렸다.

“알았어. 연락해봐.”

너무 흔쾌한 그의 대답에 놀란 건 오히려 초연이었다.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두 눈만 깜박이는 초연을 보며 신후는 다시 한 번 확실히 제 의사를 밝혔다.

“특정 응고 혈액 보유자를 섭외해서 당신 마음 편하다면, 그렇게 해.”

“화난 거 아니죠?”

“화가 왜 나. 겨우 이깟 돈 때문에 그동안 당신 속앓이했을 거 생각하니까 속상해서 그러지.”

“그래도 회사나 세상에 나중에 소문나면……. 나 혼자는 불법 거래해도 세상에 신경 쓸 사람은 없지만 당신은 다르잖아요.”

혹시 신후가 고려치 못했을까, 초연은 그가 감수해야 할 부분을 다시 한 번 콕 찝어 말했다.

“솔이 내 아이기도 해. 내 목숨 줘도 안 아까운 내 새끼인데 그깟 회사가 뭐라고. 회사에서 내쳐져도 당신이랑 솔이는 내가 지켜.”

오히려 주저하는 초연을 보고 신후가 초연의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다.

“아니다. 연락처 있어? 줘봐.”

초연이 당장이라도 전화할 기세인 신후의 손목을 잡았다.

“신후 씨도 해요.”

“?”

어차피 불법을 저지르기로 한 이상 한 명이 불법을 저지르든, 두 명이 저지르든 상관없었다.

그저 솔이와 신후가 건강할 수만 있다면. 사람들의 손가락질 따위는 신경 쓸 거리가 아니었다.

“신후 씨도 수혈받은 지 꽤 됐잖아요. 사고 난 다음에 치료제 맞는 건 불안해요, 신후 씨도 수혈받아요. 어차피 사람들도 이제 다 알았잖아요.”

다다다다. 조금 전과는 다르게 초연이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신후는 그 모습을 말없이 빤히 바라보았다.

조금 전 꿈속의 초연과 지금의 초연.

이 여자 말고 자신을 이토록 걱정해주는 사람이 또 있을까.

굳이 필요 없지만, 초연의 마음이 편안해진다면 충분한 값어치가 있는 일일 수도.

“알았어.”

신후는 그제야 편안해진 표정의 초연을 안고 따뜻한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향긋한 샴푸 냄새와 살 냄새에서는 어젯밤 야한 냄새의 흔적 따위는 없었다.

“냄새 다 지워졌다.”

“신후 씨? 뭐 하는 거예요 꺄악!”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의 아래 깔린 상태였다.

초연이 밥주걱을 휘두르자 신후가 주걱을 빼앗아 저 멀리 던져버렸다.

“네 향기 마음에 안 들어.”

출근 전에 초연의 몸에서 마음에 드는 냄새를 맡기 위해 신후는 초연의 팬티를 재빨리 벗겨버렸다.

***

그날 이후 지은은 정 원장의 집에서 두문불출했다.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자신을 조롱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넓은 듯하지만 좁은 바닥이었다.

그날 만났던 골프 모임 단톡에서는 레스토랑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아무도 언급하지 않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이야기들이 오갔다.

그게 더 최악이었다.

분명 그녀를 빼고 따로 단톡을 파서 그녀를 흉보고 있을 테지.

치욕스러움에 단톡에서 나오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아예 제 욕을 하라고 자리를 펴주는 꼴일 뿐이었다.

겉도는 인사가 오고 가는 걸 초조한 마음으로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지후는 어떡하나.

지은은 지후와의 통화를 끝낸 자신을 보던 국회의원 사모님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마치 벌레를 본 듯한 표정.

4선 국회의원과 사돈을 맺는 건 물 건너간 듯싶었다.

그래도 자기 계획대로 되기만 한다면, 지후는 곧 좋은 짝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간신히 정 원장을 졸라 돈을 좀 보내기는 했는데 방학 때 들어올 때까지 쓰기에는 턱없이 적은 돈이었다.

아예 이번에 한국에 들어오면 미국 대학교는 휴학하라고 하고, 회사에 들어가라고 할까.

좋지도 못한 대학, 외국 생활을 하다가 사고 쳐서 사회면에 나오느니 그냥 일찍 회사를 들어가 일을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아침에 터진 기사를 생각하는 지은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이 치욕도 이제 곧 끝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압구정 피부 마사지 샵으로 향했다.

사람들을 보긴 아직 꺼려졌지만 그래도 며칠 스트레스를 받았더니 어깨가 뭉치는 것 같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사지 샵 로비에 있던 몇몇 여자들이 그녀를 발견하고 흠칫 놀랐지만, 지은은 태연하게 인사를 건네고 관리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 목 쪽 많이 뭉쳤으니까 오늘은 좀 세게 해줘요.”

간단한 주문을 하고 마사지 베드에 누웠다.

따뜻한 온도와 적당한 습도.

향긋한 아로마 향에 며칠 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등에서 시작되어 날개뼈, 엉덩이와 몸통을 훑는 손길에 노곤히 잠이 왔다.

깜박 잠이 들려는데 전화가 왔다.

그녀의 아버지인 정 원장이었다.

“잠깐만요.”

스텝을 물리고 전화를 받았다.

평상시라면 마사지 중에 전화를 받지 않을 지은이었지만 아침에도 한바탕 길길이 날뛰는 걸 달래고 나온 터라 어쩔 수 없었다.

비위를 맞춰주어야 그나마 돈이라도 얻어내 지후에게 보내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자존심이 상해 가지고 있는 패물을 팔아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웠다.

하나하나 그녀가 세심히 골라 구입한 컬렉션이었다.

나중에는 돈이 있어도 못 살 귀중품들이었다.

지후가 돌아오면 곧 다 해결될 텐데 뭐. 그때까지만 참아야지.

마음을 다잡으며 전화를 받았다.

“네, 아빠.”

- 넌 지금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게야?!

“잠깐 볼일 보러 나간다고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 볼일? 너는 이따위 기사가 났는데도 볼일을 보고 싶더냐?

또 아까 기사 얘기인가. 지은이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빠. 어차피 민 이사는 더는 아버지 손 안 잡아줘요. 언젠간 아버지도 내칠 거라고요. 그전에 절 믿고, 제 손을 잡으세요. 지후가 대표가 되기만 하면…….”

- 네 편? 사람들이 민씨 집안에 피 팔러 들어간 너를 가여워해서 네 편이라도 들어준다는 게냐?

조롱과 화가 뒤섞인 정 원장의 말에 지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 모르겠으면 기사를 봐!

지은은 재빨리 핸드폰을 열고 검색창에 〈MJ 인터내셔널〉을 검색했다.

주르륵, 아침에 봤던 기사들만 잔뜩 있을 뿐, 별다른 기사는 없었다.

그러던 중 방금 올라온 기사 하나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최근 불거진 논란 속 〈MJ 인터내셔널〉 민신후 이사가 입장 밝혀.〉

『최근 불거진 민신후 이사의 희소병 소식에 민 이사 측에서는 ‘여태껏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았던 만큼, 앞으로도 회사 업무와 성과에는 별다른 영향 없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일축했다.

또한, 자신을 걱정해주시는 국민을 보며 감사함을 느꼈다며, 앞으로 희소병을 적극 알리고 지원하겠다는 의지로 서연대학교병원에 희소병 환우를 위해 써달라고 십억을 기탁했다는 소식으로 훈훈함을 자아냈다.

최측근의 말에 따르면 민신후 이사가 이토록 자신만만한 태도는 희소병의 예방을 위해 지속적 수혈을 받아야 하는데, 이미 민 이사는 이 수혈 루트를 확보했다는 것.

사실 예전 민도재 사장의 본처 사망 후 1년도 안 되어 재혼한 사실에 대해 민 사장을 알던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였는데, 실은 민도재 사장과 재혼한 정 모 씨가 민신후 이사에게 수혈을 할 수 있는 특정 혈액 보유자였던 것이라고 한다.

이에 따라 새엄마인 정 모 씨로부터 안전하게 수혈을 받는 민 이사가 건강에 대해 확신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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