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성식과의 가족 모임 후 집으로 돌아온 건 신후와 초연 단둘이었다.
오늘 솔은 성식과 함께 본가에서 자기로 결정해서였다.
물론 성식이 은근히 바라는 눈치였지만 적극적으로 본가에서 자겠다고 한 건 순전히 솔이의 결정이었다.
아래채 가득한 신후의 책과 장난감들이 솔의 마음에 쏙 든 모양이었다.
‘나, 이거 보고 가도 돼요?’
‘마음에 들면 몇 권 챙겨 가. 나중에 다 집으로 옮겨줄게.’
‘아니 아니. 다 보고 갈래요!’
신후의 제안에도 솔은 도리질하며 집으로 돌아가길 거부했다.
성식 역시 싱글벙글하며 자신이 돌 볼 테니 너희들끼리 가라며, 둘을 쫓아냈다.
너무 좋아하는 성식의 모습에 신후도, 초연도 할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저녁 시간임에도 저녁도 얻어먹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저녁 일곱 시.
초연은 재빨리 주방으로 가 앞치마를 하고 저녁 준비를 했다.
반찬이야 신 여사님이 만들어놓은 것이 있으니 밥이나 앉히고, 된장찌개나 끓일 요량이었다.
쌀뜨물에 된장을 풀고, 두부를 써는 사이 어느새 손을 씻고 온 신후도 식탁을 닦고, 수저를 놓았다.
냉장고에서 반찬도 꺼내 대충 앞 접시에 담아 준비도 했다.
그리고는 배가 고프다며 냉장고에서 사과를 하나 꺼내 싱크대로 다가와 씻기 시작했다.
이미 씻느라 팔꿈치까지 둘둘 말린 셔츠 아래 굵은 팔뚝의 힘줄이 사과를 뽀득뽀득 씻을 때마다 꿈틀거렸다.
사과 하나 씻는데 아까운 근육이었다.
“당신도 한 조각 줄까?”
그녀가 사과를 쳐다본다 생각했는지 신후가 과도를 꺼내며 물었다.
“됐어요. 밥 먹을 건데요. 너무 많이 먹지 마요. 아 참. 아까는 일부러 그런 거죠?”
민망함에 얼버무리며 대답하던 초연이 화제를 돌렸다.
“뭐가?”
그녀의 거절에 신후가 과도를 다시 제자리에 넣고 빨간 사과를 껍질 채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아삭, 하는 소리와 상큼한 사과 향이 그녀의 코끝을 자극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할아버님 말에 일일이 토 단 거요. 일부러 분위기 풀려고 그런 거 맞죠?”
“할아버지랑 난 원래 그래.”
싱크대에 기대어 질겅질겅 사과를 먹는 모습이 오늘따라 불량스러워 보였다.
예전에 그의 신분을 몰랐을 때는 그가 진짜 도망친 깡패는 아닐까 생각해본 적도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제 이름도 밝히지 않아 주남이라고 불려도 별말 안 하던 사람이었다.
병원을 가는 것도 극도로 꺼렸고, 경찰을 보면 은근히 피해 다녔다.
과거에 대해서도 일절 말하지 않았고, 인력 사무소를 통해 여기저기 몸 쓰는 일터로 다니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여름 내내 바깥일에 까맣게 그은 피부.
검은색 면티 아래 숨길 수 없는 근육.
공사장 일을 마치고 와서 대충 씻고, 작은 개다리소반에 앉아 머슴 밥을 먹던 그를 누가 〈MJ 인터내셔널〉의 후계자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근데 지금 싱크대에 기대 긴 다리를 쭉 뻗은 채 사과를 먹는 그를 보니 어쩐지 그때의 제 판단이 이름이나 경찰을 피하던 모습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회사 사람들이 보면 흉볼까 봐 무섭네요. 앞으로는 할아버님께 좀 살갑게 대해봐요. 솔이도 보는데. 신후 씨가 그러면 솔이도 보고 배워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신후의 모습에 만약 솔이 이대로 신후를 닮아 큰다면 사춘기 때에 제 속을 꽤 썩일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가.”
신후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사과를 베어 물었다.
예전에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도 날을 세우던 그의 모습과 비교하면 참으로 부드러워진 모습이었다.
지은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는 참으로 절망스러웠는데.
모든 일이 터진 이후 오히려 평화가 찾아왔다.
그 평화가 신후에게도 찾아온 듯싶었다. 다행이었다.
그리고 초연은 이 행복을 성식과도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이사 말이에요…….”
초연이 두꺼운 오븐 장갑을 끼고 된장찌개가 바글바글 끓는 뚝배기를 식탁 한가운데 옮겼다.
이제 밥만 완성되면 끝이었다.
“당신 괜찮으면 마음대로 해.”
아까와는 완전히 달라진 신후의 반응에 초연이 두 눈을 깜박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아래채에 들어가서 살고 싶다며. 실은 싫었던 건가?”
“그게 아니라 아까는 신후 씨가 싫다고 했잖아요. 갑자기 태세를 전환하니까 이상해서 그렇죠.”
초연은 아까 성식과 신후의 대화를 떠올렸다.
‘이사를 했다며?’
‘네. 정리되면 한 번 모실게요.’
‘그럴 것 없다. 살림살이 아직 안 들였으면, 아예 이 집으로 들어오는 건 어떠냐? 이 본채 말고, 저 아래채. 네가 원하는 대로 싹 꾸며서 들어오면 좋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녀의 말에 성식은 기다렸다는 듯 합가 얘기를 꺼냈다.
초연의 입장에서는 놀랍긴 하지만 싫은 건 아니었다.
다만 그 부분에 대해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어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만약 오늘 성식을 보지 못했다면, 자신 역시 합가를 부담스러워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솔이를 보는 따뜻한 눈빛과 지은까지 떠난 마당에 이 큰집에 성식 혼자 덩그러니 남아있을 것을 생각하니 안쓰러웠다.
그녀가 말이 없는 사이 신후가 먼저 제 뜻을 밝혔다.
‘싫습니다.’
‘아니, 그냥 초연이 의견 묻는 거 아니냐. 너도 일하면 바쁠 테고. 솔이 엄마 혼자 애를 보면 얼마나 힘들겠어.’
간절한 성식의 표정에서 초연은 성식의 깊은 외로움을 느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느라 방학 때 부산에 내려가면 동네 사람들은 그제야 순례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고 그녀에게 이야기를 전했다.
매번 김치에 밥만 먹는다던 할머니가 그녀가 오니 이제야 식사를 챙긴다고.
네 할머니 건강 생각해서 오래 있다 올라가라고.
범규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평생 천연 염색 장인으로 존경받고 살아도 혼자 산다는 건 참으로 외로운 삶이라는 걸 초연은 범규를 통해 알게 됐다.
솔이 세 살 때 새를 잡겠다고 여기저기 새총을 쏘아대다가 범규의 장독대를 망가뜨린 적이 있다.
염색하는 사람에게 장독대는 한해 농사의 결실 같은 것이었다.
3월이 되면 종자를 심고, 여름 내내 잘 자라는지 뒷산에 올라가 체크했다.
분홍빛 꽃대가 올라오면 기쁜 마음으로 허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잎과 줄기를 산처럼 베어냈다.
온몸에 땀이 흐를 정도로 무더운 날, 몇 번이나 무거운 포대로 쪽을 날라 항아리를 채우고, 씻고, 삭힌 다음 조개 껍질 가루를 넣어 기다란 몽둥이로 어깨가 빠질 정도로 저어주었다.
그 힘든 일을 하면서도 범규는 늘 싱글벙글이었다.
그렇게 몇 계절에 걸쳐 정성을 쏟은 쪽물 장독대를 그만 솔이 깨버린 것이다.
범규가 염색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 줄 알기에 초연은 송구함에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그때 범규가 그녀에게 말했다.
‘초연아. 세상 예쁜 게 쪽빛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솔이 똥 기저귀가 더 예쁘더구나. 너랑 솔이를 만나서 내가 세상 큰 행복을 느껴. 고맙구나.’
범규의 오랜 지기인 이장님 역시 그랬다.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했을 줄 몰라도 범규가 늘 자식들과 지지고 볶고 사는 자신을 부러워했노라고.
너를 만나고 범규가 참으로 즐거워 보인다고.
성식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큰 기업의 회장이라고 하더라도 그 큰집에서 혼자 지내는 삶이 행복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다 키웠던 자식과 며느리도 앞서가고, 정붙이던 신후마저 나와버리면 상실감은 배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여기 본채 위에 터가 있다. 거기에 네 작업실 차려줄 테니 들어오는 건 어떠냐. 뒤쪽으로 염료들 보관할 장독대 놓을 공간도 많아.’
무엇보다 이토록 자신을 위해 신경까지 써주는 성식을 어떻게 거절한단 말인가.
다만 계속 합가는 싫다는 신후를 집으로 돌아와 차분히 설득해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금방 대답을 해버리다니. 오히려 맥이 풀려버리는 건 초연이었다.
“아아, 나오기 전에 할아버지께서 한마디 하시더라고.”
“뭐라고요?”
“같이 살아야 본인이 솔이 데리고 잘 테니 둘째 갖기 쉽지 않겠냐고.”
집안 어른으로서 손주를 더 보고 싶은 건 당연한 말씀이신데 왜 이렇게 부끄러운지.
초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맞는 말이지. 오르가슴을 잘 느껴야 임신도 잘 된다던데 솔이 깰까 봐 당신 긴장해서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면 둘째는 영 꽝인 거잖아.”
초연이 얼른 장갑 낀 손으로 그의 입을 손으로 가렸다.
“어쩜 그런 말을 뻔뻔하게 할 수 있어요?”
그녀의 힐난에 신후가 눈썹을 밀어 올리며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그제야 초연은 자신이 더러운 장갑을 그의 얼굴에 문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놀라 손을 떼려는데 신후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는 다른 손으로 장갑을 벗겨낸 후 그녀의 손을 자신의 뺨 위에 올려두었다.
“부부 사이에 가족계획 얘기를 안 하면 누구와 하라는 거지?”
초연의 손을 자신의 커다란 손으로 감싼 채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에 초연은 할 말을 잃었다.
별 것 아닌 스킨십인데.
그와 단둘이 한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공기가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공기를 뜨겁게 만드는 건 그의 눈빛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초연은 그의 눈빛에 시선을 잡힌 채 그의 손이 자신의 손을 제멋대로 움직이는 걸 지켜보아야 했다.
“신 여사님? 아니면 할아버지? 그것도 아니면 길 가던 여자 붙잡고 가족계획을 세우라는 건가?”
매끈한 뺨을 지나 턱수염이 돋기 시작한 까끌까끌한 턱.
꿀렁이는 목울대 아래 쿵쿵 뛰기 시작하는 가슴에서는 그녀의 심장 역시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아니었다.
실은 그의 가슴에 손이 올려지기 전부터 그녀의 심장은 뛰고 있었다.
“이 사정 얘기도?”
어느새 아래로 내려간 손 안에는 그의 부푼 성기가 가득 찼다.
옷에 덮여 있어도 그 크기와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였다.
이 정도면 지금 당장 삽입해도 무방하겠지.
저도 모르게 초연의 아랫배도 바짝 조여들어 왈칵 액을 토해냈다.
“밥 먹고 얘기해요.”
그에게 휘말렸다간 저녁 먹기는 글렀다.
초연은 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려 했지만 실패였다.
“밥도 먹고 너도 먹을 수 있잖아.”
오히려 그녀를 싱크대 사이에 가둔 채 신후가 몸을 붙여봤다.
그의 부푼 성기가 그녀의 아랫배를 잔뜩 압박했다.
“식, 식탁 엉망 되잖아요.”
맞닿은 몸에 더운 숨이 나왔다.
“그 정도로 발정 나진 않았어. 얌전히 먹으면서 할 수 있다고.”
앞치마도 벗길 여유도 없이 블라우스 단추부터 푸는 사람의 말을 믿을 수는 없다.
“거짓말. 옛날에도…….”
아차 싶어 초연이 입을 닫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의 말에 신후의 눈빛이 하이에나처럼 빛났다.
“옛날에도? 옛날에 내가 어떻게 했는데? 밥 먹기 전에 덮쳤어? 아니면 밥 먹다가? 식탁이 엉망이 될 정도로 뭘 어떻게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