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깊숙한 각인-65화 (65/84)

〈65〉

다음 날 초연은 신후, 솔이와 함께 본가로 향했다.

이제 한 식구가 되었으니 인사를 하자는 성식의 제안이었다.

6년 전에는 문 앞에서 돌아가야 했던, 높은 담장 안으로 들어서는 초연의 감회가 새로웠다.

반면 솔이는 무척이나 신나 했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성처럼 높은 돌벽을 지나 수십 개의 계단을 올라 평평하게 펼쳐진 마당에 들어선 솔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와. 엄마 여기 텔레비전에 나오는 집 같아.”

세 식구가 정원에 들어서자 성식이 참지 못하고 달려 나와 그들을 반겼다.

“어서들 와라.”

“안녕하세요.”

초연이 허리 굽혀 다소곳이 인사를 드렸다.

지난번 신후의 집에서 마주친 이후 처음 보는 성식이었다.

자신을 질책하던 성식의 목소리와 경멸 어린 눈빛이 아직도 생생했다. 저도 모르게 온몸이 긴장됐다.

“그래, 잘 왔다.”

그녀의 인사를 받아주던 성식의 시선은 이미 그녀의 다리에 붙어있는 솔이에게 향한 지 오래였다.

“아이고, 우리 솔이 왔냐.”

하지만 아쉽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한 눈으로 솔이를 바라보는 성식의 눈빛에 초연은 안도했다.

아무리 제 핏줄이라고 해도 밖에서 낳아온 자식이라고 싫어할 수도 있었다.

성식으로서는 신후를 살릴 규림과의 사이에 손주를 보고 싶었을지도 모르고, 신후와 같은 병을 앓는 손주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우려와는 달리 솔이를 애틋한 눈으로 봐주시는 눈빛에 초연 역시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안녕하세요. 민. 솔. 입니다. 성이 민, 이름이 솔. 외자 이름이에요.”

솔의 이름을 민솔로 바꾸면서 초연은 솔이에게 이 부분에 대해 설명했다.

원래 아빠의 성을 가운데 두었지만, 이제 아빠가 같이 사니 아빠의 성을 맨 앞에 두어야 한다는 초연의 말을 솔은 금방 이해했다.

동시에 ‘이민솔’이었던 자신의 이름을 ‘민솔’로 바꾸어 소개하는 건 솔의 몫이었다.

친구나 선생님들에게 하던 자기소개를 솔은 성식에게도 똑 부러지게 했다.

“오구 오구. 그래 민솔 맞지. 이민솔이 아니고 민솔.”

솔이 앵두 같은 입술로 민씨 핏줄임을 당차게 자기소개 하는 모습에 성식의 입 또한 귀에 걸렸다.

그러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손뼉을 쳤다.

“아 참. 우리 솔이 줄 선물도 준비해 뒀는데.”

“감사합니다.”

솔이 꾸벅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어이구 어이구. 선물이 뭔지 알고 벌써 인사를 해.”

“오늘 건 모르지만 지난번에 저 병원 갔을 때 헬기로 치료제 보내주신 거요. 엄마가 그거 할아버지 헬기랬어요.”

“흠흠. 그랬지.”

성식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MJ 인터내셔널〉 소유의 헬기니 그의 헬기가 맞았다.

하지만 신후가 헬기를 무단 사용했다고 얼마나 욕을 퍼부어댔는데.

솔이에게 헬기를 가지고 감사 인사를 받으려니 민망함이 몰려왔다.

그의 기분을 눈치챈 신후가 말없이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지난번에 어린이집에 책 보내주신 거요. 그것도 감사합니다. 우주랑 블랙홀 관련 책들 엄청 재밌었어요.”

성식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래 이건 내가 한 게 맞지!

안 그래도 책을 보내놓고 솔이 책을 읽었는지, 마음에 들었는지 궁금하던 차였다.

솔이 보라고 책을 보내긴 했는데 소식을 몰라 서운했는데 이렇게 솔이의 입으로 감사 인사를 들으니 책을 읽긴 읽은 건가 싶어 뿌듯했다.

“그건 어떻게 알았누? 어린이집 선생님들이 말해줬어?”

“아니요. 책 뒤에 할아버지 함자 도장 찍혀있는 거 봤어요.”

“도장? 그러면 한자일 텐데?”

“그 정도는 읽을 줄 알아요. 이룰 성, 나무 식.”

“네 살에 천자문 다 뗐다고 합니다.”

솔이의 옆에선 신후가 한마디 보탰다.

“신후 씨.”

민망한 초연이 신후의 옆구리를 쳤지만, 신후는 뭐 어떠냐며 뻔뻔한 표정을 지었다.

“그랬어? 제 아빠랑 똑 닮았구나.”

이제껏 세상 저 혼자밖에 없는 것처럼 모든 일에 시큰둥하던 신후였다.

지후가 곧 졸업을 하고 올 텐데 회사는 어떻게 할 것이냐, 규림과의 결혼은 어떻게 할 예정이냐, 이야기가 나올 때도 남 이야기처럼 딴청을 피우던 놈이었다.

그런 놈이 제 아들놈 자랑에 민망한 것도 모르고 나서는 모습이 성식은 오히려 좋아 보였다.

“아빠도 네 살에 천자문 다 뗐어요?”

초연의 다리에 매달려 있던 솔이 고개를 들어 신후를 올려다보았다.

자신과 신후에게 또 닮은 구석이 있다니 기분이 좋은 눈치였다.

요즘 들어 솔이에게는 버릇이 생겼다.

신후와 자신의 공통점을 찾는 것이다.

신후와 자신의 자는 자세가 닮았다는 초연의 말에 둘을 찍은 사진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보았다.

둘 다 삼겹살의 비계를 바싹 구워 먹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에는 매일 삼겹살을 먹자고 노래 불렀다.

오늘 솔이의 일기장에는 아빠와 자신의 닮은 점 한가지가 더 추가될 듯싶었다.

“당연하지. 아빠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삼개국어 마스터했어.”

신후가 손가락 세 개를 들어 솔의 눈앞에 흔들었다.

반쯤 장난삼아 한 말이었지만, 순간 솔의 눈에 반짝, 승부욕 스쳤다.

초연은 곧 솔의 일기장에 아빠와 닮은 또 다른 점이 추가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

갑자기 승부욕이 발동한 솔은 신후의 어린 시절 방을 구경하고 싶어 했다.

성식은 개성댁을 붙여 솔이를 아래채로 보냈다.

솔이 아래채에 흥미를 보인다면, 그의 입장에서는 초연과 신후를 설득하기 위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핑곗거리가 될 터였다.

솔이를 아래채에 보낸 후 셋은 응접실에 둘러앉았다.

고용인이 찻잔에 차를 채우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초연은 저도 모르게 잔뜩 긴장해 허리를 곧추세웠다.

성식이 솔은 반겼지만, 자신까지는 반기지 않을 수도 있다.

신후의 아이를 낳아놓고도 숨어 살았고 했고, 지난번 만났을 때도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

어른을 속였다고 화가 나실 수도 있는 일이었다.

신후는 그럴 리 없다고, 할아버지도 그녀를 반길 거라고 했지만 계속 지은에게 들었던 게 있는지라 초연은 쉽게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만약 성식이 서운한 말씀을 하셔도 티를 내지 말자. 마음을 다잡고 온 터였다.

“그동안 마음 고생시켜서 미안했구나. 진작 말하지 그랬어. 내가 그것도 모르고 너무 모질게 굴었구나, 그치?”

생각보다 부드러운 대화의 물꼬에 초연이 안도하기도 전,

“몰랐으면 그래도 됩니까?”

불퉁한 신후의 지적에 성식과 초연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신후 씨…….”

놀란 초연이 신후의 허벅지를 잡았다.

어른이 사과하러 부르신 자리였다.

저 위치에, 저 연세의 분이 먼저 사과를 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제 편을 들어주는 신후 때문에 오히려 불편한 건 초연이었다.

“흠흠. 아니다, 아니야. 그래. 내가 잘못했지. 미안하다. 내가 저놈 병 때문에 다른 사람 마음을 미처 살피지 못했어.”

성식은 애써 신후의 말을 못 들은 척 너그러운 표정을 유지하며 초연의 손을 잡고 다독였다.

오늘이 어떤 자리인가. 초연에게 사과를 하러 부른 자리 아니었던가.

맺힌 건 잘 풀어야 앞으로 한 가족이 되어도 잘 지낼 수 있으리라 믿는 성식이었다.

“괜찮습니다. 저라도 솔이한테 그런 기회가 있다면 그랬을 거예요.”

“역시. 네가 엄마라 부모 마음을 아는구나.”

다행히 성식 역시 그녀의 생각보다는 훨씬 긍정적으로 그녀를 대해주었다.

이것만으로도 초연에게는 큰 성과였다.

“대충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 마시죠.”

까칠한 신후의 말만 빼면.

계속 신후를 말리는 것도 성식의 눈에 안 좋게 보일 수 있기에 초연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성식이 못마땅한 얼굴로 신후를 한 번 노려본 후 한쪽에 모아두었던 서류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그래. 여기에 사인하거라.”

“이게, 뭔가요?”

몰라서 묻는 게 아니었다.

부동산 증여 관련 서류들이었다.

그것도 청담동 소재의 건물이었다.

어떻게 이게 자신의 앞에 있는지는 뻔했다.

신후가 사과의 증표로 성식에게 억지로 얻어냈음이 틀림없을 터였다.

아무리 작아도 몇십억은 훌쩍 넘을 텐데 부담스러웠다.

“그냥 사인 해. 당신한테 손해는 아냐.”

신후가 그녀의 손에 펜을 쥐여 주었지만, 초연은 펜을 내려놓았다.

“아닙니다. 이건 받을 수 없습니다.”

“원래 우리 집에 며느리로 들어오면 이 정도는 줘.”

신후가 다시 그녀의 앞에 서류를 내밀었지만, 초연은 한사코 서류를 밀며 거부했다.

“아니에요. 이 비싼 건물을 제가 받는 건 말이 안 되는 거 같아요. 제가 감당할 수준이 아닙니다. 그냥 마음만 받겠습니다.”

“마음은 아직 안 주셨는데 왜 마음을 받아. 그냥 건물만 받아.”

신후는 기어이 초연의 손에 펜을 쥐여 주고 사인을 종용했다.

그 모습에 성식이 결국 분통을 터트렸다.

“야 이놈아! 돈 가는 데 마음 가는 거지. 내가 마음 안 가는 데 돈 쓰는 것 봤냐? 네 놈은 꼭 말을 그리 해야겠어! 나도 솔이 엄마한테 미안한 마음이 있으니 제일 아끼는 청담동 건물도 내놓는 것 아니냐!”

쩌렁쩌렁한 성식의 목소리에 순식간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초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얼굴이 금세 붉으락푸르락해지는 성식의 모습에 그녀 역시 어찌할 줄 몰랐다.

단 한 사람.

“봤지. 당신이 이거 안 받는 건 할아버지 마음을 무시하는 거야. 그러니 사인 해.”

어른이 화를 내시는데도 태연한 신후의 반응에 초연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면서도 뻔뻔한 신후와 씩씩거리는 성식의 모습이 어딘지 친근했다.

돌아가신 스승님과 죽마고우였던 이장님이 티격태격할 때의 모습 같았다.

한없이 어렵던 두 분이 내기 장기 한판에 3일은 삐쳐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솔이 친구들과 노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신후와 성식의 모습에서도 초연은 그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서로에게 툴툴거리지만, 서로가 아니면 누구를 붙잡고 툴툴거릴까.

이게 편한 사람들과 있을 때의 두 사람의 본 모습이구나 싶었다.

무섭기는커녕 오히려 입가에 미소가 걸리고 마음이 간지러워졌다.

귀엽단 생각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죄송합니다…….”

얼른 입을 가렸지만 말끝에 웃음기가 묻어나는 걸 숨길 수 없었다.

민망한지 큼큼, 성식도 헛기침을 연신 해댔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도 비죽비죽 웃음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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