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깊숙한 각인-64화 (64/84)

〈64〉

여태 지은에게 수모를 당하면서도 참았던 단 하나의 이유.

이미 검사가 한 번 지연되었던 전적이 있는지라 초연의 두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정 원장이 쉽게 그런 짓을 저지르지는 못할 거야. 그동안 병원 크는 데 우리가 도움 준 것도 있고.”

정 원장과 지은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이긴 했지만 지은 만큼 정 원장 역시 야망이 큰 사람이었다.

어제 신후는 지은을 통해 자신이 〈K 병원〉에 대한 모든 지원과 진행하는 사업을 끊겠다고 말했다.

아마 지은에게 그 소식을 전해 듣는다면 정 원장은 〈K 병원〉을 사수하기 위해 득달같이 달려와 그에게 협조를 약속할 것이다.

그리고 그에겐…….

“그래도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신후가 걱정스러운 초연의 표정에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정 급하면 치료제 맞으면 되고.”

한 대에 수천만 원 하는 치료제였지만 신후에게 부담될 비용은 아니었다.

하지만 엄마로서 초연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머릿속은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게 된다.

만약 치료제를 제시간에 투여받지 못하는 상황이 닥치면 어쩌지? 하는 그런.

“하지만…….”

“지난번에 헬기까지 띄웠던 거 잊었어?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 걱정하는 그런 일 안 생기게 하니까 걱정 그만해.”

“알았어요.”

확고한 신후의 표정에 초연은 애써 마음을 비집고 싹을 틔우려는 불안감을 꾹꾹 눌러 잠재웠다.

***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지은은 친정 대문을 나섰다.

정 원장의 잔소리도 피할 겸, 점심 모임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어젯밤 늦게 캐리어를 잔뜩 끌고 집에 가니 정 원장의 잔소리가 장난이 아니었다.

갑자기 이 캐리어들은 뭐냐고, 혹시 성식의 심기를 건드린 거 아니냐고 걱정했다.

이 쌀쌀한 날씨에 얇은 가디건 하나 달랑 입고 온 자신을 걱정하긴커녕 성식의 심기 운운하는 게 어떤 의도인지 뻔했다.

행여 자신의 병원에 영향이 갈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동안 병원이 그만큼 큰 게 누구 덕인데.

그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자신을 찬밥 취급하는지.

“내가 계속 이 꼴일 줄 알아?”

이를 바득바득 갈며 아침부터 단골 메이크업 샵으로 향했다.

어제 그 난리를 피우고도 지은이 이토록 여유로운 건 나름 믿는 구석이 있어서였다.

그놈의 불같은 성질머리로 성식이 자신을 내쫓았을지언정 자신의 피가 있어야 하는 신후였다.

자신이 없다면 저승사자를 뒤에 달고 사는 건데.

신후라면 죽고 못 사는 성식이 병원과 정 상무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신후의 말을 호락호락 따라줄 리 없다.

그냥 홧김에 내지른 말이라 생각했다.

아마 곧 사과를 하고 자신을 데리고 가리라.

하지만 이런 수모를 당한 이상 그녀 역시도 살 다른 방도를 찾아야 했다.

신후의 견제가 더욱 거세지기 전에 다른 연줄을 만들어야 했다.

지후가 대학이라도 졸업하고 오면 생각해보려던 결혼을 서둘러 준비해야 할 듯싶었다.

“오늘 중요한 모임이니까 신경 써서 해줘요.”

오늘 모임은 지후의 혼처 자리를 위해 꾸준히 교류하던 골프 모임이었다.

원래 그녀가 낄 수 없는 모임이었지만 신후를 사윗감으로 탐내는 이들이 있기에 자리를 내주었다. 물론 그녀의 목표는 신후가 아닌 지후였지만 말이다.

사실 이 모임이 지은에게 마음 편한 모임은 아니었다.

다들 본처랍시고 은근히 후처인 그녀를 무시하는 속내를 그녀라고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이만큼 괜찮은 사업가, 정치, 교육자 집안까지. 지후의 짝을 찾기 적당한 모임이 없으니 꾹 참고 참석했다.

게다가 이 바닥에 스피커로 소문 난 여자도 두어 명 있으니 구질구질하게 하고 나갈 수 없다.

허름하게 하고 나가거나 안색이 조금만 안 좋아도 몇 시간도 안되 주식 찌라시에 올라갈 정도로 입이 가벼운 여편네들이었다.

그러니 속상한 일이 있을수록 더욱 화려하게 꾸미고 아무렇지 않게 모임에 참가하는 노력이 필요했다.

“정 여사. 며느리 봤다면서요?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진작 말했으면 선물이라도 준비했지. 왜 말도 안 했어요?”

그녀가 약속된 호텔 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여기저기 인사가 쏟아졌다.

말이야 신후의 결혼 축하였지만 은근히 신후의 결혼 소식에 실망하고 원망하는 투였다.

“민 이사가 하도 조용히 하길 원해서 소문 안 냈어요. 결혼식 하게 되면 초대할게요. 그때 와서 축하해주세요.”

지은은 일부러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이제 신후에게 남은 친부모는 없었다.

그렇다고 민씨 가문 혼사에 버젓이 제가 살아있는데 혼주석을 비우지는 않겠지, 하는 심산이었다.

“그래요. 그러면 다음에 결혼식 할 때는 꼭 불러요.”

다행히 사람들 역시 더는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

식사는 물 흐르듯 흘러갔다.

어느 집 자식이 어느 학교를 들어갔고, 어느 회사에 입사했고, 무슨 성과를 거뒀으며, 누구와 누가 맺어졌다는.

혼기 꽉 찬 자식들과 사업, 부동산 정보들이 오갔다.

식사를 마친 후, 지은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계산지를 집어 흔들었다.

“오늘 점심은 제가 살게요, 호호. 민 이사 결혼 소식도 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것도 죄송하고 저희 지후가 이번에 장학금을 받았거든요.”

사실 지후의 장학금은 그녀가 만든 것이었다.

유학을 보낸다고 능사인 시대는 지나갔다.

미국에 가서도 변변한 성적을 내지 못한다면 한국에 돌아와서도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성식 역시 신후의 업무 성과와 비교할 것이 뻔했다.

어떻게든 미국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성식에게 보여주어야 했다.

해서 미국에 장학 재단을 만들고, 원하는 학생을 선발해 장학금을 주었다. 물론 수혜자는 지후였다.

이런 식으로라도 스펙을 쌓아주지 않으면 성식의 차별은 더욱 심해질 것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몇 시간쯤 후면 지후의 장학금 소식이 이 바닥에 퍼지겠지. 생각만으로도 뿌듯했다.

“어머, 경사가 겹쳤네.”

“그럼 한턱 잘 얻어먹을게요, 정 여사.”

한껏 턱을 치켜든 지은이 계산대로 갔다.

밥값에 와인 값에 기백 만 원이 나왔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이걸로 계산해주세요.”

그녀의 카드를 받아든 직원이 카드를 긁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 혹시 다른 카드는 없으십니까?”

“왜 안 돼요? 그럼 이걸로 해요.”

지은은 살짝 짜증이 올라왔지만 애써 미소를 지으며 지갑에서 다른 카드를 꺼내 건넸다.

새로운 카드로 단말기를 긁던 직원이 다시 카드를 내밀었다.

“저, 혹시 다른 카드는…….”

“무슨 일이에요?”

그녀가 지후의 짝으로 점지해 둔 4선 국회의원의 사모님이었다.

국회의원 사모님 뒤에 다른 여자들까지 몰려들자 슬슬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카드 단말기가 고장인가 봐요. 호텔 레스토랑 수준이 이래서야 원. 지배인한테 카드 단말기 좀 교체하라고 해요.”

“오늘은 제가 낼게요. 정 여사 턱은 다음에 내요.”

이대로 다른 사람이 결제하게 두는 건 그녀 자존심에 허락지 않았다.

괜히 망할 기계 때문에 제 체면이 깎이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아니에요, 사모님. 제가 내야죠. 다시 긁어봐요.”

지시를 내리는 지은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그러는 사이 계산하려는 다른 테이블 손님들까지 점점 계산대 주변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제 잘못도 아닌데 이게 무슨 꼴이람.

자신의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 없다면 한바탕 쏘아줄 텐데.

차마 같이 온 일행들 앞에 제 성질을 마음껏 부릴 수도 없는 처지였다.

“저 안 되는데…….”

“그러면 내가 내려가서 손님들 배웅하고 올 테니 그동안 다시 한번 긁어봐요.”

지은이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다스리며 문을 나서려는데 직원이 나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저, 손님. 계산 안 하고 가시면 안 되시는데…….”

마치 돈 떼먹고 도망가는 사람 취급하는 직원에 태도에 지은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뭐야 이거! 내가 누군지 몰라요? 도대체 매장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지배인 불러요.”

계산대에서 일어나는 소란에 레스토랑 안쪽에 있던 나이 지긋한 지배인이 계산대 쪽으로 나왔다.

“안녕하십니까. 무슨 일이야?”

그녀에게 인사를 한 지배인이 직원에게 물었다.

민 회장이나 도재가 살아있을 때 함께 이 레스토랑을 몇 번 드나들며 얼굴을 익혔던 사람이었다.

“나 몰라요?”

“〈MJ 인터내셔널〉 정 사모님이지 않습니까.”

매니저가 자신을 알아보자 지은은 더욱 기가 살았다.

“도대체 여기 직원교육, 기기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예요? 댁들 기계가 잘못된 거는 댁들 사정이지 왜 손님을 피곤하게 해요? 누가 그깟 몇 푼 되지도 않는 돈 떼먹는다고.”

누르고 눌렀던 화를 터트리는데 전화가 왔다. 지후였다.

지금 그곳은 새벽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전화인가 싶었지만 지난번처럼 대마초가 허가되지 않은 지역에 놀러 갔다가 괜히 경찰에 잡힌 거라면 얼른 국내 언론에서 알려지기 전에 손을 써야 했다.

“어! 아드을. 잘 지내고 있어? 거기 지금 새벽 아니야?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엄마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

눈을 곱게 접으며 제 주변에 몰려든 여자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었다. 남들이 보기엔 살가운 아들과의 통화처럼 보이길 바라며.

- 엄마. 카드 정지했어?

“그게 무슨 소리야? 카드를 정지하다니?”

- 지금 호텔 왔는데 카드가 안 돼. 씨발 이게 뭐야!

“그럴 리가. 다른 카드 써봐. 카드가 왜 정지돼?”

- 몰라. 지금 계좌도 정지 먹었고, 카드도 안 돼. 간만에 쌔끈한 년 데리고 호텔 왔는데 이게 무슨 개망신이야.

“민지후! 너 내가 아무나 데리고 놀지 말랬지? 그러다가 애라도 배면…….”

그렇게 아랫도리 조심하라고 일렀거늘. 욱하는 마음에 한마디 내뱉던 지은은 금세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 아이 씨발. 혹시 할아버지나 형이 정지시킨 거 아냐? 어떻게 좀 해봐!

쩌렁쩌렁 지후의 목소리가 마치 스피커를 켠 것처럼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경악하는 사람들의 표정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잠깐만. 엄마가 알아보고 전화 줄게.”

한 사발 욕이라도 퍼부어주고 싶은 걸 꾹 참고 전화를 끊었다.

카드사에 전화하려 할 때였다.

옆에 서 있던 매니저가 그녀 쪽으로 다가와 조심스레 운을 뗐다.

“저 사모님…….”

“지금 바쁜 거 안보여요? 빨리 카드나 다시 긁어봐요. 아이참. 오늘 일진이 왜 이 모양이야.”

지은이 재빨리 카드에 적힌 카드사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 때였다.

“저, 그게 아니라……. 사모님 카드도 정지되셨습니다.”

놀란 지은이 고개를 들어 매니저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자신에게 쏟아지는 수십 개의 눈동자와 쑤군거리는 입 모양.

지은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지후의 카드 정지에 지은의 카드 정지까지.

이건 분명 기기 결함이 아니었다.

누군가 그녀와 지후의 카드를 일부러 정지시킨 것이다.

“악.”

내가 가만둘지 알아. 민신후. 민솔. 죽여버릴 거야!

지은의 절규가 홀 안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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