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뭐라고 했는데?”
신후의 말에 초연은 눈을 내리깔고 그날의 기억을 더듬었다.
아직도 생생한 기억이었다.
만약 신후가 다음날 서울에 올라갔다면.
지은이 전날 그들을 찾아와 지은과 삼자대면을 했다면.
수천 번은 ‘만약에’를 가정하며 떠올렸던 날이었다.
신후에게 임신 사실을 말할 때의 두려움.
걱정하지 말라던 단단한 눈빛에 느낀 안도감.
할머니와 함께 결혼 한복과 예식장을 가지고 행복한 상상을 하던 한때.
그리고 그 모든 행복을 순식간에 앗아간 지은의 등장.
지은이 앉아있던 자신의 방이 얼마나 낯설었는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다.
저를 보던 지은의 경멸 어린 눈빛과 차림새, 매니큐어 색상까지.
덩달아 떠오른 그 날의 충격에 초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신후가 무릎 위에 올려둔 초연의 손을 잡았다.
“천천히 해도 돼.”
그새 초연의 손이 차가웠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초연이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럼에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듣고 싶었다.
그녀가 당했던 모욕을 글자 하나하나 뼈에 새겨 지은에게 갚아주리라 다짐했다.
“신후 씨 배웅하고 나서 할머니랑 얘기하는데 그분이 왔어요. 당신 사진을 내밀며 당신이 강찬영이 아닌 민신후라고 알려줬죠.”
초연은 차분히 그날의 이야기를 풀어갔다.
그때 지은에게서 그의 본명과 집안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과 결혼을 한다는 말에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말까지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지은이 이미 초연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는 상황이었다.
지은이 초연을 찾아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내뱉었을지는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신후 씨 아버님도 절 반대하신다고…….”
“아니야.”
다만 아닌 건 아니라고 말을 해줘야 했다.
괜히 지은의 말에 휘둘려 초연이 성식이나 죽은 도재 앞에 위축되는 건 바라지 않았다.
“뭐가 좀 생각나요?”
단호한 신후의 대답에 초연이 두 눈을 크게 떴다.
혹시 제가 과거 이야기를 풀어간 것이 단서가 되어 그의 과거 기억이 떠오른 건가.
“그건 아니지만 적어도 아버지가 그럴 분이 아니라는 건 알아. 어머니와도 남들은 정략결혼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어린 시절부터 왕래하던 집안 첫사랑이었거든. 그 여자도 한눈에 반해 본처 죽은 지 1년도 안 되어 집에 들일 정도이니 사랑 가지고 뭐라고 할 분은 아니지.”
아까 지은도 도재의 유지 핑계를 댔던 사실을 떠올렸다.
아마 초연을 속여먹기 위해 둘러대던 핑계가 제멋대로 튀어나온 것이리라 짐작했다.
“우리 집이 결혼 가지고 장사하는 집은 더더욱 아니고. 할아버지도 내 병 때문에 규림과 짝지어주고 싶으셨던 거지 다른 이유는 없으셨어. 만약 당신이 임신했다면 손이 귀한 집이니 쌍수 들고 환영하셨을 것이고.”
“아…….”
초연이 입만 벙끗거렸다.
어쩐지 그가 말하는 그의 부친과 지은이 말했던 그의 부친 사이에 미묘한 간극이 느껴졌다.
뭐라고 콕 집어 설명할 수 없는.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아마 그 여자가 또 거짓말을 지어낸 듯하네. 게다가 아버진 내가 하는 일에 반대하는 분도 아니었고.”
신후의 대답에 초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당신 아버님과 싸우고 가출한 거라고 했어요.”
“가출?”
처음 듣는 긴 여행의 이유에 신후의 미간이 좁혀졌다.
분명 성식과 지은은 그에게 군 제대 후 전국 일주 여행 중에 사고를 당한 것이라고 했다.
“네. 아버지랑 조금 다툼이 있어서 집 나갔고, 연락을 끊어서 이렇게 당신 찾고 있었던 중이라고 했어요.”
초연의 말이 신후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은과 결혼한 이후 도재는 그에게 큰 소리 한 번 낸 적이 없었다.
식사 자리에서 도재를 모른 척해도, 학교에서 담배를 피우다 걸려 학부모 호출을 당했을 때도 그에게 잔소리 한 번 한 적 없었다.
어릴 때는 지은과 지후에게 빠져 자신은 완전 뒷전이라 그런 건가 싶었다.
나이를 먹고 보니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년도 안 돼 지은을 들인 게 그제야 미안해서 그에게 독한 말을 못 했다는 걸 알았다.
그래 봤자 이미 저질러진 일일 뿐.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하지만 한 번도 가출까지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와 그의 부친은 서로를 다치게 하지 않게 하려고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관계였지 굳이 거리를 좁혀 싸우고 한 명이 튕겨 나갈 사이가 아니었다.
그런 자신이 부친과 싸우고 가출까지 했다고?
“말도 안 돼. 그 여자가 거짓말을 한 거겠지.”
기억을 잃기 전의 그의 기억과는 너무 다른 말이었다.
“하지만 신후 씨 가명 썼잖아요. 카드도 안 쓰고, 핸드폰도 당신 명의로 안 썼어요. 난 실은 그래서 당신 처음엔 무슨 죄짓고 도망 다니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아 참, 처음 나랑 부딪쳐서 사고당했을 때 병원도 안 갔고요.”
찬영의 이름을 빌려 쓴 거야 원래 그럴 수 있지만, 카드나 통장도 안 쓰고 병원도 안 갔다니.
이건 누가 보더라도 단순한 여행이 아닌 가출이며, 그 스스로 가족들이 자신을 찾는 걸 피한 거로밖에 볼 수 없다.
그가 알고 있던 단순한 여행이 아니다.
이상하게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갑자기 어두워진 그의 안색에 초연이 물었다.
“신후 씨, 괜찮아요?”
“어, 괜찮아. 계속해.”
신후는 일단 생각을 갈무리했다. 지금 이것 말고도 궁금한 게 한둘이 아녔다.
초연이 남은 말을 할 수 있게 손을 다독여 안심시켰다.
자신을 보고 놀란 초연의 얼굴에서 자신을 처음 보았을 때 놀라 얼어붙었던 초연의 모습이 겹쳐졌다.
마치 귀신을 본듯한.
그 표정이 유난히 가슴에 박혔는데 이제야 왜 초연이 자신을 그렇게 볼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갔다.
그저 헤어졌던 남자와 6년 만에 만나서가 아니었다.
그토록 상처를 주었던 남자였다.
자신 같으면 쌍욕을 하고 걷어찼을 텐데 용케 참은 게 대단하다 싶을 지경이었다.
“사실은 서울에 당신 보러 한 번 찾으러 간 적이 있어요.”
지난번 초연은 그의 이름과 집안을 알고 배신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 배신감에 그를 찾지 않았다고.
자신의 아이까지 임신한 상태에서 자신을 찾으러 오지 않았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느꼈는데 이제야 실마리가 풀렸다.
“그때도 그 여자가 방해했나?”
모든 게 기억나면 좋으련만.
초연의 말에 의해 기억의 퍼즐을 찾아야 하니 좋으면서도 답답했다.
그때의 상황, 초연의 감정을 당시의 1/10도 제대로 자신이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아 속이 타들어 갔다.
“네……. 신후 씨 학교 찾아갔는데…… 등록 안 했더라고요. 그래서 무작정 집으로 찾아갔는데…… 당신 유럽여행 중이라고. 이미 나 잊은 지 오래라고…….”
얘기하는 초연의 입매가 가늘게 떨렸다.
그때의 배신감과 막막함이 한꺼번에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곧 울 것 같은 초연의 표정에 신후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시선을 맞추었다.
“그런 적 없어. 병원에서 의식 없을 때야. 연말에 집에 한 번 간 적은 있는데 그 여자가 병원 생활 지겨울 테니 집에서 가족끼리 식사나 한번 하자고 해서 잠시 외출한 적이 있어. 아마 그때였나 봐. 그때도 역시 기억은 못 찾았을 때고.”
자신은 널 버린 적이 없다고, 오해를 바로잡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들 뭐가 달라지는가.
초연은 이미 상처를 받았고 6년 동안 솔이와 함께 죽도록 고생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졌다.
생각할수록 지은을 찢어 죽이고 싶었다.
아까 뺨이라도 한 대 갈기고 오지 못한 게 한스러울 지경이었다.
“알아요.”
자신보다 더욱 격분하는 신후의 표정에 초연은 마음속 응어리가 풀리는 걸 느꼈다.
물론 지금도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과거였지만, 그가 일부러 자신을 모른 척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늘 겨울이 되면 자신을 생전 처음 본다는 듯, 낯선 얼굴을 하고 그녀의 옆을 무심히 지나쳐가던 그의 꿈을 꿨다.
적어도 이 순간 이후로 그 악몽은 다시 꾸지 않을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희미하게 미소짓던 초연의 머리에 불현듯 무언가 떠올랐다.
“근데 나 그때 돈 받았어요. 돈 줄 테니 아이 떼고 새 출발 하라고……. 물론 아이 떼려고 받은 건 아니에요. 아이 낳으려고…… 그땐 돈이 없어서…… 받았어요.”
지은에게 돈을 받았을 때의 비참함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초연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 아이를 지울까. 아니야 낳아야지.
수백 번, 수천 번 고민했던 순간은 솔이를 볼 때마다 미안했다.
당당히 그깟 돈 필요 없다고 뿌리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움츠러드는 초연을 신후가 껴안았다.
“잘했어. 솔이 포기 안 하고 지켜줘서 고마워. 살아줘서 고마워.”
“흑…….”
제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은 신후의 다정한 말에 그만 저도 모르게 눈물이 터졌다.
초연은 그의 품에 안겨 한동안 울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솔이 태어나고 초연은 강제로 어른이 되고 엄마가 되었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에게 주어진 엄마라는 이름표는 슬퍼하거나 자기 연민에 빠질 시간도 주지 않았다.
딴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몸을 굴리고 염색일을 배웠다.
그렇게 모두 이겨낸 감정이라 생각했는데.
커다랗고 따뜻한 신후의 품 안에서 그동안 애써 눌렀던 두려움, 걱정이 봇물 터지듯 터졌다.
“흐흑…….”
그런 초연의 마음을 아는지 신후 역시 아무 말 없이 초연의 등을 쓸어주었다.
“미안해. 다시는. 다시는 너 혼자 절대 안 둬. 다시는. 그런 일 안 당하게 할게.”
초연의 울음소리가, 가늘게 떨리는 몸의 진동이 칼이 되어 그의 심장을 후벼팠다.
아파봤자 지난 세월 홀로 이 아픔을 견뎌낸 초연보다 아플까.
신후는 더욱 단단히 초연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울음과 진동을 온몸에 새겼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서럽던 초연의 울음이 잦아들었다.
과거의 일단락을 맺은 채 미래를 생각하자니 걸리는 게 있었다.
“근데 그분이랑 저렇게 척을 저버리면 신후 씨랑 솔이 수혈은 어떻게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