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저와 헤어져 청도로 내려가지 않으면 솔이가 수혈받지 못하게 하겠다고 그 사람을 괴롭혔더군요.”
“뭐라고! 어멈아 이게 정말이냐! 감히 솔이 목숨을 가지고 협박해? 그동안 신후에게 수혈해준다는 사실에 친정도, 너도 이렇게 챙겨줬더니 은혜도 모르고 이렇게 배은망덕하게 굴어!”
성식의 호통에 지은이 벌벌 떨었다.
되레 잔뜩 화를 내리누르는 신후와 달리 솥뚜껑만 한 성식의 손이 허공에서 오르락내리락했다.
자꾸 움츠러들다 못해 바닥에 주저앉았다.
“너 아니면 내가 그 피 하나 못 구할 줄 아느냐? 당장 이 집에서 썩 사라지거라!”
신후도 신후였지만 성식의 미움을 받으면 끝이었다.
어떻게 버텨온 세월인데. 이대로 쫓겨날 수는 없었다.
지은은 성식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아버님. 잘못했어요. 다 집안을 위해 그런 거예요. 도재 씨도 죽기 전에 그 앨 반대했다고요. 전 그냥 도재 씨의 유지를 받들어…….”
“뭐야? 뭐가 어쩌고 어째?”
그녀를 내려다보는 성식과 신후의 얼굴이 급격히 굳었다. 그제야 지은은 아차 싶었다.
도재가 죽기 전 초연의 존재를 알았음을 제 발로 고백한 꼴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변명을 해보려 했지만 이미 엉망이 된 머리는 평상시처럼 쉽게 돌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입을 열면 열수록 제 불리한 말만 나오니 지은도 미칠 지경이었다.
신후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제야 6년 전 초연이 자신을 찾아오지 않은 까닭을 깨달았다.
이 망할 여자가 초연이 자신에게 찾아오지 못하게 한 것이다.
가뜩이나 기억나지 않는 과거는 그의 아킬레스건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비어있는 시간 동안 지은이 초연에게 못 할 짓을 했다는 사실에 신후는 분노했다.
“그러니까 6년 전에 이미 솔이와 초연이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거지?”
그녀의 팔을 잡고 일으키는 손길이 우악스러웠다.
지은의 몸뚱어리가 종잇장처럼 그의 손아귀에 딸려 일으켜졌다.
맞닿은 신후의 맹수 같은 눈빛에 지은이 움찔했다.
“뭐라고 했어? 뭐라고 했길래 초연이 날 찾지도 않고 숨어 살게 만들었어!”
신후는 꽉 잡은 지은의 팔뚝을 앞뒤로 흔들며 대답을 종용했다.
만약 6년 전 성식이 초연과 솔의 존재를 알았다면 설령 그가 기억이 없다 한들 성식이 둘을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 시간 동안 솔이를 혼자 키우며 초연이 느꼈던 모멸과 생활고. 솔이 감당해야 했을 상처를 생각하니 미칠 것 같았다.
그것도 모르고 초연은 그의 엄마라고 이 여자를 끝까지 감쌌다.
이게 모두 자신이 이 여자를 엄마 자리에 놔둔 실수였다.
마음 같아서는 눈앞의 여자를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었다.
“민 이사 제발 진정해. 제발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봐. 내가 민 이사 잘못되라고 그랬겠어? 아버님 제발 민 이사 좀 말려주세요.”
윽박지르는 신후의 얼굴에 지은은 눈물이 터져 나왔다.
신후에게 잡힌 팔뚝이 터질 것처럼 아팠지만 지은은 끽소리도 낼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고 온몸이 덜덜 떨렸다.
“개성댁! 어서 썩 이 사람 끌어내! 어딜 감히 민씨 집안 핏줄을!”
성식이 불호령을 내리며 고용인들을 불렀다.
“아버님 이러지 마세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지후를 봐서라도 한 번만 봐주세요.”
지은은 그저 두 손을 모으고 성식에게 싹싹 빌었다.
“오냐. 애까지 있는 사람이 남의 자식한테 그렇게 대해? 네 아버지가 널 그렇게 가르쳤더냐? 꼴도 보기 싫다. 당장 내 집에서 썩 나가!”
어느새 나타난 집안 고용인들이 양팔을 잡고 그녀를 문밖으로 이끌어냈다.
“개성댁 안 놔요? 김 비서! 내가 누군지 알고 이래요? 아버님. 잘못했습니다. 제 말 좀 들어주세요.”
그녀의 울부짖음에도 결국 지은은 고용인들에 의해 쫓겨났다.
***
쾅쾅!
“아버님. 잘못했어요. 한 번만 봐주세요.”
지은은 지금 이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모시던 사람들에 손에 이끌려 집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것도 핸드폰, 겉옷도 없이 맨발로 말이다.
지은은 인터폰을 눌렀다.
“개성댁! 당장 문 열어요! 문 열지 못해요?”
“아버님 성격 몰라요? 지금은 나한테 화가 가서 그러시지만 화 풀리시면 어쩌려고 나한테 이래요?”
윽박도 지르고 달래도 보았지만 인터폰 속 사람은 대답이 없었다.
뻔히 제 말을 듣고 있을 텐데도 모른 척이었다.
이 집의 담장이 이렇게 높아 보인 적이 있던가.
한 번도 제 손으로 열어본 적 없던 문이었다.
그녀가 도착만 하면 알아서 열리고 고용인들은 그녀를 마중 나왔다.
갑작스러운 천대에 지은은 눈물이 왈칵 났다.
지은은 다시 한 번 인터폰을 누르고 분노를 터트렸다.
“사람 내쫓더라도 신발은 주고 내쫓아야지. 신발 하나 없이 내쫓는 게 어딨어요.”
잠시 후 철컹, 육중한 철문이 열렸다.
그러면 그렇지. 일단은 아래채에 가서 성식의 눈에 띄지 않게 숨어있어야겠다 생각하며 발을 들이려던 찰나였다.
개성댁의 진두지휘로 고용인 몇 명이 그녀의 캐리어를 끌고 나왔다.
집안의 캐리어란 캐리어는 모두 꺼낸 듯 열 개도 넘는 양이었다.
“이게 뭐예요?”
“회장님께서 갖다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나머지는 사모님 본가로 보내 드릴 테니 더는 시끄럽게 하지 말고 집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난처한 얼굴로 제 할 말을 한 개성댁이 얼른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깟 옷가지, 보석 몇 개 합쳐봤자 몇억 되지도 않는다.
겨우 이걸 챙기려고 제 한평생을 희생한 게 아니었다.
“이런 게 어딨어요! 내가 누군데 감히 나한테 이래!”
지은의 절규가 검은 허공 속에 퍼져나갔다.
***
현관문 소리가 들리자마자 초연이 현관 쪽으로 달려나갔다.
잔뜩 성난 모습으로 신후가 나갔으니 걱정이 안 될 리 없었다.
말리려 그의 뒤를 따라 나갔지만 이미 신후는 사라진 뒤였다.
그녀의 전화 역시 받지 않았다.
그러니 이렇게 신후가 올 때까지 초조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신후 씨? 괜찮아요.”
“솔이는?”
묻는 신후는 몇 시간 만에 며칠 밤을 새운 듯 피곤해 보였다.
깊은 눈매가 더욱 움푹 들어가고 얼굴도 까칠해졌다.
“자기 방에서 자요.”
“아까 소리 지른 건. 혹시 솔이 들은 건 아니지?”
“아니에요. 신후 씨 그렇게 크게 소리치지 않았는걸요. 신나서 어린이집에서 있었던 일 얘기하다가 잠들었어요.”
그의 시선이 그를 안심시키려고 일부러 밝게 대답하는 초연의 뺨에 닿았다.
붉게 부은 자국에 신후의 가슴이 욱신거렸다.
“미안해.”
신후가 초연을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자신이 기억을 잃은 시간 동안 이 작은 몸으로 세상과 싸워왔다.
그것도 모르고 의심하고, 원망하고, 질투했다.
초연에게 잘못한 건 지은뿐만이 아니었다.
그 역시 초연에게는 죄인이었다.
잠시 놀라 얼어붙어 있던 초연이 부드럽게 그의 등을 쓸었다.
“무슨 일이에요? 본가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묻는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정작 지은에게 당한 건 본인이면서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신후는 초연이를 이끌고 안방으로 갔다.
초연은 침대에 앉힌 신후가 그녀의 화장대를 뒤져 알로에 크림을 가져왔다.
“괜찮아요.”
“열감 있으면 잘 때 불편해.”
빨갛게 부어있는 뺨에 신후가 조심스레 알로에 크림을 펴 발랐다.
뜨끈하게 열이 느껴지던 피부에 차가운 크림이 닿자 초연이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아파?”
초연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시원해요.”
생각보다 시원한 느낌이 괜찮았다.
하지만 신후의 표정은 그렇지 못했다.
뺨을 살피는 얼굴이 꽤 심각했다.
자신을 보는 신후의 눈빛이 마치 솔이 다쳤을 때 자신의 표정과 닮았다.
“누가 보면 꽤 심각한 화상이라도 당한 줄 알겠어요.”
분위기를 띄우려 한 말이었는데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6년 전에. 그 여자가 당신 찾아갔다며.”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초연의 두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분명 아까 신후가 집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그가 몰랐던 이야기였다.
신후가 크림 통을 침대 옆 서랍장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궁지에 몰리니 정신 나가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술술 불더군.”
신후는 본가에서 있었던 일을 남김없이 설명했다.
성식도 화가 나 지은을 집에서 내쫓았고, 실은 회사 원단 문제도 지은의 소행이었음을 알렸다.
회사 원단 문제까지 지은의 소행이었다는 소리에 초연이 깜짝 놀랐다.
자신에게는 모질게 굴어도 진정으로 가족을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MJ 인터내셔널〉에 해가 되는 행동을 할지 몰랐다.
덩달아 초연은 혼란스러워졌다.
지은의 행동이 가족을 위한 행동이 아니라면, 어차피 신후가 과거의 일을 어렴풋이 알게 됐다면.
말하는 게 맞지 않을까?
이제 지은에게 도움을 받을 길은 영영 사라졌다.
솔이의 치료 문제는 그녀 혼자 감당할 수준을 벗어났다.
초연은 잠깐 숨을 들이켜며 심호흡을 하고 입을 뗐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초연은 그냥 지은과 처음 만났던 이야기부터 풀어가기로 결심했다.
“사실은…… 신후 씨가 서울로 올라가던 날. 그분이 찾아왔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