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아하, 민 이사네 말씀이신 거죠? 민 이사도 생각이 있지 않을까요? 아니면 그냥 결혼식 없이 지금처럼 살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구요.”
지은도 더는 신후와 초연의 결혼을 물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와 초연을 족친들 신후가 초연을 놓을 리가 없다.
그 집 식구들을 처리할 방법은 천천히 찾기로 생각 중이었다.
하지만 혼인을 받아들인다고 쳐도 제 손으로 결혼식 준비까지 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본처 죽은 지 1년 만에 들인 여자라고 성식은 지은의 결혼식을 불허했다.
자신이 첩도 아닌데 웨딩드레스 한 번 입지 못하고 이 집에 들어왔다.
그 한이 아직도 마음 깊은 곳에 사무쳐있다.
그런데 초연의 결혼식이라니.
애를 안고 이 집안에 입성한 건 똑같은데 누구는 천대를 받고, 누구는 환대를 받는 이 상황이 짜증 났다.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결혼식도 없이 어영부영 살림을 합쳐.”
“네. 알아보겠습니다. 아버님.”
금세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치는 성식의 반응에 지은은 불편한 심기를 누르며 대답했다.
일단 성식의 기분을 맞추는 게 중요했다.
나중에 초연이 내켜 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신후네 말이다. 둘 다 일하느라 애 볼 사람도 없을 텐데 본가에 모두 들일까 하는데 어멈 생각은 어떠냐? 여기는 불편할 테니 저 아래채 인테리어 싹 다시 하면 연말에는 들어오게 할 수 있겠지? 네가 한 번 업체 알아봐라. 돈은 상관없으니 솜씨 좋은 사람으로.”
아래채는 원래 도재와 죽은 본처가 살던 공간이었다.
말이 아래채이지 집 크기만 보면 성식이 묵는 본채와 같은 크기였다.
처음 신후의 모친이 시집 왔을 때 늙은 시아버지와 한 건물을 쓰는 게 불편할 거라며 아예 단독으로 집을 새로 지어준 것이었다.
본처가 죽고 이 집에 입성했을 때 지은은 자신도 아래채에 살 줄 알았다.
한집에 살지만, 본채 아래채 떨어져 살면 성식과는 그냥 다른 집에서 사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 정도는 미래를 위해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성식은 아래채를 내어주지 않았다.
말은 그녀에게 새로 집에 들어왔으니 살림을 배우라는 이유였지만, 실은 그녀를 괴롭힐 작정이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본처 역시 배운 적 없는 살림을 저한테만 배우라고 하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도재 역시 전처가 살던 곳이니 당신이 불편하지 않겠냐는 말로 달랬지만 실은 그 공간을 그대로 남기고 싶어서였단 걸 모르지 않는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 부수고 새로 짓고 싶었지만 신후 역시 제 엄마를 추억할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어필하는 바람에 그녀의 계획은 무산이 됐다.
덕분에 결혼 후 20년 넘게 매일 아침저녁 성식을 보면서 수발을 드는 중이었다.
그런데 초연에게 아래채라니.
가당치도 않았다.
청담동 병원 건물로도 모자라 자신은 닿을 수 없었던 이 집안 안주인의 자리가 하나씩 초연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미칠 것 같았다.
“세 식구만 같이 살고 싶어 하지 않을까요?”
“그럴까? 하여간 그 신후 놈이 또 뭐라 하겠지. 그럼 어쩐담…….”
“아버님 지후 인턴십 말이에요. 이왕이면…….”
이번에도 지은의 말허리를 자르며 성식이 눈을 빛냈다.
“그 빌라에 나도 집 하나를 얻는 건 어떠냐?”
“네?”
“여기에 안 온다고 하면 내가 가면 되지 않겠느냐. 어차피 종일 어린이집에 맡길 수도 없으니 여차하면 내가 솔이를 보는 거지. 주말에는 같이 본가에 와서 지내고, 주중에는 그 빌라에서 지내고.”
벌써 솔이와 함께 지낼 꿈에 부풀었는지 성식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성식은 재빨리 비서를 호출했다.
“그러면 되겠구나! 이보게, 김 비서. 신후네 빌라에 내가 지낼만한 집 하나 알아보게.”
그 모습에 지은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손이 귀한 집임에도 지후는 성식의 품에 한 번 제대로 안기지 못했다.
몸이 아픈 며느리 때문에 신후는 거의 할아버지 무릎 위에서 컸다고 들었는데 지후는 무릎은커녕 늘 엄한 성식의 곁에 가길 꺼렸다.
사춘기가 되자 그녀 역시 지후의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MJ 인터내셔널〉 집안에서 천덕꾸러기라는 소리를 여기저기서 듣는데 아이가 바르게 클 수 있나.
해서 일찌감치 지후를 미국으로 보냈다.
엄마가 세컨드라는 소리를 듣는 이곳을 떠나 큰 나라에서 자유롭게 어깨 쭉 펴고 살길 바라는 마음에 피눈물을 흘리며 지후를 떠나 보냈다.
근데 솔이를 집에 불러? 그것도 모자라 아예 근처로 이사를 가?
속이 뒤집혀 미칠 것 같았다.
아마 초연과 그년의 아들은 더욱 기고만장해질 것이다.
사람들 역시 신후 뒤는 당연히 솔이라 생각하며 〈MJ 인터내셔널〉의 미래에 지후를 지워버릴 것이다.
“하지만 민 이사가 싫어할 거예요. 아버님.”
“싫어하면 뭐. 내가 그깟 놈 무서워할 줄 아나?”
흥, 콧방귀를 뀌는 성식의 모습은 이미 머릿속으로 이사 몇 번은 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더는 자리를 지켜봤자 얻을 게 없을 것 같았다.
지은이 쟁반을 들고 일어나려는 차였다.
현관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더니 신후가 들어왔다.
“어머, 민 이사가 이 늦은 시각에 무슨 일이에요?”
“오랄 때는 안 오고 이 밤중에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인 게야? 솔이는?”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굳은 얼굴의 신후가 말없이 지은의 맞은편에 앉았다.
자신이 말을 먼저 하지 않으면 지은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서였다.
“그래? 마침 잘 왔다. 내가 그 빌라 단지로 이사할 생각이 있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늙은이 소일거리 삼아 솔이 봐주면 너희도 편하고 나도 당뇨 운동도 되고 좋지 않아?”
“민 이사 차 한잔할래요? 늦은 밤이라 커피는 안 좋고……. 요새 회사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지 얼굴이 까칠한데 대추차 한 잔 줄까요?”
역시나 지은은 평소처럼 살가웠다.
저 얼굴을 하고 뒤에서 초연의 따귀를 때리고, 무릎을 꿇을 때까지 사람 못살게 굴었겠지. 울화가 치밀어올랐다.
“앞으로 초연이 만날 생각 마십시오. 혹시나 초연이가 먼저 만나자고 해도 피하는 게 나을 겁니다. 만약 두 사람이 한 번이라도 더 만났다는 소리가 제 귀에 들린다면 그 책임은 모두 그쪽한테 있는 겁니다.”
“그쪽이라니. 네 이놈.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호칭 똑바로 써라.”
성식 역시 지은을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그래도 법적으로는 신후의 엄마였고, 〈MJ 인터내셔널〉의 안주인이었다.
자신이 지은을 못마땅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제 집안 사람이 어디 나가 무시당하는 꼴은 볼 수 없었다.
집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보는 눈이 한두 개가 아닌데 이 무슨.
“그리고 애미 초연이 만났어? 왜 아무 말이 없었누?”
“저는 그냥 너무 급하게 결혼하는 게 걱정돼서…….”
초연이 그 망할 년이 기어이 제 남편에게 오늘 얘기를 했구나.
지은이 불안한 눈빛으로 신후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못한 채 성식에게 변명했다.
뻔히 보이는 거짓말에 신후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걱정되는 게 급한 결혼입니까, 아니면 솔이 제 다음 후계자로 낙점되면 지후가 낙동강 오리 알이 될까 봐 걱정되시는 겁니까.”
“민 이사.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나는 민 이사를 위해서 한 건데 서운하네. 부모도 없이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여자가 어떻게 민 이사랑 이어져 봐요. 그런 것도 다 알아야 하는데 민 이사는 기억도 못 하니 내가 가서 물어본 거예요.”
“회사 일도 절 위해서 한 일이라. 주장할 겁니까?”
“그, 그걸 어떻게…….”
설마 회사 일의 배후를 벌써 찾을 줄은 몰랐다.
초연의 일만으로도 둘러대기 벅찬데 회사 일까지 변명거리를 생각하려니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러면 저도 그쪽을 위해 뭔가를 해드려야겠군요. 앞으로 〈K 병원〉에 대한 모든 지원 끊을 겁니다. 지금 병원 재단과 연계해 진행하는 사업도요. 정 상무도 내일부로 퇴직 처리될 거니 온 식구 조용히 자숙하셔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찢어 죽일 듯한 날 선 눈으로 말을 쏟아내던 신후가 잠시 호흡을 고르며 한쪽 눈썹을 밀어 올렸다.
의미심장한 표정은 아직 잃을 게 남아 있지 않겠냐는 의미였다.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것. 지후.
순간 가슴이 터질 것 같이 불안하게 뛰었다.
감히 내 새끼를 건드려? 지은이 궁지에 몰린 쥐처럼 발악했다.
“사실 지금 민 이사가 예전일 기억 못 해서 그렇지 그쪽에서 7년 전에 민 이사한테 몸 던져서 임신했을 수도 있잖아.”
쨍그랑! 신후가 집어던진 찻잔이 거실 바닥에 흩어졌다.
지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여태껏 신후를 두고 사람들이 무섭다고 쑤군거릴 때 만해도 지은은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래도 새엄마이고, 수혈을 해 주는 사람이라고 나름의 예의를 갖췄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을 보며 물건을 던지는 신후의 눈빛은 이성을 잃은 눈빛이었다.
그제야 지은은 덜컥 겁이 났다.
어이쿠. 저 화상이 기어이 일을 치는구나. 성식은 말없이 뒷목을 잡았다.
“신후야 그만해라. 이 사람도 집에 새사람이 들어오니 신경이 많이 쓰인 게지.”
지은의 욕심 많은 성격은 성식 역시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젊은 나이에 애까지 딸리고 부인이 있는 남자 품에 덥석 안길 여자가 얼마나 될까.
다만 지은에게 얻을 게 있으니 그 역시 참은 것이다.
적당히 울지 않게 달래며 옆에 두는 것이 나았다.
게다가 규림과 결혼도 못 시키는 판에 소문나지 않고 신후에게 정기적으로 수혈을 해 줄 방법은 지은밖에 없었다.
속이 쓰리지만 이만하면 앞으로 조심하겠지, 생각하며 한 번 더 기회를 줄 요량이었다.
자신을 감싸주는 성식의 말에 지은은 성식의 뒤로 몸을 숨겼다.
그런 지은을 보며 신후가 입술 끝을 뒤틀었다.
“솔이 목숨 가지고 협박할 생각이었으면 이 정도 대가는 생각하고 지랄을 하셨어야지요.”
“뭐? 솔이 목숨? 그게 무슨 소리인 게냐?”
말리던 성식의 눈빛이 돌변했다.
홱, 몸을 돌려 지은을 바라보았다.
잔뜩 화난 신후와 똑같이 호랑이 같은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