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깊숙한 각인-60화 (60/84)

〈60〉

초연이 절박한 표정으로 지은의 옷자락을 잡고 있는 모습에 신후의 눈이 뒤집혔다.

바로 강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야 이거.”

노기 띤 신후의 음성에 강 비서 역시 상황을 짐작하고 어렵사리 말을 이어갔다.

- 오늘 이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바로 정 여사님 쪽에 사람을 붙였는데……. 그쪽에서 이런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오늘 초연이 지은을 만났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이런 모습으로.

“이 사람이 그 여자한테 무릎을 왜 꿇어.”

- 멀리서 찍은 거라 자세한 대화 내용은 그쪽도 모르겠답니다. 다만…….

“다만 뭐.”

- 무릎 꿇기 전에 정 여사님이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사모님께 손을 올리셨다고.

수화기 너머 강 비서가 어쩔 줄 몰라 했다.

“뭐?!”

신후의 언성이 높아졌다.

초연의 붉게 부은 뺨이 옻 때문이 아니었다.

신후는 욕지거리를 하며 전화를 끊고 초연에게 달려갔다.

이미 저녁 식사를 정리를 마친 초연이 솔이와 마주 앉아 각각 독서 중이었다.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들던 초연은 신후와 시선이 마주쳤다.

잔뜩 성난 눈빛과 꽉 다문 입술. 이를 악무느라 움찔거리는 턱 근육에 초연은 무슨 일이 터졌음을 직감했다.

“나 좀 봐.”

솔이가 있기에 잔뜩 참는 눈치였지만 착 가라앉은 목소리의 음산함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신후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일으켰다.

다행히 책에 빠진 솔이는 이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듯싶었다.

초연은 아무 말 없이 그에게 손목을 잡힌 채 안방으로 갔다.

가만히 있어도 사람 꼼짝 못 하게 하는 신후의 성난 모습에 초연의 심장은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열심히 생각하는데 신후가 핸드폰 화면을 그녀의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이게 뭐야.”

핸드폰을 쥔 신후의 손마디가 하얗게 변해있었다. 여차하다가는 핸드폰을 부숴 버릴 것 같았다.

“신, 신후 씨가 이걸 왜…….”

자신과 지은의 모습에 초연은 할 말을 잃었다. 타인의 시선에서 본 제 모습은 너무도 절박하고 비참해 보였다.

“당신이 왜 이 여자한테 무릎을 꿇냐고!”

하지만 지금 초연이 당혹스러운 건, 자신이 초라해 보인다는 사실보다 자신이 지은과 만났다는 사실을 신후가 알았다는 것이었다.

“나 미행…… 했어요? 언제부터요?”

사실은 오늘 있었던 일을 신후에게 얘기해야 하나, 초연도 고민했다.

하지만 얘기를 꺼낸다면 지은과 신후 사이에 난리가 날 게 뻔했다.

사람 잘못 들여 새사람이 들어오자마자 집안 분위기가 나빠졌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지은과의 일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

모든 걸 밝히자니 7년 전 그의 아버지가 자신과 그가 헤어지길 원하셨다는 이야기까지 해야 했다.

굳이 돌아가신 아버지까지 끌고 들어가는 것이 맞나. 초연은 고민하고 고민했다.

아무리 솔이 중요하다고 한들, 도재는 신후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신후는 도재의 아들이었다.

초연이 신후를 솔이에게 좋은 존재로 남기고 싶었던 것처럼, 신후에게도 아버지의 존재를 그저 좋은 기억으로만 남게 하고 싶었다.

자신이 둘 사이를 어그러뜨리고 싶지 않았다.

솔의 문제는 차근차근 자신이 방법을 찾아보려 했다.

그런데 신후가 알아버릴 줄이야.

도대체 언제부터 미행했던 걸까? 어디까지 아는 걸까?

“혹시 그 여자가 무릎 꿇으라고 시켰어?”

신후의 얼굴이 붉게 상기됐다.

빠르게 오르내리는 가슴 근육이 지금 그가 얼마나 분노를 내리누르는지 보여줬다.

급한 신후의 성미에 본가에 가서 무슨 짓을 저지를까 걱정됐다.

“제가, 제가 한 거예요. 어머님이 시키신 거 아니에요.”

“뭐? 당신이 스스로 무릎을 꿇었다고? 그럼 따귀는. 당신이 그 여자 손에 얼굴이라도 갖다 댔다고 할 건가?”

신후는 초연의 말을 믿지 않았다.

자존심 강한 초연이 누구한테 무릎을 꿇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문명 지은이 시켰으리라. 그렇게 믿었고, 그게 자연스러웠다.

제 말을 믿지 않는 눈치에 초연이 그의 팔을 잡고 애원했다.

“당연히 어머님 눈에는 제가 부족해 보일 수 있죠. 그냥……. 잘 하겠다고 어필하다가 제가 꿇은 거예요. 어머니가 시키신 거 아니에요.”

“그러면 따귀는. 그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따귀는…… 따귀는…….”

차마 적절한 변명거리를 찾지 못하고 초연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초연은 차마 지은이 솔의 목숨 줄을 쥐고 협박을 했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만약 그 말까지 했다가는 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까 두려웠다.

게다가 생각해보면 아까는 자신 역시 이성적이지 못하고 덤빈 부분도 있었다.

가뜩이나 화가 난 상태의 지은에게 기름을 부은 꼴이었다. 이 순간에도 초연은 계속 지은을 이해해보려 노력했다.

“어머니는 무슨. 당신이 이 여자한테 머리 숙일 일 없어. 겨우 법적으로 묶인 가족이지 당신이 이렇게 당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 아니라고!”

자신의 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은을 묵인했다.

만약 자신에게 지은의 피가 필요하지 않았다면 지은을 새어머니로 받아들였을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자리를 꿰찬 여자를 밀어내지 못하고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그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냈다.

자기 혐오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랬던 지은에게 초연이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이 마치 제가 다시 지은에게 모욕당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뱃속을 누가 갈고리로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기분이었다.

“알았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앞으로는 조심할게요. 어머, 아니 그분께 뭐라 하지는 말아요.”

서둘러 상황을 마무리하려는 초연의 눈빛에 신후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따귀를 때리고, 무릎까지 꿇게 한 사람 뭐가 예쁘다고 이리도 감싼단 말인가.

기껏해야 새엄마였다.

어차피 그의 부친도 죽은 마당에 초연에게 위세를 부릴 위치도 아니었다.

차라리 지은에게 당한 모욕을 그에게 말하고, 앞으로 안 볼 방법을 찾는 게 초연다웠다.

게다가 조금 전 언제부터 미행했냐고 묻는 이유는…….

신후의 눈빛이 금세 서늘해졌다.

“혹시 오늘 말고 이전에도 둘이 만났어?”

놀라 흔들리는 초연의 표정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조금 전까지 그의 혈관 속에서 들끓던 피가 차게 식었다.

“내 프러포즈를 받고 난 후 태도가 돌변했던 게 혹시 이 여자 때문이었어?”

“신후 씨 그런 게 아니라…….”

신후의 머릿속에 지난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체육 대회와 그녀와의 관계를 회사에 공식적으로 밝힌 후, 분명 초연도 그를 믿었다.

체육대회 날 밤. 잠자리에서 초연의 몸은 결코 자신을 거부하는 몸짓이 아니었다.

뜨겁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단단히 안겨 왔다.

부산에 출장 갔을 때, 초연과의 통화는 설렘과 떨림이 공존했다. 분명 혼자만의 감정은 아니었다.

솔의 첫 검사 날 같이 병원 대기실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좋았다.

하지만 원단 문제가 터지고, 다시 돌아왔을 때 초연은 청도로 내려가겠다고 했다.

솔의 치료도 마무리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해되지 않던 상황이 지은이라는 힌트를 넣자 모두 설명됐다.

당장이라도 지은의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에 그의 주먹이 쥐었다 펴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초연이 이토록 지은에게 이끌려 다닌 건.

“그 여자가 솔이 목줄을 쥐고 당신을 흔들었어. 그렇지?”

검사가 지연되고, 그에게 연락도 오지 않았다.

이 짓을 할 사람은 〈K 병원〉과 깊숙이 관련된 사람밖에 없다.

솔이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초연이었다.

그런 초연에게 솔의 목숨을 가지고 흥정을 했으니 당연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동안 그를 미치게 했던 초연의 배신이 실은 지은이 뒤에서 조종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당장이라도 달려가 지은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감히. 씨발.”

펄펄 들끓는 분노에 신후가 자리를 박차고 방을 나섰다.

“신후 씨! 신후 씨!”

그녀가 애타게 불렀지만 이미 신후는 집을 나간 후였다.

***

저녁 식사 후, 지은은 직접 끓인 여주 차를 가지고 거실에서 신문을 보는 성식에게로 다가갔다.

당뇨가 있는 성식에게 온갖 몸에 좋은 것을 갖다 바치는 건 그녀의 몫이었다.

물론 이깟 차 한잔보다 약 한 알이 효과적이라는 건 누구보다 그녀가 잘 알았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거리를 만들어야 늙은 성식의 환심도 사고 지후에 대해 어필할 시간도 그나마 가질 수 있었다.

“아버님. 이번에 지후가 장학금을 받았다네요. 남의 나라 가서 성적 우수 장학금을 받다니 참 기특해요, 그쵸? 그리고 지후도 이제 슬슬 졸업반인데 미국 지사 쪽에서 인턴십이라도 하면서 회사 분위기를 익히게 하는 게 어떨까요?”

여주 차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지은이 슬쩍 그의 곁에 앉았다.

손이 귀한 집이니 아들 손주를 데리고 오면 성식이 반겨줄 거라던 기대와 달리 성식은 처음부터 그녀를 못마땅해했다.

그나마 도재가 있었을 때는 성식이 죽고 도재가 회사를 물려받으면 〈MJ 인터내셔널〉을 지후가 차지하게 될 거라는 기대라도 있었다.

하지만 도재는 죽고, 그녀와 지후는 낙동강 오리 알이 되었다.

만약 자신이 특정 혈액 보유자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이 집에서 쫓겨났으리란 건 뻔했다.

저놈의 영감탱이가 죽지 않는 한 가진 재산의 대부분은 신후에게 상속될 것이다.

지은은 어떻게든 성식이 죽기 전에 지후가 성식의 신임을 얻게 해 지후의 몫을 챙겨 받아내고 싶었다.

“애들 혼인신고는 했더라도 결혼식을 치러야겠지? 자네가 한 번 알아보게.”

지후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난데없는 신후네 이야기라니.

지은은 못마땅한 감정을 숨기고 억지로 미소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