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깊숙한 각인-59화 (59/84)

〈59〉

놀란 초연이 저릿한 뺨을 감싸며 지은을 바라보았다.

난생처음 맞는 따귀였다.

아픔과 당황스러움, 치욕스러움이 동시에 찾아들었다.

만약 예전의 초연이었다면 한마디 퍼붓거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여자이기에 앞서 솔이의 엄마로 지은을 만난 것이었다.

만약 여기에서 제 기분대로 했다가는 솔이를 구할 방법이 없었다.

지난번 일 이후 규림은 퇴사했다. 애인과 결혼하기 위해서였다.

집안의 반대로 결혼이 순조롭지 않았던 규림은 아예 애인과 함께 미국으로 간다고 했다.

한국에 남아 부모님의 반대로 애인을 힘들게 하느니 차라리 둘이 미국에서 새 출발을 하겠다고 초연에게 말했다.

그러니 지은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솔이에게 다시 사고가 나도 지난번 같은 천운도 기대하기 어렵다.

“어머니. 오해세요. 제가 천천히 설명해 드릴 테니 앉아서 들어주세요.”

초연은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추스르고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 모습이 지은의 화를 북돋웠다.

네가 신후와 결혼했다고 이딴 따귀쯤에는 꿈쩍도 안 하는구나.

독한 년.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머니? 누가 그쪽 어머니야? 사람 속이고 혼인신고하고, 친자 확인까지 하고 나니 이제 본인이 한 가족이 된 것 같아?”

번번이었다. 번번이.

애를 지우라는 말에 돈까지 받아놓고 애를 낳아 들이밀지를 않나, 내려가라고 좋게 말해도 앞에서는 네네 잘도 대답해놓고 또 이렇게 사람 뒤통수를 쳤다.

순진한 얼굴에 제 말에 겁을 먹은 것 같은 표정에 자신이 다 속았다.

“정말 다시는 서울 올라오지 않으려고 했는데 신후 씨가 친자 확인을 하는 바람에 어쩔 수…….”

“닥쳐!”

지은이 초연의 말허리를 끊었다.

지은의 귀에는 초연의 모든 말이 거짓말처럼 들렸다.

초연의 몸속에 구미호 백 마리는 들어있는 것 같아 징글징글했다.

꽉 깨문 지은의 아랫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어떻게 올라온 자리인데…….

저깟 계집애 때문에 모든 게 헝클어지고 있다.

도재와 지은의 관계는 신후가 생각하는 것처럼 도재가 사랑에 미쳐 지은과 맺어진 게 아니었다.

스물일곱 살 꽃 같은 나이에 〈MJ 인터내셔널〉의 사모님이라는 타이틀 하나에 희망을 걸고 술 취한 도재에게 자신의 몸을 던진 건 그녀의 결정이었다.

신후의 엄마는 쉬웠다.

자신의 남편과 깊은 사이라는 언질만 살짝 줬는데도 약해빠진 몸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거기에 살짝 치료를 늦추니 하늘나라 보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물론 도재의 마음을 돌리는 건 쉽지 않았다.

평생 휠체어에 앉아 아프기만 하던 부인이 뭐가 좋았던지 죽은 아내를 잊지 못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아들도 떡하니 낳았고, 친정도 제 덕에 이만큼 일으켰다.

이제 신후만 없애면 제가 낳은 아들이 〈MJ 인터내셔널〉의 주인이 되는 걸 지켜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신후에 신후의 아들까지. 징글징글한 핏줄이 줄줄이었다.

이러다가 제 꿈이 이뤄지지 못할까 지은은 미칠 것 같았다.

6년 전 도재가 병원에 가라고 닦달했을 때 조금 늦게 가서 그냥 콱 죽어버리게 놔뒀어야 했는데!

괜히 가서 신후에게 수혈을 하는 바람에 이 사달이 난 것 같아 후회되어서 죽을 지경이었다.

안 그래도 신후가 7년 전의 기억을 찾을까 매일 매일이 살얼음판인데 그 자식까지.

신후도, 초연도, 솔이도.

모두 제 앞길을 막기 위해 온 벌레들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서 이런 버러지 같은 것들이…….”

지은이 울분을 터트렸다.

마치 뺨을 맞은 사람이 자신이라도 되는 양 흐느끼기까지 하는 지은의 모습에 초연은 지은을 이해해보려 노력했다.

그래. 대단한 집안에 내가 얼마나 부족할까.

허락도 없이 갑자기 혼인신고 기사까지 났으니 얼마나 본인 말을 무시한다고 생각할까.

감정을 추스르게 도와드리고 천천히 설득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솔이까지 무시하는 듯한 발언에 초연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어머님. 어머님 눈에 제가 안 차시는 거 잘 압니다. 저라도 저 같은 며느리는 눈에 안 찰 것 같아요. 하지만 솔이는 똑똑하고 착한 아이입니다. 게다가 반은 신후 씨 피잖아요.”

차분하게 자기 생각을 말하는 초연의 눈빛은 여태껏 자신에게 휘둘리던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제 것을 지키기 위한 초연의 독기 어린 눈빛에 지은은 저것 보라고 사람들을 붙잡고 보여주고 싶었다.

저렇게 독한 눈을 하고선 자신을 속였다고. 세상 사람들에게 하소연 하고 싶었다.

“그래. 이게 네년 본모습이지. 눈을 시뻘겋게 뜨고. 내가 진작 알아봐야 했는데.”

지은이 부들부들 떨었다.

여전히 핏대를 세운 지은의 모습에 초연은 아차 싶었다.

지금 자신이 그녀를 자극하는 건 전혀 솔이에게 도움이 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 게 아니에요. 너무 고깝게만 보지 마시고 시간을 주시면 제가 노력하겠습니다.”

초연은 다시 지은의 손을 붙잡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런 초연의 손을 지은이 더러운 것이라도 되는 듯 확 뿌리쳤다.

“노력! 그 노력 애 떼는 데 쓰라고 했지? 돈은 돈 대로 받고, 애는 애대로 데리고 나타나고. 사람을 이렇게 놀려먹어?”

원래 여자한테 관심도 없던 놈이 7년 전 초연을 만나 살림까지 차리고 임신까지 시켰다.

지금도 기억도 잃은 주제에 기어이 초연을 서울까지 데리고 와 친자 확인까지 마쳤다.

도대체 이초연 저게 뭐길래 신후를 저토록 흔드나.

신후만 죽어 없어지면 딱 좋겠는데 신후의 씨까지 떡하니 세상에 남기게 한 초연이 미워 죽을 지경이었다.

지후에게 〈MJ 인터내셔널〉을 주지 못하면 이제껏 한평생을 참고 인내한 보람이 없다.

“민 이사 믿고 덥석 결혼했나 본데 어디 봐. 네 뜻대로 될지. 신후가 왜 새엄마인 나를 안 내치고 내버려 둔 건 줄 알아? 그만큼 내가 신후에게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이지. 신후 목줄을 쥐고 있는 사람! 근데 내가 그깟 네 아들 하나 어쩌지 못할 것처럼 보여?”

붉어진 눈자위로 부들부들 떨며 말하는 지은을 보며 초연은 공포를 느꼈다.

정말 지은이 당장이라도 솔이를 어떻게 할 것 같은 두려움에 초연은 그만 지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머님. 노여움 푸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녀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애원했다.

“됐어. 난 경고 이미 할 만큼 했어. 그깟 사람 하나 죽는 게 무슨 대수라고.”

초연을 떨어뜨린 채 지은이 다시 자신의 차로 향하며 중얼거렸다.

떨어트리지 못하면 죽이면 그뿐이었다.

다행히 신후나 솔이나 이 집 핏줄은 죽기 아주 쉬우니까.

지은의 얼굴에 다시 안정이 찾아왔다.

찰칵.

나무 뒤에 있던 남자가 마지막으로 공원을 빠져나가는 지은의 차 뒷번호판을 찍고 자리를 떠났다.

***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세 식구가 한 식탁에 모였다.

“솔이 기분 좋아 보이네.”

식탁 밑으로 솔이의 짧은 다리가 앞뒤로 흔들리는 걸 본 신후가 물었다.

신후가 지켜본바 그건 솔의 기분이 좋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오늘 혁준이 마지막 날이었거든요.”

솔이 신 여사가 만들어놓은 함박 스테이크를 크게 한 입 베어 물며 새 부리 같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얼마나 맛있는지 입 옆에 소스까지 묻힌 채였다.

“좋은 거 너무 티 내면 안 되는데…….”

“티 안 냈어요!”

솔이 발끈했다.

어린이집 선생님들도, 책에서도 항상 친구와는 사이좋게 지내라고 했다.

혹시 신후에게 제 속마음을 들켰을까, 솔은 뜨끔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친구가 멀리 가는데 기분이 좋은 건 나쁜 거니까.

신후가 말없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솔의 입술 옆을 엄지로 닦았다.

그리고는 손에 묻은 소스를 솔이에게 보여주었다.

“이렇게 티가 났는데? 우리는 전략적 제휴 관계라 괜찮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게 해서는 안 돼.”

소스 얘기일까. 혁준에 대한 마음 얘기일까.

지그시 저를 쳐다보는 신후의 눈빛에 솔은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얼어 붙어있는 솔을 보고 신후가 씩, 악당같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 모습에 솔이도 따라 해사하게 웃었다. 통통한 뺨에 보조개가 쏙 들어갔다.

둘은 시선을 맞춘 채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보며 웃었다.

박 팀장의 미국 지사 발령 후 박 팀장은 세 식구 모두 함께 가겠다고 주재원 신청을 했다.

신후도 당연히 박 팀장의 신청을 승인했다.

오늘이 혁준의 마지막 등원 날이었던 모양이었다.

혹시 자신이 아침에 데려다준 일로 의기소침해 하지는 않을까 싶었는데 다행이었다.

“그리고 서현이가 아빠 잘생겼대요.”

서현이라는 이름에 신후는 재빨리 기억을 더듬었다.

솔이와 친해지기 위해서 알아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솔이의 버릇, 취향, 좋아하는 책, 음식도 알아야 했지만, 솔의 친구들도 알아야 했다.

남들은 6년간 차근차근 알아갈 자식에 대한 정보를 하루아침에 모두 배우려니 버거웠지만 즐거웠다.

“걔가 아빠 얼굴을 알아? 아, 오늘 데려다주는 걸 서현이가 봤나?”

“아니요. 선생님이 아빠 사진 찾아서 애들한테 보여주셨어요. 근데 아빠 내일도 나 데려다줘요?”

신나서 말을 하던 솔이 뒷말을 조금 흐렸다.

선생님들에게 회사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라 무척이나 바쁜 분이라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친구들 모두 아빠가 아빠라는 걸 부러워했다.

서현이 역시 너희 아빠가 제일 멋있다고 엄지를 추켜세워주었다.

이상하게 저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했다.

솔은 이 기분을 내일도 느끼고 싶었다.

“솔이가 원하면. 원해?”

“네!”

씩씩하게 대답하는 솔의 작은 머리를 쓰는 신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러다가 그의 시선이 초연에게 닿았다.

식사를 시작한 후 초연은 한마디도 말이 없었다.

그가 집에 올 때부터 그랬다.

게다가 얼굴도 이상하게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얼굴이 왜 그래?”

초연이 손으로 뺨을 감싸며 대답했다.

“아, 오늘 옻을 좀 만졌더니 옻이 좀 올랐나 봐요.”

“어? 엄마 옻 안 오르잖아?”

솔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으응, 면역력이 조금 떨어졌는지 올랐네.”

초연이 그의 눈을 피하며 얼버무렸다.

그 모습에 신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면역력이 떨어진 게 모두 제 탓 같았다.

지금의 초연은 두 달 전 처음 만났을 때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새 살이 빠져 얼굴도 핼쑥해졌고, 얼굴도 어두워졌다.

이 모든 게 자신 때문인 것 같아 초연을 볼 때마다 무언가 그의 속을 할퀴고 지나갔다.

자신이 욕심부려 초연을 옆에 둔 게 그녀에게 이토록 힘든 일인가 싶었다.

제 옆에서 말라가는 초연을 볼 때마다 신후는 수천 개의 바늘로 오장 육부를 쑤셔대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초연을 놓아줄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내일 병원 가.”

“병…… 원이요? 아뇨. 괜찮아요.”

“안색이 말이 아냐. 서울 올라와서 계속 무리했잖아. 혹시 모르니 검사도 받고. 요즘은 병원에서 맞는 영양제도 있다며.”

“아니에요. 이사랑 이것저것 일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한의원 예약해둘 테니 약이나 한 재 먹던가.”

“괜찮아요.”

“사람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먹어.”

“알았어요.”

초연이 내켜 하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지만 대답은 대답이었다. 신후는 일단 그걸로 됐다 싶어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람이었다.

유럽에서 오는 메일이라 시차가 맞지 않아 지금 온 연락이었다.

젓가락을 내려놓고 신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다 먹었어요?”

“메일이 와서.”

“식사 먼저하고 처리하면 안 되는 일이에요?”

“중요한 거라.”

사실 핸드폰으로 확인할 수도 있었지만, 모니터로 직접 보고 싶었다.

신후는 자신의 서재로 돌아가 컴퓨터를 켰다.

메일을 확인한 후, 기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또 알람이 왔다.

이번엔 강 비서가 보낸 메일이었다.

메일을 클릭하자 화면 가득 사진이 떴다.

그의 눈에 익숙한 공원에서 초연이 지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사정하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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