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깊숙한 각인-58화 (58/84)

〈58〉

“말해봐.”

“말씀하신 대로 미주 쪽 바이어들 통해 원단 구한다는 메일을 쫙 돌렸습니다. 당연히 몇 배 가격 챙겨준다니 연락 온 쪽이 있지 뭡니까.”

“뜸 들이지 말고 결론. 누구 짓이야?”

“참 내. 정 상무 짓이지 뭡니까? 그분 그렇게는 안 봤는데 참……. 역시 피가 물보다 진한가 봅니다. 자기 친조카 자리에 앉히려고 이사님 입지 흔들려고 그런 거 아닙니까.”

강 비서는 그보다 더 분개하며 분통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가 궁금한 건 이게 아니었다.

“그 뒤는?”

“네?”

“넌 정 상무가 그런 짓을 저지를 만큼 똑똑하고 배포가 크다고 생각해?”

“그러면요?”

그 정도 머리를 쓸 사람도, 배포가 있는 사람도, 그를 밀어내서 이익을 얻는 사람도 한사람이었다.

“새어머니 쪽 파 봐. 그쪽이나 지후 계좌, 아니면 〈K 병원〉 쪽 자금관리도. 확실한 증거가 있으니 검찰 쪽에서도 협조해 줄 거야.”

정 상무는 지은의 동생이었다.

지은은 결혼하자마자 도재에게 자신의 동생을 위해 회사에 한자리 마련해 달라고 요청했다.

말이야 부족한 동생에게 사회생활을 시켜주고 싶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런 자리야 친정인 〈K 병원〉에서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을 터였다.

지은이 정 상무를 〈MJ 인터내셔널〉에 입사시키려 애쓴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의 아들인 지후가 나중에 회사에 들어올 때 든든한 라인 하나쯤 만들어두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지은에게 흠뻑 빠져있던 도재는 지은의 동생을 회사에 냉큼 앉혔다.

병원을 그만큼 도와줬으면 회사 자리는 내주지 않아도 되지 않냐는 성식의 의견은 무시해 부자간에 냉전도 꽤 오래 지속되었다.

도재가 죽었을 때, 신후가 이사로 취임했을 때, 성식은 몇 차례나 은근히 핑곗거리를 만들어 그가 정 상무를 내치길 원했다.

하지만 신후는 정 상무를 내버려 두었다. 괜히 지은의 심기를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만약 정 상무를 내친다면 또 다른 라인을 만들려고 애를 썼을 것이다.

그러니 그냥 멍청한 꼭두각시인 정 상무를 놔두는 게 낫다 싶었다.

“설마요.”

“그리고 사람도 붙여.”

“네?”

언젠가 지은이 지후를 제 자리에 앉히기 위해 한 번쯤 발악할 것으로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적어도 지후가 학업을 마친 후 덤빌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자신을 밀어낸 뒤 지후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공백은 어쩌려고 저러는 건지.

자신과 규림이 결혼을 하면 피의 권력을 뺏길까 싫으면서도 지은이 쉽게 반대하지 못했던 건 행여 지금 당장 그의 눈 밖에 날까 두려워서였다.

지후가 제 자리를 위협할 정도로 크길 기다리는 걸 알고 있었다.

한데 왜 이렇게 갑자기.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수였다.

“무슨 짓을 벌이는지 좀 알아야겠네.”

강 비서가 나가고 신후는 다시 일에 집중했다.

자신의 혼인으로 한동안 회사 내외로 이목을 끌 것이다.

그러니 더더욱 실수 없이 실적을 만들어야 했다.

그가 예전만 못하다면 분명 그 모든 욕은 초연에게 향할 것이 뻔했다.

시계가 어느덧 열두 시를 가리켰다.

신후는 사무실에서 식사할 수 있게 간단한 샌드위치와 커피를 가져다 달라고 비서에게 지시했다.

일도 일이지만 점심시간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그 시간을 줄여 일찍 퇴근해 집에 가고 싶었다.

집.

그동안 신후에게 집은 그저 잠자는 공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신후는 본가에서 독립했다.

이상하게 사고 후 집에 돌아온 이후에는 자꾸 가위가 눌리고 악몽을 꿨다.

지은을 볼 때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가 치솟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병원에서는 사고 후 심리적 요인일 수도 있다고 했고, 신후는 함께 있으면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성식에게는 집에서는 자꾸 악몽을 꾼다고 둘러댔고, 성식은 마지못해 허락했다.

다행히 이사 후 악몽도, 가위에 눌리는 횟수도 줄어들었지만, 사람의 온기는 잊고 살았다.

한동안은 굳이 집도 필요 없겠다 싶어 호텔에서 지냈다.

성식은 어서 빨리 규림과 결혼해 가정을 꾸리라며 다그쳤지만 신후는 효율적인 호텔 생활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가 초연이 서울에 올라오기로 결정한 후 집을 얻었다.

비록 복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집이었지만, 지척에 초연과 솔이 있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이상하게 편했다.

그런데 같이 잠을 자고, 아침에 함께 깨어보니 더 좋았다.

타인의 소음과 부산스러움이 이토록 마음 따뜻하게 할 수 있는 것인지 예전엔 몰랐다.

제 식성을 아는 듯 아침부터 자연스럽게 삼겹살을 굽는 초연도, 비계를 바싹 구워달라며 침을 삼키는 솔이도.

초연이 저를 사랑해서 제 옆에 머무르는 건 아니더라도, 이런 관계도 괜찮겠다 싶었다.

이 마음 따뜻한 기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젠 그들이 그가 더욱 열심히 일해야 할 이유였다.

왼손에 샌드위치를 들고 먹으면서도 결재 서류 보는 걸 멈추지 않고 있는데 전화가 한 통 왔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가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 네 이놈!

일부러 전화를 귀에 바짝 대지 않은 터라 수화기 너머 들리는 호통에도 신후의 표정은 미동도 없었다.

“이미 강 비서한테 연락을 받으셨을 텐데 왜 이제야 뒷북이십니까?”

- 네 이놈! 내가 네 놈 이사하는 것도 기다렸다만, 그래도 언론 발표는 나한테 먼저 알려주고 발표하는 게 순서 아니더냐! 어떻게 내가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이 네 놈 결혼 발표를 기사로 봐야 해!

“시간도 없는데 용건만 말씀하시죠.”

이미 성식이 솔의 어린이집에 꽤 많은 양의 책을 사재로 기부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말로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솔이에 대한 보답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뻔했다.

자신이 솔이가 자신의 자식인지 모르는 상태에서도 끌렸듯이, 성식 역시 그랬을 것이다.

- 솔이는. 솔이한테 이 증조 할애비 인사는 안 시킬 테야?

이윽고 나온 성식의 본심에 신후의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가 걸렸다.

“언제는 당장 내려보내라고 집까지 쫓아와서 성을 내시더니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 그때와 지금 상황이 같더냐? 흠흠.

“그건 할아버지 입장이시고 제 엄마를 무지막지하게 대한 증조할아버지를 솔이가 보고 싶어 하겠습니까?”

- 내가 사과의 의미로 밥 한번 사마.

어느덧 성식의 목소리는 호통에서 슬슬 애원으로 변하고 있었다.

가끔 어린이집 근처에 출몰한다는 소문이 영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밥은 제가 안 굶기고 먹일 수 있습니다.”

- 그러면. 네가 원하는 게 뭐인 게냐.

“청담동에 있는 병원 건물. 그 사람한테 명의 넘겨 주시죠.”

- 뭐? 청담동 병원 건물을 달라고? 네 놈이 아주 결혼으로 한몫 챙기려고 하는구나.

성식이 질색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돈도 돈이지만 그 건물은 성식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MJ 인터내셔널〉의 초창기 회사가 있던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몇천 배로 회사를 키워 50층짜리 사옥을 갖고 있다.

그래도 성식은 자신에게 처음 성공을 맛보게 해준 청담동 건물을 애지중지했다.

“할아버지께서 그 정도는 해야 그 사람도 마음속 진 응어리가 풀리지 않겠습니까.”

그런 성식의 청담동 건물 사랑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지은은 물론 성식이 아끼던 그의 모친에게까지 넘기지 않던 건물이었다.

그토록 아끼는 건물을 손주 며느리에게 넘겼다는 소문이 이 바닥에 퍼지면 사람들 역시 성식의 손주 며느리 사랑을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행여 집안에서 반대한다느니 하는 초연을 둘러싼 아주 작은 나쁜 소문 하나라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알았다. 서류 준비해서 보내주마.”

잠시 고민하던 성식 역시 흔쾌히 대답했다.

성식 역시 말은 거칠게 했지만 신후가 청담동 건물을 내놓으라는 속내를 영 모르지는 않았다.

실은 그 역시 초연을 모질게 대한 게 늘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솔이처럼 제 마음에 쏙 드는 귀한 증손주를 낳아준 초연인데 그깟 건물 하나 못 주랴 싶었다.

솔이 아니었다면 죽었을 목숨이고, 초연이 아니었다면 결혼 안 하겠다고 버텼을 신후였다.

만일 그랬다면 자신이 죽기 전에 손주 손 잡고 놀러 다닐 상상 같은 건 하지도 못했을 터였다.

- 네. 그러면 저희도 시간 날 때 한 번 찾아뵙겠습니다.

“시간 날 때가 아니라 시간을 내서 찾아와야지. 아니다. 너 바쁘면 내가 찾아가고. 이사까지 했다니 한 번 새집 구경하러 가야겠구나. 언제가 좋으냐?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오늘 갈까?”

성식의 제안에 신후는 전화를 끊는 것으로 화답했다.

“허허, 고얀 놈.”

성식은 신후를 욕했지만 어쩐지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숨길 수는 없었다.

그런 성식의 모습을 보며 지은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지은 역시 신후의 친모가 죽은 후 이 집에 들어오면서 갖은 수모를 당했다.

본처가 죽은 지 1년도 안 되어 안방 자리를 꿰찬 독한 년이라는 소문이 이 바닥에 난 걸 그녀 역시 모르지 않는다.

모르는 척 얼굴을 들고 다녔지만, 그녀 마음속에도 응어리가 생겼다.

동생을 〈MJ 인터내셔널〉에 앉히고, 〈K 병원〉 지원을 약속받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도재를 들볶아 수많은 패물을 받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어차피 사람들에게 도재는 여자에 미친 놈이고, 신후는 〈MJ 인터내셔널〉의 불쌍한 후계자일 뿐이었다.

갓 몸을 푼 그녀를 두고 산후 조리원에서부터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신후가 크면 〈MJ 인터내셔널〉은 신후에게 넘어가고 그녀와 그녀의 아들은 찬밥이 될 거라고.

해서 성식의 인정을 받고 싶었다.

성식이 자신을 아낀다면 〈MJ 인터내셔널〉이 신후 손에 넘어갈 거라느니, 자신과 지후가 찬밥이 될 거라느니 하는 말은 사람들이 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도 성식은 빌딩의 몇 배나 되는 돈을 병원에 투자하면서도 끝끝내 청담동 빌딩은 그녀에게 주지 않았다.

근데 겨우 신후의 몇 마디에 그 빌딩을 초연에게 주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자신은 항상 겉돌던 〈MJ 인터내셔널〉 가문에 초연과 솔은 단번에 합류한 것 같아 미칠 지경이었다.

간신히 화를 누르며 초연을 만나러 갔다. 본가 근처에 있는 한적한 공원이었다.

하지만 차 안에서 저만치 떨어져 있는 초연을 보는 것만으로 명치 끝부터 분노가 다시 차올랐다.

가뜩이나 초연의 전화를 받고 터진 뉴스에 뒤통수를 맞은 느낌인데 청담동 건물까지.

살기를 주체하기 힘들었다.

차를 대자마자 벤치에 앉아있던 초연에게 뛰듯 걸어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어머…….”

몸을 일으키며 인사하는 초연의 말허리도 잘라버렸다.

“감히 이사를 한다고 속여놓고 사람 방심한 틈에 혼인신고를 해? 사람 놀려먹으니 좋아요?”

그리고는,

짝.

지은의 손바닥이 초연의 뺨을 거칠게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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