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신후와 솔을 보내고 초연이 외출 준비에 한창일 때였다.
딩동, 벨이 울렸다.
“안녕하십니까, 사모님.”
신후의 소개로 그녀의 집안일을 도와주던 신 여사였다.
“신 여사님! 여긴 어쩐 일로……. 신후 씨가 부탁드렸나요?”
“네.”
반갑게 웃는 신 여사의 뒤로 낯선 얼굴의 도우미 두 명도 더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사모님.”
“안녕하십니까, 사모님.”
일제히 자신을 보고 90˚로 허리를 굽혀 공손히 인사를 하는 모습에 초연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냥 부르시던 대로 편하게 불러 주세요.”
그동안 신 여사는 그녀를 솔이 엄마라고 불렀다.
원래 부잣집에서 일하시던 분이라 사모님이라는 말이 입에 밴 분이었지만 초연은 사모님 소리를 듣는 것이 불편했다.
해서 초연은 자신은 신후의 도움을 받아 잠깐 서울에 올라온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편히 솔이 엄마라고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아닙니다, 이제 이사님 사모님이신데 어떻게 저희가 함부로 부르겠습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곧 적응하실 겁니다.”
하지만 이제 신 여사는 한 치의 양보 없이 칼같이 사모님이라고 불렀다.
신후와의 결혼으로 달라진 자신의 지위를 실감했다.
신 여사가 뒤따라 온 두 명에게 고갯짓하자 두 사람이 마치 정해진 매뉴얼이 있는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두 사람이 제 할 일을 시작하는 걸 보고 난 후, 신 여사가 쇼핑백에서 핸드폰 박스를 하나 꺼냈다.
“이사님께서 부탁하신 겁니다. 개통은 이따가 될 것 같은데 번호는 따로 직접 연락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초연은 새 핸드폰 박스를 만지작거렸다.
자신의 핸드폰을 바꾼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웬 새 핸드폰인가 싶었다.
“근데 저 두 분도 앞으로 계속 오시는 분들인가요? 물론 집이 커서 신 여사님 혼자서는 힘드실 걸 알지만 이제는 저도 집에 있을 거고……. 일하는 사람이 네 명까지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요.”
“이사하고 집 정리를 다 하지 못했다고 이사님이 이번 달만 특별히 부탁하신 겁니다. 그 이후는 사모님 생각하시는 대로 하시면 되고요. 그리고 이사님께서 새집 가구 구매와 인테리어를 사모님 혼자 하시기 힘드실 거라고 같이 쇼핑을 부탁하셨는데 지금 나가시겠습니까?”
“아니요. 오늘은 제가 선약이 있어서……. 다음에 가도 될까요?”
“네. 그리고 사모님. 앞으로는 그냥 의견 안 물어보시고 지시 내리시면 됩니다.”
신 여사는 단순한 도우미가 아니었다.
30여 년 재벌 집들을 돌며 집사 일을 했다.
안주인이 없는 집에서는 안주인의 역할을 했고, 새 사람이 들어오면 집안 가풍을 익힐 수 있게 가르쳤다.
신후가 그녀를 고용한 목적 또한 뚜렷했다.
초연이 MJ의 안주인이 될 수 있도록 옆에서 차근차근 가르쳐달라는 것.
그동안 단순히 집안일과 아이 돌보기를 하며 지루했던 일상에 이제야 제 할 일을 찾은 것 같아 신 여사의 두 눈이 빛났다.
***
집안일은 신 여사에게 맡기고 초연은 안방으로 돌아와 외출 준비를 했다.
신 여사가 준 핸드폰 박스는 화장대 위에 올려두었다.
까만색 정장 바지에 베이지색 블라우스를 입고 머리는 단정하게 묶었다.
늘 하던 화장인데도 오늘따라 아이라인을 그리는 손이 자꾸 떨렸다.
손을 내렸다 올렸다 심호흡을 하고 다시 아이라인 펜을 잡았다.
아무래도 좀 전의 통화 때문인 듯싶었다.
신후가 출근을 하자마자 초연은 지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사모님. 좀 뵙고 싶습니다.’
- 청도 내려갔어요? 이삿날이 어제랬나? 오늘이랬나? 그거 알려주려고 전화했어요? 알았어요. 신후 옆에 얼씬 안 하는 거 확인되면 그쪽 아들 치료 예약 잡을게요. 중간에 딴짓하면 알죠? 난 남한테 한 약속도 잘 지키지만 내가 한 말은 더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거.
아무래도 지은은 아직 그녀의 혼인신고 소식도, 청도로 내려가지 않은 것도 모르는 듯싶었다.
다행이다 싶었다.
다른 곳에서 자신과 신후의 혼인신고 소식을 듣는 것보다 직접 찾아뵙고 말씀드리는 것이 낫다 싶었다.
아무리 그녀를 못마땅해 여긴다고 해도 이미 엎질러진 일이었다.
신후 성격에 그녀를 내치는 한이 있더라고 솔이까지 내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솔이는 이제 죽으나 사나 신후의 아들이었다.
자신은 못마땅할지언정 설마 손주의 치료까지 거부할까 싶었다.
자신은 어떻게 해도 좋지만, 솔은 민씨네 핏줄인데.
잘 말하면 받아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몇 번 이유를 묻는 지은에게 초연은 무조건 만나서 말씀드리겠다고 했고, 만나길 귀찮아하던 지은은 결국 초연의 채근에 약속 장소를 알려주었다.
“왜 이렇게 떨리지?”
초연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가슴을 누르며 립스틱을 들었다.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재윤이었다.
초연은 아차 싶었다.
어제 청도로 이사한다고 재윤에게 이사 소식을 알렸었다.
그래놓고 정신이 없어 연락을 못 했다.
내려온다는 사람이 함흥차사니 궁금할 만도 했다.
“재윤 씨. 미안. 내가 먼저 연락을 줬어야 했는데 못 했어. 놀랐지?”
- 놀라긴 했지. 근데 잘됐다고 생각해. 안 그래도 지난번에 얼굴 봤을 때 어두워서 걱정했는데. 민 이사가 이렇게 속 시원하게 밝힐 줄은 몰랐어.
초연은 재윤과 자신의 대화에서 어딘지 어긋남을 느꼈다.
“뭐가?”
- 기사 안 봤어?
“무슨 기사?”
- 민 이사가 초연 씨와 혼인신고 마쳤다고 직접 발표했어. 솔이도 자기 친아들이라고 밝히고. 난 또 초연 씨도 아는 일인 줄 알고 축하해주려고 전화한 건데……. 혹시 민 이사 독단으로 벌인 짓이야?
수화기 너머 재윤이 놀랐지만, 그보다 더 놀란 초연은 차마 재윤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재, 재윤 씨. 미안. 다음에 통화해.”
전화를 끊은 초연은 기사를 검색했다.
재윤의 말마따나 포털에 들어가자마자 그와 자신의 결혼 발표 소식부터 악재니 뭐니 하는 경제지의 분석 기사까지 화면을 가득 채웠다.
눈으로 기사 제목만 훑는 것만으로 초연의 손이 덜덜 떨렸다.
아직 지은을 만나 설득하지도 못했는데 이런 기사가 퍼지면…….
“어떡해…….”
온몸에 한기가 들린 듯 등골이 오싹했다.
눈앞이 하얘지고 휘청였다.
초연은 저도 모르게 근처에 있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동시에 초연의 핸드폰으로 미친 듯이 전화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띠링띠링 문자가 들어오는 소리도 끊임없이 들렸다.
연락이 끊긴 대학 동기부터 스쳐 지나갔던 염색 수강생들까지.
갑자기 벼락스타라도 된 듯 밀려오는 연락에 덜컥 겁이 났다.
초연은 놀라 저도 모르게 핸드폰의 전원을 껐다.
그때 어디에선가 또 벨소리가 울렸다.
신 여사가 주었던 핸드폰 상자 안에서 나는 소리였다.
초연은 허둥지둥 상자를 열었다. 화면에 신후의 이름이 떴다.
“신후 씨!”
- 귀찮은 전화 많이 갈 테니까 기존 핸드폰은 끄고 이거 써.
세상을 시끄럽게 한 사람답지 않게 그의 목소리는 평온했고, 당당했다.
“신후 씨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걸……. 혹시 어젯밤 내가 한 말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초연은 퍼뜩 어젯밤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래도……. 당신 젊어서 한때 저지른 일이라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면 어떡해요? 사고가 나고 기억을 잃은 걸 모두 설명할 수도 없잖아요.’
‘내가 당신과 솔이 보다 회사를 더 중요하게 여길 거라고 믿는 거군.’
“나 때문에……. 내 말 때문에…….”
눈앞이 캄캄해진 초연이 이마를 짚었다.
- 시기만 앞당긴 거지 생각했던 일이었어. 숨기면 사람들은 약점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공격한다고. 차라리 밝히는 게 나아. 그러면 뒤에서 허튼짓할 생각은 못 하거든.
“가족들은요?”
- 할아버지는 좋아 미치실걸. 새어머니는 신경 쓸 필요 없어.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나한테 상의 한마디 없이…….”
초연은 숨이 턱하고 막혔다.
고맙지만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앞뒤 안 보고 밀어붙이는 그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말할 시간이라도 주지, 어떻게 이렇게 생각도 없이 밀어붙이기만 하는지 원망스러웠다.
***
전화를 끊은 신후는 핸드폰을 한참 바라보았다.
결혼 발표에 초연이 이렇게 노이로제 걸린 사람처럼 반응할 줄은 몰랐다.
그동안 미혼모처럼 솔이를 키우며 많은 손가락질을 받았을 것이다.
심지어 그가 청도 천연 염색 박물관에 데려다주던 날 직접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었다.
근데 그냥 재혼도 아니고, 솔의 친부가 나타나 결혼을 했다는 발표가 그렇게 과민반응할 일인가?
지금 그녀의 반응은 누가 봐도 이상할 지경이었다.
재윤이 아니라면 누가 보는 게 두려워 이렇게 결혼 발표를 질색하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초연.”
어젯밤은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듣느라 그의 머리 역시 과부하 상태였다.
초연이 말해주는 내용을 기억하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앞뒤가 맞지 않는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비록 이름은 강 비서님 이름을 사용했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요.’
그렇게 말해놓고,
‘나중에 당신 진짜 이름과 집안을 알고…… 좀 배신감을 느꼈어요. 1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자신의 본명도 알려주지 않고 사라진 남자를 어떻게 믿겠어요?’
자신이 사라진 뒤 찾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초연의 말대로 임신까지 시켜놓고 하루아침에 날아버린 양아치 새끼를 어찌 그리도 넓은 마음으로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나.
그리고 진짜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배신감을 느낄 이유 따위도 없다.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
게다가 나중에 자신의 진짜 이름과 집안을 알았다는 건 언제인 건가.
그가 사고 난 직후 그 어디에도 그의 사고 소식이 올라온 매체는 없다.
그의 집안에서 철저하게 숨겼기 때문이다.
나중에 자신이 회사에 입사하고, 방송에 나오는 모습을 보고 알게 됐다는 건가?
그렇다기엔 자신이 사라졌다가 언론에 나오기 시작한 2년간 그녀가 그를 찾았다는 말이 없었다.
왜 가장 힘들었을 2년간의 이야기가 없을까?
곰곰이 생각하는데 사무실로 강 비서가 튀어 들어왔다.
“민 이사님!”
“무슨 일이야.”
“원단 어디로 사라진 건지 알아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