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깊숙한 각인-54화 (54/84)

〈54〉

“그러면 어떻게 아저씨가 우리 아빠인지 알아요?”

“나도 혈우병 D형 앓고 있어.”

솔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가 가라앉았다.

아직 의구심을 다 지우지 못한 얼굴이었다.

“이건 유전병 아니랬어요.”

신후의 시선을 피해 한쪽에 팽개쳐놓았던 슈퍼카를 만지작거리며 솔이 중얼거렸다.

“맞아. 유전병은 아니야. 근데 이만큼 똑똑하고, 잘생긴 데다가 같은 병까지 앓고 있을 확률은 높지 않지.”

분위기를 풀어볼까 던진 농담이었다.

하지만 멀뚱히 쳐다보는 솔의 눈빛은 전혀 농담을 받아주는 눈치가 아니었다.

생각보다 도도한 솔의 모습에 신후는 맨날 농담도 안 받아주는 독한 상사라고 욕하던 강 비서를 떠올렸다.

신후는 시답잖은 농담 대신 품 안에 두었던 서류를 꺼냈다.

“이거 볼래?”

“뭔데요?”

솔이 빼꼼 고개를 빼고는 서류를 살폈다.

이름과 제목 몇 가지를 빼고는 온통 전문용어가 가득한 종이였다. 분명 솔이가 아직 해석할 수준은 아닌데도 적어도 쓸데없는 농담보다는 관심을 끄는 데 성공이었다.

“유전자 검사지. 너와 내가 진짜 아빠와 아들이라는 증명서. 유전자 99.999% 일치가 무슨 의미인지 알아?”

“알아요.”

차분한 솔의 대답에 신후는 안도했다.

“저도 볼래요.”

“여기.”

신후는 한참 동안 서류를 뚫어지라 살피는 솔의 모습은 말없이 지켜보았다.

***

다행히 솔은 그의 걱정보다 빨리 상황을 이해했다.

그를 반겼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다만 그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었고, 왜 같은 집에서 살아야 하는지, 상황을 받아들였다는 의미였다.

그를 가라고 밀어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사실 솔이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어보고 싶었다.

저 작은 몸이 제 품에 폭싹 안기는 느낌을 느껴보고도 싶었다.

통통하고 보드라운 뺨에 제 뺨을 비벼보고, 찰랑거리는 머리를 쓸어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아직은 무리라는 건 그 역시 알고 있었다.

그저 잘 자라고 인사를 건네고, 이불을 덮어주며, 불을 꺼주는 것만이 솔이 그에게 허락한 아빠 노릇이었다.

이제 솔의 마음을 얻는 일은 천천히 그가 해야 할 일이었다.

수만 가지 어긋난 단추 중에 이제 하나 제대로 끼운 것 같았다.

신후는 안방으로 향했다.

두 번째 단추가 그를 기다리는 곳이었다.

방에 들어서자 슬립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 있던 초연과 눈이 마주쳤다.

탐스럽게 풀어헤친 머리.

광택 나는 슬립 아래 봉긋하게 솟아오른 가슴에 저절로 눈길이 갔다.

“신후 씨? 아, 신후 씨도 자야죠.”

초연이 허둥지둥 침대에서 발을 내렸다.

“같이 자.”

반대쪽에서 침대에 오르며 신후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초연이 휘청하며 침대에 쓰러졌다.

“아니에요. 신후 씨 출근해야 하는데 여기서 편하게 자요. 난 솔이랑 잘게요.”

솔이는 무슨. 초연이 왜 솔이에게 가겠다는지 의도가 뻔했다.

행여 솔이도 있는데 자신이 덮칠까 걱정하는 것이겠지.

한집에 살면서 그러면 앞으로 섹스도 안 하고 살 거냐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요 며칠 그가 초연에게 했던 짓을 생각하면 저런 과민 반응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오늘 밤은 안 건드려.”

행여 또 슬립의 유혹에 스스로 무너질까. 초연을 당겨 자리에 눕히면서 이불을 그녀의 목 끝까지 올렸다.

그리고는 등베개에 반쯤 누워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생각지도 못한 신후의 반응에 초연은 그를 바라보았다.

요 며칠 잔뜩 화가 나 날뛰던 그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솔이랑은 얘기 잘 했어요?”

“그럭저럭.”

말은 그렇게 해도 이야기가 잘 안 됐으니 표정이 저렇게 좋지 못한 거겠지.

“솔이가 쉬운 성격은 아니에요. 의심도 많고, 속을 쉽게 보여주지 않아요.”

“멍청한 것보다 낫네.”

그녀의 생각보다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도대체 둘이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물어보려는데 신후가 한발 빨랐다.

“당신에게 난 어떤 남자였지? 임신시키고 내뺄 정도로 양아치였나?”

신후가 그녀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물었다.

지난번 부산에서 이상한 사람들에게서 들은 후 계속 그의 머릿속을 맴도는 말.

자신을 모른 척하고, 재윤을 선택한 이유가 혹시 그것 때문일까. 계속 그를 괴롭히던 말이었다.

“아니에요.”

급작스러운 그의 질문에 덜컥 대답한 초연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집요한 신후의 눈빛에 초연은 조금 망설였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하는지.

지은을 생각하면 말하면 안 되지만 말을 안 한다고 넘어갈 그가 아니었다.

결국 어떻게든 알아낼 것이다.

게다가 요 며칠 그가 받은 상처를 생각하면 모든 걸 밝히고 싶기도 했다.

아직 마음이 갈팡질팡하는 와중에도 초연은 조심스레 입을 뗐다.

“비록 이름은 강 비서님 이름을 사용했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요.”

“빗속에서 정신을 잃는 와중에 보고 싶을 만큼?”

초연이 말없이 얼굴을 붉혔다. 긍정의 의미였다.

“적어도 내가 다시는 보기 싫을 정도로 개 쓰레기까지는 아니었던 모양이군.”

과거의 자신이 영 쓰레기는 아니었다는 사실에 신후는 안도했다.

그렇다고 모든 의문이 해결된 건 아니었다.

자세히 생각해보니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임신까지 해놓고 고작 이름 하나 속였다는 사실에 자신을 다시 찾지 않았다는 말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초연의 자존심이 보통 자존심이 아니라는 건 안다.

하지만 그건 혼자일 때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솔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초연이었다.

그를 모른 척하고 싶었음에도 솔의 치료를 위해 서울까지 따라온 여자가 아니었던가.

어려운 병이기는 해도 돈이 있으면 수월한 병이었다.

솔이 그런 병에 걸렸는데 돈이라면 얼마든지 줄 수 있는 자신을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자신이 쓰레기가 아니라면 더 말이 안 된다.

“말해봐. 당신의 기억 속의 난 어떤 사람인지.”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태생이 명령을 내리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알 수 없는 압박감에 초연은 조금씩 예전 일들을 풀어갔다.

뜨거운 여름 휴가철.

방파제 근처에서 그와 사고로 만났던 일.

그의 부상으로 그녀의 집에 함께 지내게 된 이야기.

어느 순간 둘이 사귀게 되고 미래를 약속한 순간까지.

이야기하면서 초연의 감정 역시 복잡해졌다.

그를 다시 만나 옛날 함께 했던 날들을 나누게 될 줄은 몰랐다.

그와의 이야기는 그저 평생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놓고 다시 꺼내볼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그와 한 침대에 누워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신후를 보노라니 초연의 마음이 일렁였다.

“임신 소식을 알고 사고가 난 건가? 아니면 내가 사고 난 후에 당신만 임신 사실을 안 건가?”

“알고 사고가 난 거예요. 근데 하필 그 날이 신후 씨 서울에 복학 신청하고, 자췻집 계약하러 가는 날이라…… 올라가기 직전에 짧게 이야기만 나눴어요. 갔다 와서 자세히 얘기하기로 했는데……. 서울 올라가는 길에 사고를 당한 거죠.”

촉촉이 젖어가는 초연의 눈빛에 신후는 가슴 한쪽이 뻐근했다.

그녀가 자신을 모르는 척했다는 원망과는 다르게 그날 초연이 겪었을 마음고생이 짐작 갔다.

처녀가 임신했는데 임신시킨 놈은 갑자기 사라졌다. 놀랄 만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초연이 저지른 모든 짓을 이해한다는 건 아니었다.

“사고 난 후 날 찾았어?”

혹시 제집에서 먼저 자신을 찾아 데리고 가느라 초연이 자신의 행방을 모른 건 아닐까 미안했다.

“아니요…….”

초연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째서지? 적어도 내가 양아치가 아니라면. 당신 말대로 결혼까지 약속한 사람이라면 날 찾아보는 게 이치에 맞지 않나?”

자신은 초연과 솔을 버린 게 아니었다.

기억을 잃었을 뿐이었다.

만약 초연이 자신을 찾아줬다면 이렇게 긴 세월 초연과 솔을 잊고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억울함에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때는…….”

초연은 아차 싶었다.

그저 그가 임신 사실을 알고 자신을 버린 나쁜 인간은 아니라는 정도만 말을 하고 싶었는데.

이야기에 빠져 생각보다 너무 많은 말을 했다.

지은이 왔던 이야기는 절대 할 수 없었다.

“그때는?”

신후의 채근에 초연이 말을 이었다.

“나중에 당신 진짜 이름과 집안을 알고……. 좀 배신감을 느꼈어요. 1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자신의 본명도 알려주지 않고 사라진 남자를 어떻게 믿겠어요?”

지금의 초연은 아까 흐르는 물처럼 말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말을 더듬고,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 어색함이 더 그의 신경을 긁었다.

자신은 상대방이 가진 패를 모르는데, 상대방은 자신의 모든 패를 보고 있는 포커를 하는 기분.

뭔가 독소조항이 가득한 계약서를 받았는데 무엇이 자신에게 손해날 조항인지 쉽게 눈에 안 들어올 때의 찝찝함.

“그냥 사귀다가 헤어진 거라면 날 다시 찾지 않는 게 말이 되긴 해. 하지만 솔이까지 임신해놓고?”

추궁하는 그의 눈매에 초연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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