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하지만 그의 불안감은 솔이의 하원 시간이 가까워지자 되살아났다.
“와아! 엄마 여기가 우리 집이야?”
“응.”
“엄청 크다! 지난번 집보다 더 커!”
무거운 마음의 신후와 달리 아침 집보다 두 배는 커진 집 내부에 솔은 놀라 구경하기 바빴다.
그가 있는 것도 모른 채 복도를 가로질러 거실 끝에서 제 방 끝까지 종종걸음으로 돌아다녔다.
2층까지 올라갔다가 초연의 부름에 식탁에 앉은 솔은 여전히 신후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해서 신후는 투명한 유리그릇에 담긴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먹는 솔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언제쯤 이야기를 꺼낼까.
당장이라도 자신이 네 아빠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아이스크림 먹는데 방해하면 더 성질을 건드릴까.
천하의 민신후가 솔의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아저씨 슈퍼소닉 알아요?”
두어 숟가락 아이스크림을 먹고 급한 갈증은 풀었는지 주변을 둘러보다가 그를 발견한 솔이 질문을 던졌다.
그 눈빛을 신후는 알았다.
결코, 애니메이션 따위를 물어보려는 눈빛이 아니었다.
자신만이 아는 무언가를 자랑하고 싶은 기운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개기 월식.”
“우와! 오늘 이 문제 맞힌 사람 첨 봐요.”
생각지도 못했는지 솔의 두 눈이 커다랗게 반짝거렸다.
“근데요 아저씨. 개기 월식은 해랑 지구랑 달이 나란히 놓여서 달이 지구 그림자 때문에 안 보이는 거잖아요.”
“그렇지.”
신후가 팔짱을 낀 채 의자에 등을 기대며 솔의 말에 집중했다.
초연은 둘의 대화를 지켜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솔이에게 신후가 아빠라는 사실을 어떻게 이야기 꺼내야 할지 막막했다.
어차피 이사까지 한 판에 계속 속일 수는 없다. 솔이 아는 건 시간문제였다.
마치 곧 터질 폭탄을 안고 있는 듯 마음이 불안했다.
그런데도 태연하게 팔짱을 낀 채 솔이와 대화를 이어나가는 신후를 보자 무슨 생각인가 싶었다.
“달은 한 달에 한 번 지구를 돈다고 했잖아요. 근데 왜 개기 월식은 한 달에 한 번씩 없어요? 있으면 엄청 멋있을 텐데. 어린이집에 있는 책에는 그런 내용이 없어요.”
솔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그건 궤도가 달라서 그래.”
“궤도?”
“지구는 태양 주변을 돌고, 달은 지구 주변을 도는 건 알지?”
“네!”
신후는 식탁 위에 놓여있던 초연의 수첩 빈 곳을 펼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위에서 보면 셋이 일직선으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옆으로 보면 일직선이 안되거든.”
“아하! 알겠어요. 와 신기해요.”
초연의 눈에는 그 모습이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설명보다는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과외 수업처럼 보였다.
그녀는 알 수 없는 내용이었지만, 솔이는 잘 이해하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 모습에 이상하게 가슴이 저릿했다.
솔은 세 살 때부터 범규에게 천자문을 배웠다.
초연은 이제 겨우 한글을 뗀 아이한테 그건 무리라고 말렸지만 범규는 솔이 범상치 않다고 늘 말했다.
그리고 범규의 말대로 솔은 1년도 되지 않아 천자문을 뗐다.
남들은 한글도 떼기 힘든 나이에 천자문까지 뗀 솔을 보고 동네 사람들은 천재가 나왔다고 입이 닳도록 칭찬했다.
천자문뿐만이 아니었다.
동네 어린아이가 볼만한 책을 모두 섭렵하고는 근처 도서관의 책들을 차근차근 소화해냈다.
그중에 정말 마음에 드는 책은 갖고 여러 번 볼 수 있게 할 수 있게 사주기도 했다.
솔이 밑으로 책값이 쏠쏠하게 들어갔지만, 솔직히 좋았다.
솔을 임신하고 마음고생 했던 게 싹 잊힐 만큼 뿌듯했다.
하지만 범규가 죽고 염색 공방을 운영하며 초연은 솔의 지식에 대한 목마름을 채워줄 수 없었다.
솔의 질문 수준은 그녀 역시 검색을 해야 할 정도였다.
바쁜 생활 탓에 다음에, 다음에, 하다 보면 대답할 때를 놓치기 일쑤였다.
해서 미안한 마음에 틈이 날 때면 더욱더 도서관에 데리고 갔다.
그것으로도 솔의 궁금증을 다 채워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신후가 솔의 궁금증을 해결해주는 모습을 지켜보자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미안하면서도 비어있던 무언가가 채워지는 느낌.
“이번 주말에 슈퍼소닉 있다는데 나 아저씨 집에 가서 구경해도 돼요?”
해서 초연은 이때다 싶어 솔이를 불렀다.
“솔아.”
“응, 엄마.”
“아저씨랑 같이 살래?”
조심스러운 초연의 목소리에 그제야 솔이 아이스크림 그릇에서 고개를 들었다.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듯 커다란 두 눈에 의구심이 가득했다.
“왜?”
초연은 최대한 웃는 표정을 유지하며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저씨랑 같이 살면 너 궁금한 거 있을 때마다 아저씨가 설명해 줄 수도 있고, 또 아저씨 망원경도 언제든 네 마음대로 쓸 수 있잖아.”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솔이 초연과 신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 신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솔이처럼 똑똑한 아이한테 말도 안 되는 논리로 핑계 대봤자 설득될 리가 없다.
몸은 어리지만, 속까지 어리지는 않았다.
신후 역시 어린 시절이었지만 충분히 어른들의 대화를 이해했고, 감정을 느꼈다.
그러니 솔직해야 한다.
“내가 네 아빠거든.”
“신후 씨!”
초연이 놀라 그의 팔을 붙잡았다.
하지만 신후는 아랑곳 않은 채 솔이와 눈을 맞추며 설명했다.
“원래 가족은 한집에서 살아. 그러니 우리 세 식구도 앞으로 이 집에서 같이 살 거야.”
솔이가 이해해주길 바랐다.
남들보다 똑똑하고 성숙한 아이니까. 거부감 없이 자신을 받아들여 줬으면 좋겠다 싶었다.
“아니야!”
잠시 멍했던 솔이 갑자기 소리 지른 후, 스푼을 던지며 제 방으로 달려갔다.
그 순간 신후는 자신의 작전이 판단 미스였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똑똑해도 솔이는 7살짜리 아이에 불과했다.
조급한 마음에 적응할 시간을 주지 못해 다치게 한 건가.
“솔아! 지금 솔이 신후 씨가 감당하기 힘들 거예요. 제가 가서 일단 달랠 테니까 천천히 얘기해요.”
“됐어. 언젠간 한 번은 감당할 일이야. 내가 해.”
신후는 솔이를 달래기 위해 가려는 초연을 막아선 후, 자신이 솔의 방으로 향했다.
그가 솔이의 방으로 들어가자 솔이 신후의 품에 슈퍼카 미니어처를 떠안겼다.
“이거 가지고 가요.”
“솔아. 아빠 이야기 들어봐.”
신후가 허리를 굽혀 솔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흔들림 없는 표정이었다.
아빠라는 단어에 바짝 독이 오른 솔이 이번엔 그의 허벅지를 밀며 정강이에 발길질을 했다.
“이 씨. 가요, 가란 말이야.”
솔에 비해 커다란 나무 같은 그가 밀릴 리가 없었다.
이내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솔이 홱 몸을 돌려 침대로 향했다.
“아저씨가 왜 내 아빠예요? 우리 아빠 하늘나라에 있단 말이에요.”
커다란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리면서도 제 할 말을 했다.
이불을 산처럼 부풀린 모양새가 꼭 적 앞에서 잔뜩 몸을 부풀리는 맹수와 같다.
마음 같아서는 이불을 내리고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쉽게 이불에 손을 댈 수 없었다.
힘들어하는 솔이에게 보호막까지 벗겨내려는 못된 놈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야. 안 죽었어. 엄마가 착각한 거야. 사고가 나서 다치긴 했는데 죽지는 않았어. 네가 보고 싶어서 하늘나라 안 갔어.”
기억나지 않았다면, 분명 자신은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다.
“거짓말. 근데 왜 여태껏 그런 말 안 했어요? 아저씨였잖아. 그럼 거짓말한 거예요? 왜 거짓말했어요?”
“거짓말한 거 아냐. 몰라본 거야.”
한마디 한마디 진심을 담아 설명했지만 어린 솔이 받아들이기에는 버거운 현실일 뿐이었다.
“어떻게 아빠가 아들을 몰라봐요?”
이불 속에서 솔이 악을 쓰며 울었다.
그동안 아빠가 없다고 사람들이 뒤에서 손가락질하는 걸 솔이도 알고 있었다.
친구들이 놀려댈 때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아무렇지 않지 않았다.
엄마가 슬퍼하니까 말을 꺼내지 않은 거였다.
근데 아빠라니! 난데없는 아빠의 등장은 기쁘기는커녕 원망스러웠다.
남자는 우는 거 아니라고 할아버지가 그랬는데.
알 수 없는 설움에 눈물이 나오고 약이 바짝 올랐다.
“6년 전에 사고가 났을 때 많이 다쳤어. 몇 달 동안 병원 신세를 질 정도로 다쳤고, 1년 반 정도의 기억도 잃었어.”
기억을 잃었다는 신후의 말에 솔이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가뜩이나 큰 눈은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뽀얗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가는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이마 위에 헝클어진 채였다.
“기억 상실이 뭔지 알지?”
신후의 손이 저도 모르게 솔의 이마로 뻗었다.
그의 손길에 솔이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기억을 못 하는 거요.”
자신의 손길을 피하는 솔의 모습에 신후는 가슴 아팠지만, 이만큼이라도 받아줘서 다행이다 속으로 되뇌었다.
“그래. 그래서 아빠가 솔이랑 엄마를 못 알아봤어.”
“엄마는 그런 말 안 했는데……. 엄마는 기억 상실 아닌데……. 아저씨가 우리 아빠면 우리 엄마가 몰라볼 리가 없잖아요.”
“아빠가 기억을 못 하니까 아빠 힘들까 봐. 말을 안 했대.”
“그럼 이제 어떻게 알았어요? 기억 상실 나았어요?”
솔의 질문에 신후는 속으로 감탄했다.
지금 솔은 그와의 대화를 통해 상황을 이해하고 자기 나름대로 감정을 추스르는 중이었다.
역시 내 아들 똑똑하다 싶었다.
“아니. 아직 기억은 못 해. 그래서 널 몰라봤어. 미안해.”
정말이었다.
6년 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해 답답했다.
초연에 대한 마음이 원망이라면, 솔이에게 갖는 감정은 오롯이 미안함이었다.
똑똑한 솔이를 보면서, 남들이 자신과 솔이 닮았다는 말들을 떠올리며 기쁨보다 미안함이 더 컸다.
만약 자신이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솔이에게 수천, 수만 가지 것들을 주었을 것이다.
좋은 집, 좋은 환경, 원하는 책도 도서관 못지않게 사줄 수 있고, 솔이 관심 있다는 슈퍼카 미니어처도 질릴 만큼 사줬을 것이다.
무엇보다 미혼모의 자식이라는 손가락질을 받게 하지는 않았겠지.
입 안이 썼다.
하지만 정작 줄 수 있는 수만 가지 것 중에 가장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을 주고, 그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자신이 이토록 무능한 애비가 될 줄은. 정말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