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초연이 차에 타자마자 신후는 거침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어디 가는 거예요?”
“혼인신고하러.”
“네?”
초연은 당황했다.
이사도 혼란스러운데 혼인신고라니. 빨라도 너무 빨랐다.
“그러면 내가 계속 솔이를 저렇게 둘 줄 알았어?”
솔이도 솔이지만 실은 초연 때문이었다.
혼인신고라도 해놓지 않으면 갑자기 정신을 차린 초연이 솔이를 자신에게 주고서라도 재윤에게 가겠다고 하지는 않을지 두려웠다.
해서 새벽같이 강 비서를 불렀다.
‘형! 아니 민 이사님. 미치셨습니까?’
‘욕을 하든 존대를 하든 하나만 해.’
‘혼인신고라니요.’
‘내 자식이 애비도 없는 미혼모 자식 취급받는 꼴을 지켜봐?’
‘그게 아니라 이사님은 보통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회사 생각도 해야 하고, 언론 대응도 생각해야 하고. 갑자기 결혼식도 치르기 전에 혼인신고부터 했다 그러면 언론에서 얼마나 신나게 씹어대겠습니까? 홍보팀 생각도 좀 해주셔야죠. 아니, 일단 회장님께는 먼저 말씀드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말씀드렸습니까?’
‘사인하고 네가 말씀드리러 가.’
한바탕 잔소리를 듣고 나서야 혼인신고서 증인란에 사인을 받을 수 있었다.
‘이사님이 이런 식으로 결혼하게 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 역시 이런 식으로 결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초연에게 잊을 수 없는 결혼식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최고급 식장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드레스와 가장 크고 빛나는 반지를 주며 둘의 빛나는 미래를 약속하고 싶었다.
그걸 망친 게 초연이었다.
“그래도 솔이한테 이야기할 시간은 줘야죠. 아직 이사 얘기도 못 했는데 이건 정말 아니에요, 신후 씨.”
초연이 달래듯 말했지만 신후는 코웃음을 쳤다.
“솔이? 정말 솔이를 걱정하는 사람이 내가 치료해주겠다는 조건도 포기하고 청도 내려갈 생각을 해? 그 새끼한테 돌아갈 생각 따위는 포기해.”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긴. 그러면 왜 며칠 전에 재윤의 품에 안겨 울었지? 그것도 내 프러포즈를 받은 다음 날 말이야. 그 새끼가 결혼이라도 하재? 그래서 내 프러포즈를 거절한 건가?”
신후의 날 선 표정에 초연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봤구나.
“말해봐. 어디 한 번.”
신후가 초연을 노려보았다.
간절한 부탁이었다.
정말 재윤이 이유가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자신과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인지.
충분히 납득할만한 이유를 듣고 싶었다.
“정말……. 그런 건 아니에요. 제 말 좀 믿어줘요.”
하지만 여전히 전혀 설득력 없는 초연의 저항에 신후는 다시 한번 가슴이 갈가리 찢겼다.
무섭게 변하는 그의 표정에 움찔하면서도 초연은 지은의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도, 지은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솔이의 치료를 약속받았다.
그런데 자신이 이 모든 이야기를 하면 집안에 분란만 날 뿐이었다.
가뜩이나 지은을 좋아하지 않는 신후와 지은의 사이가 틀어지고, 지은이 솔이의 치료를 중단시키면.
아무리 〈MJ 인터내셔널〉이라도 병원 일까지 관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신후가 자신만만하던 솔이의 검사가 지은에 의해 멈춰진 걸 본 초연이었다.
행여 솔이가 치료를 받지 못하게 될까 봐 초연은 두려웠다.
초연에게는 신후의 분노보다 그 사실이 더 무서웠다.
***
구청 종합 민원실에 도착한 후 신후가 그녀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작성해.”
이미 그의 정보와 증인 정보까지 적힌 혼인신고서였다.
그녀의 정보만 채우면 될 정도로 서류는 완벽했다.
초연은 멍하니 혼인신고서를 바라보았다.
그토록 바라던 그와의 결혼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혼인신고를 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시간 끌 생각하지 마.”
신후의 닦달에 초연은 얼른 펜을 쥐고 정성스레 빈칸을 채워갔다.
그녀가 서류를 작성하자마자 신후는 서류를 창고에 제출했다.
잠시 후 직원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둘의 혼인이 성립되었음을 알려주었다.
“혼인신고 완료됐습니다. 혼인 효력은 지금부터 발생하지만 가족 관계 증명서 발급은 3, 4일 정도 걸리십니다.”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한복도, 사람들의 축복도 없는 결혼식이었다.
여태껏 살면서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결혼식이었다.
지은이 알면 또 무슨 짓을 벌일까 무서웠지만, 신후와 자신이 법적 부부가 됐다는 사실에 이상하게 감정이 울컥했다.
“여기서 울 생각하지 마.”
신후가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자신이 울고 있었다는 사실도 몰랐던 초연이 얼른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그의 시선을 피해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었다.
세상에 혼인신고를 하러 와서 우는 신부가 몇이나 될까.
제 등에 떠밀려 혼인신고를 하게 된 초연의 속내를 보는 것 같아 신후는 속이 문드러졌다.
신후는 심란한 마음을 숨기며 직원에게 물었다.
“그러면 아이 성도 제 성을 따라 바뀝니까? 아니라면 바꾸고 싶습니다. 이민솔이 아닌 민 솔로. 성은 민, 이름은 솔로 말입니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초연을 닦달해 치루는 서류 작업이었지만 이상하게 사람 설레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여태껏 존재도 몰랐던 자식을 자신의 호적 아래 둔다는 것이 이렇게 가슴 떨리게 하는 일인 줄은 미처 몰랐다.
“아이의 성을 아버님 성으로 바꾸고 싶으시다면 성본 변경 신청을 하셔야 해요.”
“그게 뭡니까?”
“쉽게 말해서 아이와 새아버지의 성이 달라서 아이들이 겪는 불편을 줄이기 위해 만든 제도인데 아이의 성을 새아버지나, 어머니 성으로 바꾸는 법적 절차예요.”
“서류 주십시오.”
당장이라도 처리할 듯 신후가 가슴에서 다시 만년필을 꺼냈다.
“그건 여기서 지금 처리 못 하고 며칠 뒤에 가족관계증명서 나오면 그거랑 주민등록등본 뽑아서 법원 가셔서 성본 변경 신청서 작성해서 제출하면 됩니다. 참. 친부모 동의가 있어야 해서 친부 동의서도 받아가셔야 하고요.”
친부라는 단어에 신후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성본 변경을 해도 친권, 면접 교섭권은 친부에게 있으니 잘 설득해보세요.”
“제 친아들입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신후가 한 자 한 자 눌러 대답했다.
보통의 목소리였지만 만년필을 쥔 손마디가 하얗게 변하는 것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그의 분노를 기민하게 눈치챈 초연의 어깨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그러면 성본 변경을 해도 완벽한 제 아이가 아닙니까?”
“네…….”
직원이 난감한 표정으로 모니터와 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많지 않은 케이스와 이 상황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신후의 태도에 기가 눌려버린 것이다.
“아이를 제 친아들로 인정받으려면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친부의 동의를 받아야 솔이를 제 아래에 둘 수 있다는 사실에 절로 욕지거리가 나올 지경이었다.
“아…….”
꾹꾹 숨겨도 느껴지는, 당장이라도 어쩔 것 같은 살벌한 분위기에 다시 한번 직원이 난감해했다.
그 사이 이 혼인신고를 흥미롭게 지켜보던 나이든 공무원이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혼인을 안 하셨다면 인지 청구를 하시면 되겠지만……. 지금이라면 친양자 입양을 하셔야겠네요.”
“제 친아들인데도 입양을 해야 합니까?”
신후의 굳은 얼굴이 완전히 구겨졌다.
평상시 행여 언론이나 인터넷에 오르내릴까 특히 대중 앞의 행동에 신경 쓰던 신후였다.
그러니 이 정도의 감정 표현도 그에게는 대단한 반응이었다.
그만큼 지금 이 상황은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 감정을 요동치게 했다.
세상에 어느 아비가 제 아들을 진짜 아들로 인정받으려 이토록 노력을 해야 하나.
남들은 쉽게 얻는 아비란 타이틀을 얻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이 너무도 많았다.
여태껏 회사 일을 하면서도 이토록 답답하고 초조한 적은 없었다.
신후는 기껏 차려입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네. 제가 알기로는 법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친양자 입양은 두 분 혼인 신고 후 1년 후에나 가능…… 합니다.”
신후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똑똑히 보라는 듯한 신후의 눈빛에 초연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정말 몰랐다.
솔이와 그의 관계가 입양해야 친자식, 친부모가 될 수 있는 사이라니.
자신이 둘에게 무슨 짓을 벌인 건가 싶었다.
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초연은 그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신후는 초연을 힐끗 바라보았다.
뭐가 미안하냐고 묻고, 따지고 싶었다.
회사 일을 할 때는 직원들이 질겁할 만큼 원인부터 결과까지 분석하고 또 분석하던 그였다.
특히 실패한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더 엄격했다.
그래야만 같은 실수를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하지만 초연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따져야 할지.
자신을 모른 척했던 것.
솔이가 자기 아들인 것을 숨겼던 것.
자신이 아닌 재윤을 사랑한 것.
뭐가 미안하고, 얼마큼 미안한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미안하면 도망갈 궁리 그만하고 내 옆에서 평생 살아.”
그가 듣고 싶은 대답은 이것 한 가지였으니까.
***
구청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니 이사는 얼추 마무리됐다.
신후가 구한 집은 빌라 단지에서 가장 큰 평수였다.
말이 빌라였지, 단지 내 가장 안쪽 단독 건물이었다.
마당도 있고 옥상도 있는 2층짜리 독채였다.
집은 들어가는 입구부터 사람을 압도했다.
전실이 웬만한 아파트 거실만 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더욱 크기가 실감 됐다.
거실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는데도 집의 구조가 쉽게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거실은 2층까지 터져 있어 높은 층고 덕에 개방감이 좋았다.
게다가 전체 통창에 2층 거실 위 천장도 유리라 햇살이 전체적으로 쏟아져 내라는 광경이 일품이었다.
다른 집과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마당을 빼곡하게 둘러싼 정원수 덕에 거실에서 보는 풍경은 도심이라기보다는 전원주택 같은 느낌이었다.
“바빠서 꾸밀 시간은 없었어. 살림은 이걸로 알아서 바꾸고.”
신후가 블랙카드 한 장을 건네고 2층 계단으로 향했다.
그의 말대로 집 안에는 그의 집에서 보았던 가구와 그녀의 집에 놓였던 가구들이 뒤섞여 있었다.
블랙과 그레이 톤의 그의 가구들과 아이보리와 핑크 톤의 그녀 집에 있던 가구들이 이질적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걸 모두 바꾸자면 엄청난 돈이 들 것이다.
그것도 그가 샀던 것처럼 최고급 가구들로 이 넓은 공간을 채우려면.
어쩔 수 없이 아껴 살던 습관이 툭툭 튀어나왔다.
“낭비예요. 지난번 집도 셋이 살기에 충분한데 이건 너무 커요. 이 정도면 청소하는데도 2박 3일은 걸리겠어요.”
초연이 그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오르며 투덜거렸다.
“당신한테 청소하라고 안 해.”
“그래도 이 정도 집이면 한 사람이 절대 정리 못 해요.”
계단을 오르던 신후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초연 씨.”
두어 계단 아래서 초연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뜩이나 큰데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는 신후는 훨씬 위압적이었다.
“당신 이제 〈MJ 인터내셔널〉 이사 부인이야. 몇 년 후면 대표 부인이 되겠지. 본인이 누구 부인인지 똑똑히 기억해.”
저렇게 고압적인 위치에서 말해봤자 자신이 그의 위치로 올라간다는 게 쉽게 상상이 안 됐다.
오히려 자신과 그의 차이만 절실히 느낄 뿐이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자신이 있는 곳으로 내려오라고 할 수는 없다.
초연이 옅은 한숨을 쉬며 그의 뒤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을 때였다.
“여긴 전부 당신 작업실로 써.”
“?”
“청도. 정리해야지.”
고집스러운 눈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했다.
최대한 재윤과의 연결 고리를 끊으라는 의미였다.
“알았어요.”
초연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켜 하지 않은 대답이었지만 신후는 만족스러웠다.
그래도 혼인신고는 했으니까.
이제 초연이 도망가도 적어도 잡으러 갈 명분은 있다는 사실이 며칠 동안 그를 괴롭혔던 불안감을 조금은 잠재우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