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깊숙한 각인-51화 (51/84)

〈51〉

“신후, 아니. 민, 민 이사님이 어쩐 일로…….”

“청도로 다시 내려갈 준비. 다 했습니까?”

“네. 거의.”

조금 전 신후는 기다리던 검사 결과를 받았다.

혹시나 했던 의심도 날려버릴 99.999%의 유전자 일치. 안도와 함께 분노가 그를 휘감았다.

만약 자신이 검사하지 않았다면 초연은 태연한 얼굴로 자신을 버리고 떠났을 것이다.

신후는 간신히 치솟는 분노를 애써 가라앉히며 초연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정말 나와 결혼할 마음. 없습니까?”

“네.”

초연의 대답에 신후의 마음에는 감당할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쳤다.

“좋아요, 가요. 가겠다는 사람 안 말리겠습니다. 대신, 내 건 내놓고 가요.”

놀라 저를 쳐다보는 초연의 눈빛에 신후는 쾌감과 함께 고통을 느꼈다.

“당신이 말없이 가져가려는 내 것. 그건 놓고 가야지.”

“무슨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 전 민 이사님 물건 챙긴 게…….”

“언제까지 솔이가 내 아들인 걸 숨기려고 한 거지?”

유전자 검사지를 눈앞에 흔들자 그제야 초연이 사색이 됐다.

“애가 죽을 뻔한 순간에도 당신은 그 사실을 숨겼어. 왜. 거짓말을 한 거야.”

신후는 청도 산속에서 솔이가 죽을 뻔했던 일을 떠올렸다.

만약 그때 그가 그 자리에 없었다면.

규림이 없었다면.

솔이 어떻게 됐을지 모를 일이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덕에 언제나 수혈해줄 누군가가 있는 삶을 살면서도 늘 두려웠다.

혹시 수혈을 지속적으로 받지 못한다면?

불의의 사고로 과출혈이 일어났는데 적절한 치료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한데 솔이는 그나마 남은 보호막도 없이 노출된 채 살았다.

그동안 살면서 얼마나 많이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살았을까.

만약 그가 초연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자기 아들이 태어나고, 고통 속에 사는 것도 모르고 살 뻔했다.

병신같이 말이다.

자기 아들의 생사도 모를 뻔했다는 사실이 그를 미치게 했다.

“그 새끼와 결혼이라도 할 욕심에 말이야.”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자신과 함께 있으면 솔이의 치료를 받게 해준다고 해도 초연은 한사코 거절하고 재윤의 옆으로 가려 했다.

자신의 프러포즈에는 망설이더니 재윤의 품 안에서 울던 초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토록 자신이 싫었던 건가. 속이 갈기갈기 찢겼다.

“당신 변명 따윈 들을 생각 없어. 갈 테면 솔이 두고 가.”

“민 이사님, 아니 신후 씨 잘못했어요. 저한테서 솔이만 뺏지 말아 주세요.”

“솔이와 안재윤. 둘 중 하나만 골라.”

“솔, 솔이요.”

그나마 다행이라는 점은 초연에게 자신은 의미 없는 존재일지 몰라도 아직 솔이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

솔이를 볼모로 초연을 붙잡고 있는 제 꼴이 우스웠지만 지금 그가 사용할 수 있는 패는 그것뿐.

안도감과 동시에 찾아오는 비참함은 기꺼이 감수할 그의 몫이었다.

“그렇다면 다신 이 새끼와 연락할 생각도 하지 마. 솔이도, 당신도. 난 내걸 누구에게 빼앗기고 사는 성미가 아니라서 말이지.”

여태까지 자신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다.

재력도, 머리도, 외모도.

항상 그의 주변엔 그를 최고라고 칭송하는 사람들뿐이었다.

하지만 초연은 그가 아닌 재윤이라는 남자를 선택했다.

그 남자의 어디가 좋았을까.

부드러운 외모? 다정한 성격?

아무리 봐도 자신과는 대척점에 있는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초연의 취향인가 싶어 속이 쓰렸다.

“당신 몸은 입과 다른 소리를 하네. 참 겉과 속이 다른 여자야, 당신은.”

신후는 참을 수 없는 분노로 거칠게 초연을 탐했다.

“이, 이렇지 마요.”

그토록 잘해줬는데.

제 진심을 다 보여줬는데.

자신의 진심이 닿지 않았다는 사실이 비참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초연이 좋았다.

그녀의 움직임 하나, 표정 하나에 시선이 갔다.

재윤과 초연이 부부인 줄 아는 상황에서도 둘이 같이 있는 상황에 질투가 나는 모습에 스스로 놀라고는 했다.

그저 뒤늦게 만난 운명에 아쉬워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니 아니었다.

그의 무의식에 잠재된 기억이 그녀를 찾은 것이다.

하지만 초연은 기억이 빤히 있는데도 그 앞에서 재윤과 부부 행세를 하며 그를 능멸했다.

도대체 얼마나 자신이 싫으면 제 자식을 낳아놓고도 모른 척하나.

“당신 몸은 입과 다른 소리를 하네. 참 겉과 속이 다른 여자야, 당신은.”

자신이 손끝만 대도 자르르 몸을 떨며 반응해놓고는 마음속으로는 다른 놈을 품고 있다.

“내 옆에 있으려면 이 정도 각오는 해야지.”

클리토리스를 어루만질 때마다 성감에 달뜬 표정이 실은 그 새끼도 본 표정이라 생각하니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 새끼의 좆질에 정신없이 신음을 흘리는 초연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미칠 것 같았다.

“아니, 각오할 것도 없지. 적어도 잠자리에서는 잘 맞았잖아, 우리. 소리 질러 봐. 예쁘게.”

초연과 손끝만 닿아도 저릿할 만큼 좋았고, 사춘기 혈기왕성한 놈처럼 초연을 떠올리며 수음했다.

자신의 손길에 젖는 그녀를 보며 그녀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 느꼈다.

이토록 잘 맞는 우리 둘이 운명이 아닐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젖은 아래가, 달아오른 표정이 그를 미치도록 황홀하게 만들었던 둘의 잠자리가 초연에게는 다 아무 의미 없는 일이었다.

실은 그 새끼의 아래에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그냥 그녀의 몸이 민감한 것일지 모른다.

가슴이 터지고 미칠 것 같았다.

“참, 이 정도로는 만족 못 하지 당신?”

그를 천국으로 보냈던 이 구멍에 그 새끼의 좆이 들락거렸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 새끼와의 섹스가 자신과의 섹스보다 좋았을까?

“참아보려고? 어디까지?”

지금 신후는 마음속 분노와 고통을 어쩌지 못하고 길길이 날뛰었다.

“눈 떠. 너와 이 짓을 하는 인간이 누구인지 보란 말이야.”

이렇게 느껴놓고.

이렇게 자신을 흔들어 놓고.

“네 처음도 마지막도 남자는 민신후밖에 없어. 기억해.”

어떻게 사랑이 아닐 수 있나.

“아흣!”

아무리 탐해도 심해지는 갈증에 신후는 더욱더 초연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

그들이 집 앞에 도착한 건 그로부터 한 시간은 넘긴 후였다.

두 집 사이의 복도에 서서 신후가 집으로 들어가려는 초연의 팔을 잡아 자신의 집 쪽으로 이끌었다.

“안 돼요.”

초연이 기겁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어차피 힘으로 하면 이기지도 못할 거면서.

그녀의 말 한마디, 거부의 몸짓 하나가 비수처럼 그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들어가서 씻고 가.”

“?”

“신경 쓰고 있잖아, 당신.”

차를 타고 오는 내내 초연은 안절부절못했다.

행여 그가 다시 발정 나 덤빌까 치마를 무릎 아래로 연신 잡아 내리려 기를 썼다.

불안해하는 모습에 마치 자신이 초연을 괴롭히는 악역이 된 것 같아 입이 썼다.

“괜찮아요. 솔이 자고 있을 거예요.”

“마음대로 해.”

신후가 그녀의 손을 놓으며 물었다.

“이삿짐센터는 아직 취소 안 했지?”

“네.”

“그럼 취소하지 마.”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회사를 나와 처음으로 자신과 눈을 맞추는 초연의 모습에 신후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헛된 기대는 하지 마. 가족인데 같이 살아야 하지 않겠어?”

“같이요? 아직 솔이한테는 말도 못 했어요. 천천히 해요, 신후 씨. 천천히.”

지은이 알게 된다면 당장 다음 수혈을 중지하겠다고 난리를 부릴 수도 있다.

초연은 그의 손목을 잡고 애원했다.

“솔이에게 말은 당신이 해야지. 6년이나 놓친 시간. 내가 얼마나 더 놓치고 살아야 할까.”

질책하는 듯한 신후의 눈빛에 초연은 할 말이 없었다.

이미 단단히 결심한 신후의 뜻을 꺾을 수 없다는 건 분명했다.

신후는 그녀를 벌주기로 한 듯싶었다.

어떻게 하면 그녀를 더 괴롭힐 수 있는지 고민한 사람처럼 그녀를 몰아갔다.

그의 손목을 잡은 초연의 손이 스르륵 아래로 떨어졌다.

초연의 손이 제 손목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신후가 몸을 돌렸다.

저도 모르게 신후의 등을 향해 손을 뻗던 초연이 그만 다시 손을 내렸다.

상처받은 그의 모습에 모든 걸 털어놓고 싶다가도 말을 했다가 솔이 수혈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될까 두려웠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쾅.

문 닫히는 문소리가 꼭 자신을 감옥에 가두는 소리 같았다.

***

다음 날 아침.

초연은 청도로 내려간다고 들뜬 솔이를 다시 어린이집에 보냈다.

이유를 묻는 솔이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뭐라 말을 해야 할지 준비가 안 됐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이토록 우유부단하고 무기력한 인간인 줄. 초연은 처음 느꼈다.

갑자기 몰아닥친 거대한 허리케인에 의해 어딘가에 뚝 떨어진 나뭇가지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아직 9시도 안 된 시간인데 잠을 설친 탓인지 몸은 벌써 물먹은 솜이었다.

눈도 뻑뻑했다.

손바닥 안쪽 두툼한 살로 감은 눈두덩이를 꾹꾹 누를 때였다.

“이사하는 곳 주소가 어디랬죠? 아침에 깜박하고 사무실에서 안 받아왔는데.”

어느새 짐을 반쯤 싼 이삿짐센터 팀장이 물었다.

“아, 저…….”

그녀 역시 어디로 이사 가야 할지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당황하는 사이 그녀의 옆으로 슈트에 둘러싸인 긴 팔이 쑥 나왔다.

“여기로 가주시면 됩니다.”

신후였다.

어젯밤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해 몰골이 말이 아닌 자신과 달리 신후는 오늘따라 유난히 빛이 났다.

머리도 더 신경 쓴 듯했고, 슈트도 평상시보다 더 고급이었다.

“여긴?”

장난하나. 인부가 딱 그런 얼굴로 종이와 신후를 번갈아 보았다.

“돈은 똑같이 드릴 테니 여기에 이삿짐 풀어주시면 됩니다. 가능합니까?”

“하하하. 단지 내 이사인데 그 금액을요? 저야 가능하죠. 어이, 김 씨 서둘러. 사무실 전화해서 열두 시 전에 끝날 것 같으니 한 팀 더 예약 잡아달라고 하고.”

인부의 얼굴에 금세 웃음꽃이 피었다.

반대로 초연의 얼굴은 사색이 됐다.

“단지라뇨? 이 빌라 단지로 이사를 한다는 건가요? 신후 씨 그러지 말고 다른 곳 알아봐요. 이사가 싫다는 게 아니라…….”

신후가 같이 살자고 했지만 설마 같은 빌라 단지로 이사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따로 살던 사람들인데 갑자기 한집에 산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지는 않을까.

이미 사람들의 뒷말을 경험한 초연은 더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아무로 모르는 곳에서 세 식구가 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대답 대신 초연의 차림을 훑은 신후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당신은 따라 나와. 지금 갈 데가 있으니.”

신후는 그 말 만하고 뒷말은 들을 생각도 안 한 채, 쌩하고 집을 나섰다.

단지 내 이사도 당황스러운데 이삿짐 옮기는 걸 보지도 않고 어딜 간다는 건지.

도무지 신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신후 씨, 신후 씨!”

하지만 초연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의 뒤를 따르는 것뿐.

다른 어떤 생각을 할 여유도, 행동할 시간도 그녀에겐 주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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