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깊숙한 각인-50화 (50/84)

〈50〉

하지만 신후가 빨랐다.

자신의 집으로 가려는 초연의 팔을 잡아 재빨리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는 현관문을 닫자마자 문에 초연을 붙이고 입을 맞췄다.

초연의 몸에 묻은 그 새끼의 흔적을 지우고만 싶었다.

입안을 자신의 혀로 소독하다가 초연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다른 놈의 흔적을 지웠다.

“신, 신후 씨.”

놀란 초연이 그를 밀어냈지만 그럴수록 신후는 초연을 바짝 끌어안았다.

초연의 등을 더듬던 재윤의 손길이 떠올랐다.

그녀의 등을 미친 듯이 쓸고, 치마를 끌어 올려 엉덩이를 주물렀다.

“가만히 있어. 미칠 것 같으니까.”

재윤의 품에는 거리낌 없이 안겨있더니.

그 새끼를 보고 온 터라 자신의 품에 안기기가 꺼려진 걸까.

그토록 뜨거운 밤을 보내놓고 이제는 자신을 밀어내는 초연을 이해할 수 없었다.

미치도록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그 밤은 자신만의 착각이었나.

아니면 섹스 그 이상의 교감이 그 새끼와는 있다는 건가.

행여 그 새끼 앞에서 젖었을까 팬티에 손을 넣고 뒷구멍부터 음모까지 쭉, 훑었다.

“이러지 마요! 이러려고 온 거 아니에요!”

놀란 초연이 그를 확 밀쳐냈다.

다행히 팬티 안은 건조했다.

이 상황에도 초연이 그 새끼 앞에서 젖지 않았다는 사실에 신후는 기뻐 미칠 지경이었다. 제기랄.

“나만 미쳤었던 건가 보군.”

신후가 자조 섞인 웃음을 터트렸다.

초연은 얼른 손에 들었던 쇼핑백을 그에게 건넸다.

“그게 아니라 이거 주려고요.”

아까 재윤이 초연에게 주었던 쇼핑백이었다.

“당신에게……. 꼭 주고 싶었어요.”

그가 자신의 말을 못 들었나 싶어 다시 내미는데 신후가 단번에 쇼핑백을 손으로 쳐냈다.

쇼핑백이 휙, 벽에 부딪히며 안에 있던 내용물이 바깥으로 흩어졌다.

결혼식 예복 한복은 여태껏 본 적 없는 수준으로 아름다웠다.

이토록 아름다운 옷을 재윤과의 결혼을 위해 초연이 준비했다고 생각하니 속이 뒤틀렸다.

“필요 없어 이딴 거.”

“패션쇼 컨셉 바꿔야 할지 모른다면서요. 이걸로 다른 컨셉을 새로 잡아보는 건 어때요? 제가 오랫동안 생각해둔 컨셉이 있는데…….”

초연은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예전 할머니 밑에서 지낼 때부터 그녀가 구상하던 한복 브랜드가 있었다.

한동안은 희망에 부풀어 신후와도 이야기를 나눴지만, 자금이 없어 포기했더랬다.

그래도 언젠가는, 돈을 벌면 꼭 브랜드를 만들자고 둘이 약속했다.

하지만 신후가 떠나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초연 역시 솔이를 낳고 사는 게 바빠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패션쇼 컨셉을 다시 잡아야 한다는 신후의 말에 문득 예전 일을 떠올렸다.

밤을 새우며 자료를 정리했다.

“이초연 씨.”

신후가 씹어먹듯 한 자 한 자 또렷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생전 본 적 없는 냉기가 뚝뚝 흐르는 신후의 모습에 초연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당신한테 이딴 도움 받을 정도로 내가 후지지는 않았다고.”

하긴. 〈MJ 인터내셔널〉에 얼마나 많은 인재가 있는데.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 패션쇼를 준비했는데 차선책이 없을까.

“그러면 제가 서울에 있을 이유가 없겠네요.”

초연의 목소리에 절로 힘이 빠졌다.

신후가 성큼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당신한테 서울에 있을 이유가 그거뿐이야?”

신후의 눈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초연은 내내 생각했던 변명거리를 불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청도에 내려가서 솔이 치료 때마다 서울 올라오는 게 낫겠어요. 솔이 적응하기도 쉽지 않고, 저 역시 더는 회사에 출근할 일이 없으니까요.”

“그냥 이 집에 있어. 왔다 갔다 피곤하잖아.”

“당신한테 더는 폐 끼치고 싶지 않아요.”

“폐? 몸 섞는 사이가 아무 사이 아니라는 건가 지금?”

떡정도 정이라던데.

그 새끼에게 못 느끼는 떡정 때문에라도 자신을 선택해준다면 그것으로도 좋을 것 같았다.

“사람이 섹스만으로 사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당신이 아무하고나 섹스하는 여자는 아니지.”

“왜요. 당신 만나기 전에 벌써 어린 나이에 사고 쳐서 솔이 낳은 거 보면 모르겠어요?”

“씨발……. 그걸 말이라고.”

신후는 자신과의 만남을 사고라고 표현하는 초연의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었다.

“난 당신이 원하는 걸 다 줄 수 있어. 돈? 솔이 목숨? 말만 해. 다 줄 테니까.”

자신이 아니면 자신이 가진 것으로라도 신후는 초연의 마음을 얻고 싶었다.

하지만 초연은 그가 붙잡을 팔을 빼며 진저리를 칠 뿐이었다.

“당신을 원하지 않아요. 제발! 조용히 살고 싶다고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자신을 원치 않는다고 말하는 초연의 얼굴에 신후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그동안……. 정말 나한테 한 번이라도 마음 있어 본 적 없어?”

“없어요.”

분명 좋았다.

처음에는 비록 그녀가 그를 싫어했을지언정, 서울에 올라오고 초연도 조금씩 제게 마음을 열었다.

체육 대회가 있던 날 뜨겁게 자신을 안던 것이 아무 일이 아니라니. 믿을 수 없다.

부산에 출장을 갔을 때 수없이 나누었던 달콤한 통화가 별거 아니라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모든 게 자신의 착각이라니 미칠 것 같았다.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뭔데. 분명 좋았잖아 우리!”

“그동안 당신이 제멋대로 날 휘두른 거지 난 한 번도 좋았던 적 없다고요. 제 말 못 알아들어요? 난 당신이 싫다구요!”

신후의 언성에 초연의 목소리 역시 높아졌다.

신후가 그녀 쪽으로 손을 뻗었다.

무서운 그의 얼굴에 초연이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가.”

신후의 말에 초연이 눈을 떴다.

그의 턱짓에 초연은 신후가 문을 연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씹어먹을 듯 쏘아보는 시선에 초연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밖으로 나갔다.

철컥.

닫힌 쇠문 소리가 꼭 그의 마음이 닫힌 소리 같아 덩달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후두둑.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

초연이 나간 후 신후는 오랫동안 열지 않았던 장식장을 열어 독한 위스키를 한 병 땄다.

“하, 제기랄…….”

터질 것 같은 속을 달래려 술을 들이켰지만, 오히려 알코올이 그의 뱃속에서 불을 일으켰다.

이별을 고하는 돌아 나가는 초연의 얼굴에는 원망 대신 미안함이 가득했다.

뭐가 그리 미안할까.

그를 모르는 척한 것?

솔이가 자기 아들이라는 사실을 숨긴 것?

아니면. 자신을 사랑한다고 느끼게 한 것?

재윤을 선택하고 그를 버린 것?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지금 신후는 초연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초연과 재윤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 미칠 것 같았다.

변명을 듣지 않은 건 자신을 위해서였다.

저 가증스러운 얼굴로 또다시 거짓말하는 꼴을 보면 어떻게 할 것 같았으니까.

앞으로 절대 저 여자의 말을 믿지 않으리라.

오로지 객관적 자료로 초연의 거짓말을 멈추게 하리라.

팍! 위스키 잔이 벽에 부딪혀 사방으로 흩어졌다.

***

초연의 퇴사 소식은 위를 통해 디자인 팀 내부에도 통보가 되었다.

패션쇼에서 더는 그녀가 할 일이 없으니, 직원들 역시 그녀가 그만두는 것을 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난 민 이사님이 박 팀장님 내보내고, 그 자리에 이초연 씨 앉힐 줄 알았는데.”

“민 이사님이 공과 사를 구분 못 하는 사람은 아니잖아.”

어느새 여론은 그의 편으로 돌아갔다. 다행이었다.

“공과 사 지키느라 그러겠어? 결혼 준비하려고 그러는 거겠지. 이제 곧 〈MJ 인터내셔널〉 이사 사모님이 되실 건데 지금 포지션 애매하잖아.”

“하긴. 애 딸려도 얼굴 되고, 몸매 되고 능력 되니 좋은 남자 다시 붙잡는구나. 부럽다.”

신후가 허리까지 굽혀가며 부탁한 탓에 예전처럼 노골적으로 그녀를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두 사람의 인연에 대한 궁금증과 부러움 정도였다.

그것도 그녀의 앞에 나서 직접 눈치를 주는 사람은 없었다.

휴게실에서 사적으로 둘 셋씩 모여 수다를 나누는 정도였다.

이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게다가 자신은 곧 내려갈 사람 아닌가.

이제 청도로 가면 서울에서 사람들이 뭐라 떠들든, 그녀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혼자 남아 둘의 이별에 관한 뒷소문을 들어야 할 신후였다.

사람들이 모두 퇴근한 저녁.

초연은 홀로 남아 짐을 꾸렸다.

그녀가 청도에서 가져온 염료, 원단, 도구들은 회사에서 알아서 보내준다는 통보를 받았다.

처음에 청도에서 가져왔을 테니 그 방법대로 알아서 하려는 듯싶었다.

해서 초연은 자신의 짐만 꾸렸다.

얼마 있지도 않았는데 쿠션과 컵, 그녀가 좋아하는 차와 수첩, 필기도구를 챙기니 그래도 작은 박스 하나만큼의 짐이 나왔다.

마지막으로 초연은 자신의 천장 위를 바라보았다.

신후의 사무실이 디자인 팀 바로 위에 있었다.

그가 지금 그곳에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다.

며칠 동안 초연은 신후를 보지 못했다.

패션쇼 원단 문제를 해결하느라 신후가 바쁜 건 알고 있지만, 이대로 그를 보지도 못한 채 청도로 내려가게 될 줄은 몰랐다.

그가 너무 자신을 몰아붙여 자신의 말도 너무 거칠게 나갔다.

그렇게까지 심하게 하지 않아도 됐을 거라고 후회해보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내일 아침 이삿짐센터에서 오기로 했는데 신후의 출근 시간을 생각해보면 못 볼 확률이 높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고 싶다.

자신이 먼저 헤어지자고 해놓고, 이게 무슨 못 할 짓인가 싶었지만 그래도 초연은 신후가 보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사무실에 한 번 올라가 볼까.

운이 좋으면 사무실 밖에 나오는 그를 마주칠 수 있겠지.

근데 사무실에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안다고.

집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언제 들어올지 알고 집을 지킨단 말인가.

벌써 며칠 동안 신후는 집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하…….”

며칠 동안 가슴을 내리누르는 무언가에 자꾸 한숨이 흘러나왔다.

“네 선택이야 이초연. 솔이만 생각해.”

초연은 의식적으로 솔이만 떠올렸다.

그녀가 신후와 헤어지겠다고 말하자 지은은 바로 전화를 걸어 솔이의 검사를 진행하게 했다.

초연은 지은의 힘을 실감했다.

수혈자 매칭은 그녀와 솔이 청도로 완전히 내려가면 해준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가 신후를 찾아오지 않는 한, 수혈은 계속 이어질 거라 확답했다.

“그거면 됐어. 그거면.”

주문처럼 앞으로 솔이가 마음껏 뛰어놀고, 축구를 하고, 학교에 입학하는 상상을 했다.

그때였다.

조용한 사무실에 들이친 인기척이 그녀의 집중력을 흩트렸다.

본능적으로 초연은 소리가 나는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신후였다.

“신후, 아니. 민 민 이사님이 어쩐 일로…….”

그토록 그를 보고 싶어 했으면서도 지금 이곳에 그가 있다는 사실에 초연은 놀랐다.

“청도로 다시 내려갈 준비. 다 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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