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서류를 보기도 전 이상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선배가 만난 사람들 부산 토박이들인데 부산 조금 떨어진……. 뭐라더라? 거기 적혀있지? 거기서 방앗간집 한다더라.”
“순례 할매라는 분은? 그 동네 사람 맞아?”
“맞아. 원래는 방앗간이랑 같은 시장에서 작은 바느질 집 하면서 동네 사람들 한복도 만들고, 삯바느질도 하는 하던 분이신데 지금은 돌아가신 지 6년 정도 됐대.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도 죽은 지 20년도 넘었고, 그 딸이 남긴 손녀딸이 하나 있대.”
그의 한복에 대한 집착. 그리고 지겨울 정도로 나던 바닷가 소금 냄새.
조각난 기억의 퍼즐이 맞춰졌다.
신후는 다급히 서류를 넘겼다.
“더는. 없어? 그 손녀에 대한 정보는?”
“한국대학교 의류학과 졸업. 나이는 올해 스물아홉 살이고…….”
“사진은?”
강 비서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 거칠게 서류를 넘기던 신후가 한발 먼저 사진을 찾아냈다.
고등학교 졸업식 사진 한 장.
사진 속에는 앳된 얼굴의 초연이 자신보다 한참 작은 할머니의 키에 맞춰 허리를 굽힌 채 다정하게 그를 향해 웃고 있었다.
잘 보여주지 않아 가끔 초연이 자신을 보고 웃을 때면 마치 대단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그를 기분 좋게 하던 미소.
하지만 오늘 초연의 미소는 그의 가슴을 거칠게 할퀴었다.
“임신시키고 떠났다는 남자 사진은?”
신후가 고개를 들어 강 비서를 바라보았다.
“없어.”
진지한 강 비서의 얼굴에서 신후는 그게 끝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름은?”
“강찬영…….”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강 비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강 비서도 신후도 그 이유를 알고 있다.
대학 시절부터 신후는 때때로 신분을 밝히지 않아야 하는 순간이 오면 강 비서의 이름으로 상황을 모면했다.
그러니 그 부부가 말한 임신시켜놓고 도망간 양아치가 누구인지는 뻔했다.
게다가 산속에서 기억을 잃는 순간 초연이 불렀던 이름 역시 찬영이었다.
“제길.”
그녀에게 끌렸던 것도, 그녀의 흉터에 반응했던 것도.
모두 운명이 아닌, 잃어버린 기억 대신 몸이 기억한 것이었다.
그렇게 찾아낸 기억의 조각을 초연은 매번 그의 착각이거나 과민 반응이라고 딱 잘라냈다.
‘희귀한 병이지만 이 병이 반드시 유전병이 아니라는 사실은 민 이사님이 가장 잘 아시잖아요.’
‘행동을 당신 뜻대로 해석하는 것, 당신이 꿈에서 본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나에게 강요하는 것. 모두 상대방에게는 굉장히 실례되는 행동이에요.’
깜찍한 얼굴로 잘도 거짓말을…….
사진을 쥔 신후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
다음날 퇴근길.
초연은 빌라 앞 작은 공터 겸 공원에서 재윤을 만났다.
솔이를 놔두고 멀리 나갈 수도 없는 그녀를 배려해 재윤이 그녀의 집 근처로 오기로 한 것이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솔이 재윤 씨 온다니까 보고 싶다고 기다리다가 이제 막 잠들었어.”
“차가 좀 막혔어.”
“올라갈래? 솔이가 좋아할 텐데.”
“잔다며. 됐어. 나도 그냥 이것만 주고 갈게.”
재윤은 초연에게 커다란 한복 상자가 든 봉투를 건넸다.
마음 같아서는 그 역시 초연의 집에 들어가 초연이 어떻게 사는지도 보고, 솔이는 어떤지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지만 이젠 묻어야 할 마음이었다.
지난번 병원 앞에서 그가 초연에게 했던 청혼은 충동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품고 있던 진심이었다.
신후의 등장으로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찰나의 표정으로 재윤은 초연의 답을 들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한 당혹스러움, 미안함.
그리고 민 이사의 눈치를 보며 어쩔 줄 몰라하던 시선.
초연은 솔이의 치료를 위해 민 이사를 따라간다고 했지만, 재윤은 그것이 초연도 깨닫지 못한 그녀의 마음이라는 걸 깨달았다.
자신은 한 번도 초연의 마음에 들어간 적 없으며, 그 남자는 한 번도 초연의 사랑이 아닌 적 없음을.
“제대로 챙겨왔나 모르겠네.”
벤치에 앉은 초연이 비닐봉지에서 상자를 꺼내 내용물을 확인했다.
초연이 신후와 결혼하겠다고 말을 한 후 순례는 원단을 다시 사서 한복을 새로 지었다.
아무래도 한여름에 결혼할 손녀의 결혼식이 걱정된 모양이었다.
순례는 모시 원단으로 초연의 녹의홍상과 원삼, 신후의 바지저고리와 단령까지 모두 만들었다.
원단 자체도 찬기를 머금어 시원했지만, 안감을 따로 넣지 않은 덕에 그 전에 만들었던 한복보다 한결 가벼워졌다.
행여 얇은 원단에 원삼과 단령 아래 입은 한복이 비칠까, 전체적으로는 파스텔톤으로 한복을 만들었다.
구석구석 신경을 안 쓴 부분이 없었다.
그 덕에 옷은 환상적일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완성된 옷을 볼 때마다 초연은 가슴이 아팠다.
다른 한복 원단보다 모시 원단은 거칠다.
그래서 깨끼 바느질을 할 때도 더욱 힘이 든다.
간단한 옷이라도 원단을 꺾고, 자르고, 바느질하고 하는 동안 손가락은 만신창이가 된다.
몇십 년 바느질해서 단련된 순례의 손가락도 발갛게 달아오를 만큼 모시 바느질은 쉬운 게 아니었다.
한데 간단한 치마저고리도 아니고 혼례복 전체를 모시에 깨끼 바느질을 한 것이다.
오로지 결혼식 날 손녀가 조금이라도 불편할까봐 걱정돼서.
초연은 이 옷을 순례가 죽은 뒤 그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했다.
행여 초연이 보면 속상할까 보여주지도 못하면서도, 또 신후가 돌아가 초연이 결혼식을 제대로 치를지 모른다는 희망을 버리지 못한 채.
그렇게 수많은 밤 동안 순례의 희망과 아픔이 담긴 옷이었다.
“고마워. 맞아. 말한 거 다 있네. 내가 괜히 재윤 씨 번거롭게 했다.”
“번거롭기는. 안 그래도 서울에 학회 있어서 올라온 참이니까 부담스러워서 하지 마.”
“으응.”
초연이 옅게 웃음 지었다.
재윤과 대화를 하는 동안에도 초연의 머릿속은 신후뿐이었다.
이 옷을 신후에게 준다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하는 생각.
처음엔 그와 결혼을 한다면 이 옷을 꼭 입어야지 생각했다.
비록 할머니가 직접 보시지는 못하지만 하늘나라에서 둘의 결혼식을 보고 마음속 응어리가 풀리시길 바랐다.
하지만 이제 결혼은 영영 없다.
영원히 할머니에 대한 죄송스러움에 대해 속죄할 길이 없다. 마음이 아팠다.
동시에 신후에 대한 걱정으로 초연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자신이 떠난다고 말을 하면 분명 신후는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가뜩이나 회사 일로 힘들 텐데 자신이 그의 짐을 더 보태는 형국이었다.
그래서 이 옷을 선물로 주고 싶었다.
새로운 패션쇼 컨셉에 참고하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실은 그렇게 해서라도 할머니가 우리를 위해 만들어준 한복을 보여주고 싶었다.
“안색이 안 좋네. 무슨 일 있어? 혹시 솔이 검사 결과가 뭐 안 좋게 나왔어?”
“그런 거 아니야.”
“그러면. 혹시 그 민 이사 때문인 건가?”
재윤의 질문에 초연은 뜨끔했다.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솔이가 자기 자식이라는 거 알았어?”
“아니. 아직…….”
“언제까지 속일 셈이야. 이제 사실대로 말해야지.”
‘흐흑.’ 초연이 울컥했다.
영원히 그에게 진실을 말할 시간은 없다는 생각에 감정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북받쳤다.
예전에 그를 다시 만나기 전에는 그가 절대 솔이가 자기 아들임을 영원히 모르길 바랐지만, 이제 초연의 생각은 달라졌다.
그와 함께 가정을 이루고 솔이와 단란하게 살고 싶어졌다.
하지만 모두 물거품이 됐다.
영원히 두 사람이 모를 사실에 초연의 슬픔에는 죄스러움도 담겨있었다.
도저히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진실에 간신히 감정을 추스르던 초연이 재윤의 말에 무너졌다.
“왜 그래 초연 씨. 무슨 일 있어?”
재윤은 무너지는 초연에게 제 어깨를 빌려주었다.
여태껏 솔이를 키우면서도 한 번도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던 초연이었다.
그런 초연이 이렇게 구슬프게 울 줄은 몰랐다.
분명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 틀림없지만 그가 물어볼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괜찮아. 실컷 울어.”
재윤은 말없이 초연의 등만 다독거리며 그녀가 슬픔을 털어내길 기다렸다.
***
근처 차 안에서 핸들을 꽉 쥔 신후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어젯밤 신후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바쁘기도 했거니와 실은 집에 오면 초연을 어찌하게 될까 스스로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생각을 하며 초연이 자신에게 거짓말한 이유를 찾아 그녀를 이해해보려 애썼다.
하지만 이유는 쉽게 찾을 수 없었다.
한데 지금, 그 이유가 너무나도 쉽게 풀렸다.
초연이 그토록 자신을 모른 척하고 거짓 검사지까지 들이밀며 그가 진실을 알아채길 막아섰던 이유.
안재윤.
저 남자 때문이었다.
얼마나 좋길래 솔이에게서 아버지인 자신을 떼어내는가.
얼만 좋으면 자신의 청혼을 받고도 저 남자 품에서 저렇게 서럽게 우는 것인가.
얼마나 좋으면.
얼마나 사랑하면.
초연도 이제 자신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희망은 두 사람의 모습에 무참히 깨졌다.
재윤의 품에 안겨 우는 초연의 모습이 그의 가슴에 깊은 생채기를 냈다.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상처를 소금으로 문대는 것처럼 아렸지만 신후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두 사람을 지켜볼 뿐이었다.
***
재윤의 앞에서 한바탕 감정을 쏟아낸 후 초연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행여 잠에서 깬 솔이 펑펑 운 자신의 얼굴을 알아볼까 단지를 한 바퀴 돌고, 계단을 이용해 올라왔다.
집 앞에서 크게 숨을 들이켜며 호흡을 고른 다음 키패드에 손을 올릴 때였다.
“이제 옵니까?”
어두운 공간 속에 울려 퍼지는 중저음의 목소리에 초연이 깜짝 놀랐다.
어둠 속에서 한 걸음 나선 건 신후였다.
그제야 초연은 세차게 뛰는 가슴을 추슬렀다.
“언제 왔어요?”
“방금.”
대답하는 신후의 얼굴이 평소와는 어딘가 달랐다. 냉기가 쌩쌩 돌고 초췌했다.
하긴 회사에 일이 터졌는데 편할 리가 없지. 안쓰러움이 밀려왔다.
“밥은 먹었어요?”
“좀 차려줄래요?”
신후가 초연의 손목을 잡고 제 쪽으로 고개를 까딱했다.
제집으로 가자는 신호였다.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의 눈빛에 초연의 아랫배가 조여들었다.
초연은 당황함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고작 밥을 차려달라는 말에 제멋대로 반응하는 몸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신후의 시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얼마나 제가 싫으면.
이제야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싫습니까?”
다시 한번 채근하는 신후의 눈빛에 초연은 홀린 듯 대답했다.
“집에 먹을 것 없죠? 잠깐만 기다려요. 집에서 즉석밥이랑 먹을 것 좀 가져올게요.”
그가 배가 고프다잖아.
그리고 할 말도 있고.
어느새 초연은 스스로 핑곗거리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