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깊숙한 각인-48화 (48/84)

〈48〉

- 지금 〈K 병원〉에 있죠?

“네.”

자신이 병원에 있는 걸 지은이 어떻게 알았나 싶었다.

곧 지은의 친정아버지가 병원장으로 있는 병원이니 부친을 만나러 왔다가 자신을 봤나보다, 초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 잠깐 얘기 좀 해요.

“아이가 지금 검사 중이라서요.”

- 검사 종료되기 전에 끝내줄 테니 와요.

지은의 채근에 결국 초연은 병원 로비 1층의 카페로 갈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 만났을 때는 처음에 인자한 표정을 유지하려던 지은이였지만 이제는 그런 의지조차 없어 보였다.

“그날 잘 설명했고, 그쪽도 알아듣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요. 아니면 내 말을 귓등으로 듣고 넘겼거나.”

가시 같은 눈빛과 말투였지만 어쨌든 신후의 새어머니였다.

처음엔 그와 헤어질까 생각도 했지만 이젠 그녀가 신후가 아니면 안 되었다.

지은을 설득해 신후와 결혼하고 싶었다.

초연은 최대한 예의 바른 자세와 말투로 제 뜻을 밝혔다.

“그런 건 아닙니다. 예전에 찾아오신 얘기는 절대 안 할게요. 저도 신후 씨가 돌아가신 아버님 원망하고 사는 건 원치 않습니다.”

초연은 며칠 동안 지은이 제기했던 문제들을 해결할 방법을 찾았다.

지은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물론 이것으로 해결되지 않는 건 안다.

자신이 지은과 민 회장의 눈에 차지 않으리라는 건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 부분 역시 각오했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마음을 풀어드리겠다, 마음먹었다.

“그건 그쪽 입장이고. 땅속에 묻힌 민 이사 부친 심경은 생각해봤어요? 아마 지금 지하에서 가슴을 치고 있을걸요?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지은의 일갈에 초연은 입을 다물었다.

“회사에 그쪽이랑 사귄다는 소문 나고 회사가 어수선했다죠?”

“잘 마무리했습니다.”

“민 이사가 잘 마무리했겠죠. 근데 그게 언론이라면? 그때도 민 이사가 잘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사람들 개인적 일에 그렇게 관심 없잖아요.”

“관심 없다라……. 그건 당신 같은 보통 사람들 얘기죠. 재벌의 사생활에도 사람들이 관심 없을 것 같아요? 명품 옷 한 벌을 사 입어도, 해외로 골프 한번을 치러가도 다 뉴스가 나고 물어 뜯겨요. 주가는요? 그쪽 때문에 MJ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지고, 주가가 곤두박질치는 건 걱정 안 하는 건가요?”

날 선 지은의 눈빛에 초연이 울컥했다.

자신이 신후에 비해 부족한 건 맞지만 죄인은 아니지 않은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게 왜 잘못일까.

둘 사이의 솔이까지 부정하는 말 같아 초연의 목소리에 격한 감정이 묻어났다.

“아이가 아빠와 사는 것도 잘못은 아닙니다. 처음엔 시끄러울지언정 솔이가 실은 신후 씨 자식이라는 거 밝혀지면 대중들도 이해할 겁니다.”

“이해? 좋아요. 둘이 열렬한 사랑을 했고, 솔이를 낳았다고 언론에 밝히고 세상에 떳떳해지고 싶겠죠. 하지만 그렇게 사랑했다면서 애 버리고 6년 동안 들여다보지도 않은 민 이사 입장은요?”

“사고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면 되지 않을까요.”

지은이 코웃음을 쳤다.

“그쪽. 6년 동안 신후 사고 났던 거 기사 본 적 있어요?”

생각해보니 없었다.

그래서 6년간 신후가 고의로 자신들을 버렸다 생각했고, 처음 만났을 때도 솔이를 뺏으러 왔을까 놀랐었다.

“아니요…….”

“왜 없었을 거 같아요? 회장님이 다 막았어요. MJ의 차기 대표가 기억상실 당했다, 사람들이 이해할 것 같아요? 앞으로 두고두고 민 이사의 약점이 되어 물고 늘어질 겁니다. 민 이사를 그렇게 만들고 싶어요?”

초연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지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초연의 가슴을 쑤셨다.

초연도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누구보다 강한 힘을 가진 자리였다.

그러니 보통 사람들에게는 용서될 실수나 결함도 기업의 수장에게는 있어서 안 된다.

삐끗하면 그가 떨어질 낭떠러지는 그녀가 상상하는 이상의 것일 터였다.

초연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본 지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한 번 해봐요. 나도 내 자식 괴롭히는 사람 똑같이 되갚아 줄 거니까.”

지은의 마지막 쐐기에 초연의 눈이 불안하게 떨렸다.

“그게 무슨 말인지…….”

“지금 솔이 검사 늦어지고 있죠?”

“그걸 어떻게…….”

“이 병원이 저희 친정 거라는 사실. 잊었나 보네요.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한들 우리가 특정 혈액보유자 연결을 안 해주면 그만이죠.”

지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여사님!”

“당신이 당신 자식 소중한 만큼, 나도 내 자식 소중하니 해보자고요. 누가 이기는지.”

그녀의 절규에도 지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말이 제대로 초연의 가슴을 후벼팠다는 사실에 지은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올라갔다.

***

지은이 떠나고도 초연은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신후와 헤어지지 않으면 솔의 수혈을 확신할 수 없다는 지은의 말에 피가 차게 식었다.

이제 겨우 찾은 행복을 다시 놔야 한다는 생각에 숨이 턱턱 막혔다.

하지만 결과는 정해져 있다.

자신은 여자이기 전에 엄마였다.

멍하니 테이블에 앉아있는데 전화가 왔다.

초연은 애써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신후 씨.”

- 괜찮습니까?

걱정하는 듯한 신후의 목소리에 초연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가 혹시 자신이 지은과 만난 걸 알고 있을까.

- 끝났다는 말이 없어 병원에 전화해봤습니다. 아직 검사 중이라던데. 물어보니 그저 좀 더 자세히 검사하느라 늦는 거라고 하니 너무 신경 쓰지 마요.

신후의 말에 초연은 안도 대신 절망을 느꼈다.

신후조차도 병원 시스템은 어쩔 수 없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 차 보냈으니 솔이 검사 끝나면 그거 타고 집에 가요.

“괜찮아요.”

- 괜찮긴. 애 데리고 피곤할 텐데 고집부리지 말고.

“신후 씨는요? 일은 잘 해결됐어요?”

- 며칠 고생을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다른 곳에서 원단 공수하면 좋고, 정 안 되면 패션쇼 컨셉을 바꿔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미안합니다. 힘들게 염색한 원단들 버릴 수도 있게 만들어서.

“신후 씨가 그렇게 만든 거 아니잖아요. 너무 신경 쓰지 마요.”

어느새 신후는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그녀에게 해주었다.

예전에도 그랬다.

퇴근하고 오면 그날 있었던 일을 시시콜콜 말해줬다.

가끔은 자신에게 연락처를 주고 간 여자들 이야기까지 고스란히 전달했다.

그때마다 초연은 일부러 질투를 유발하는 거냐고 일부러 속을 숨기고 코웃음 쳤다.

생각해보니 질투를 유발하거나 그녀의 화를 부추기려는 게 아니었다.

그저 그녀에게 거짓 없이 진실하게 대했을 뿐이었다.

다시 만났을 때도 신후는 다른 생각 없이 그녀에게 직진했다.

그를 의심하고 마음을 열지 못한 한 건 그녀였다.

뒤늦은 후회가 몰려와 울컥했다.

- 위로해주는 겁니까?

마치 당신이 지금 나를 위로해주고 있다는 달콤한 말투에 목구멍에 무언가 걸린 것처럼 뜨끈했다.

- 좋네. 맨날 비난만 하는 사람들만 있었는데 이렇게 내 걱정해주는 사람 있어서.

목소리에 쓸쓸함과 다정함이 묻어났다. 그게 더 마음 시렸다.

보살펴주는 사람 없이 그 혼자 얼마나 외로웠을지.

가까이 있으면 안아주고 싶지만 이제 영원히 자신은 그를 안을 기회가 없을 것이다.

계속 말을 했다가는 울먹거리는 목소리에 걸릴 것만 같았다.

초연은 얼른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바쁠 텐데 전화 끊고 일해요.”

전화를 끊고 초연은 재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재윤 씨, 나야.”

- 초연 씨! 잘 지냈어? 솔이는 어때? 치료 잘 받고 있어?

“응. 오늘 병원에 검사받으러 왔어.”

- 잘됐네. 안 그래도 엊그제 초연 씨 꿈 꿔서 궁금하던 참이었는데. 근데 무슨 일이야?

“부탁할 게 있어서.”

헤어짐은 정해졌지만, 초연은 신후에게 마지막 선물을 하고 싶었다.

***

초연과의 전화를 끊고 난 신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두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책상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눈이 벌써부터 뜨끈하고 뻑뻑했다.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걸 어쩔 수 없다.

마치 사고 직후 한동안 그를 괴롭혔던 불안과 답답함이 다시 재발한 기분이었다.

시작은 어제 부산에서 이상한 가족을 만나고부터였다.

자신을 혐오스럽게 보던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잊은 상대방에 대한 미안함 때문일까.

하지만 자신이 가진 초연과 솔이를 잃고 싶지 않았다.

행여 자신의 과거가 드러나고 초연이 떠날까 서둘러 결혼 확답도 받고 싶었다.

그런데 하필…….

회사 일이 터져 대답을 들을 타이밍을 놓쳤다.

마치 자신과 초연의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것 같은 움직임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에 발길질이라도 하고 싶은 심경이었다.

게다가 회사일 역시 생각보다 상황이 나빴다.

보통 사고가 발생해도 여분의 원단을 생산하면 어떻게든 공수 가능한데 이번에는 시장에 원하는 원단이 싹 말랐다.

이 상태로는 패션쇼 컨셉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

오늘 같은 날, 초연도 불안할 테니 옆에서 같이 있어 주고 싶은데 어쩌다 이런 일이 터졌는지.

어서 일을 처리하고 집에 갈 생각에 메일을 쓰는데 강 비서가 방으로 들어섰다.

“아……. 저.”

“연락됐어?”

신후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강 비서에게 질문했다.

“아니요. 아직 연결이 안 됩니다.”

“지금 미주 공장 쪽으로 샘플 사진 보여주고 원단 찾아봐달라고 메일 보냈어. 확인하면 네 메일로 답 올 거야. 물건 있다 그러면 항공편으로 보내라고 하지 말고 사람 보내서 찾아와.”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동남아, 인도, 유럽, 미주. 어디서든 그 물건 풀리는지 파악해봐. 비싼 원단이니 다른 데 팔았어도 물건이 풀릴 거고, 아니면 어떻게든 팔려고 할 거야.”

분명 이상했다.

수출, 수입 일을 하다 보면 종종 사고가 발생하지만 이렇게 필요한 원단이 모두 증발하는 경우는 없었다.

시장에 원단이 부족해도 인맥이나 웃돈을 주면 원단을 구할 수 있었지만, 이번엔 불가능했다.

분명 누군가의 소행이 틀림없었다.

이번 패션쇼 컨셉은 바꾸더라도 범인은 찾아야 했다.

“네. 알겠습니다.”

대답하고도 강 비서는 방을 나서지 않았다.

그제야 신후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검정 서류철을 품에 안은 강 비서가 난처한 표정으로 신호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뭐야?”

“어제 맡기신 일. 연락 왔습니다.”

‘아.’ 신후가 반응했다.

부산에서 만났던 이상한 부부의 뒷조사 결과가 나온 모양이었다.

“그러면 그렇다고 말을 해야지.”

“이사님……. 아니, 형.”

서류철을 달라는 듯 손을 뻗었지만 강 비서는 망설일 뿐. 서류를 주지 않았다.

좋지 못한 신호였다.

특히 저 형이란 호칭.

그건 찬영이 신후에게 아부하거나, 신후의 기분이 가라앉을 때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찬영이 일부러 부르는 호칭이었다.

강 비서의 반응을 눈치챈 신후의 눈매가 확 굳었다.

“내놔.”

신후가 단번에 그의 품에서 서류를 뺏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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