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깊숙한 각인-47화 (47/84)

〈47〉

큰 키에 주름 하나 없이 완벽하게 피트 된 슈트.

그가 얼마나 완벽하고 꼼꼼한 성격인지를 여실히 드러냈다.

특히 방 안을 휘, 둘러보는 매서운 눈빛에 직원들은 일제히 움찔했다.

그는 등장만으로도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아닙니다. 회의 중에 가벼운 의견 충돌이 생겨서 조율 중이었습니다.”

박 팀장의 추종자 중 한 명이 나서서 대답했다.

말하는 동안 추종자에게 향했던 시선이 말이 끝나자 박 팀장에게 향했다.

“일에 관한 의견 충돌. 맞습니까?”

이미 어떤 상황인지 파악한 듯한 눈빛이었다.

그새 당황스러운 마음을 추스른 박 팀장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박 팀장은 초연이 싫었다.

자신의 의견에 반대 의견을 낸 것도 모자라 자식 문제까지 얽혔으니 좋을 리가 없었다.

행여 초연이 민 이사와의 친분을 이용해 자신의 인사고과에 영향을 미칠까 걱정되었다.

해서 눈엣가시 같은 초연을 밀어내고자 일부러 회사 내에 소문을 부추겼다.

민 이사가 여자에 눈이 멀어 자신을 공격했다, 소문나면 노조가 자신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리라.

“저희 모두 회사를 사랑하는 마음에 야근까지 무릅쓰고 일하는데. 회사가 사적인 이유로 바른 방향으로 나가지 못하면 저희도 걱정이 많습니다.”

박 팀장의 호소에 신후가 작게 코웃음을 쳤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눈치챌 정도는 아니었다.

“작년 제 이사 취임사 기억하십니까?”

“?”

“글로벌 시대에 〈MJ 인터내셔널〉을 세계적으로 키울 것을 약속하며 그때 한국적 미를 핵심 가치로 삼는다고 밝혔습니다.”

신후가 처음부터 임원으로 일한 건 아니었다.

회장의 손자로 바로 임원직으로 직행할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민 회장에게 고집을 부려 말단부터 시작했다.

앞으로 평생 일할 회사인데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일을 배워 가겠다는 의지였다.

처음에는 보여주기식이라거나 객기라던 사람들의 말이 무색하게 신후는 공장일까지 빼지 않고 섭렵했다.

그리고 누구보다 눈부신 성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참여하는 프로젝트마다 대박을 터트려 회사 주가도 수직 상승하게 만들었다.

회사 내, 외부에서도 아마 다른 회사에 입사했어도 누구보다 빠르게 임원을 달았을 거라고 평가했다.

해서 작년 이사로 취임할 때 직원들은 그의 말을 경청했다.

여태껏 목표를 세우면 달성하는 그였기에, 이사로서의 목표는 곧 회사가 이루게 될 목표였다.

“그리고 올해 신년사에서도 프쉬케 인수를 둘러싸고 국내 패션 사업부를 축소하는 거 아니냐는 논란에 대해 한국적 아름다움을 세계에 펼치기 위한 수단으로 프쉬케를 인수하는 것이지, 한국 패션 사업부를 축소할 생각 없다고도 말씀드렸습니다.”

박 팀장과 함께 초연을 비난하던 직원들이 신후의 시선에 뜨끔했다.

모두 그들이 함께 들었던 말들이었다.

“이번 오트 쿠튀르 참가에 대해서는 한국적 요소를 차용할 것이라 누누이 논의된 사항임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다른 의견을 제시한 건 박 팀장님이셨습니다.”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박 팀장에게 향했다.

신후가 프쉬케를 인수한 목적도 회사의 가치를 지키며 해외 명품 시장에 진입하기 위한 교두보로 삼은 것이기에 쇼를 그 출발점으로 한국적인 가치를 삼으리라는 건 누구보다 디자인 팀 사람들이 잘 알았다.

더는 명품 디자인 카피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자신들만의 디자인을 세계에 뽐낼 기회에 왔다는 생각에 직원들 역시 기대하고 프로젝트를 지켜보았다.

회식 자리에서 장난삼아 머리를 맞대고 패션쇼 디자인 컨셉을 잡은 것도 여러 번이었다.

한데 박 팀장이 신후의 의견에 반대했을 줄이야.

여태껏 신후가 여자에 빠져 박 팀장의 의견을 묵살한 것이라던 박 팀장의 말을 철석같이 믿던 직원들은 당황했다.

덩달아 자신의 속내가 까발려진 박 팀장 역시 어쩔 줄 몰라 했다.

“물론 박 팀장님 의견도 존중합니다. 세계적 대세와 대중성이라는 점도 중요하니까요. 하지만 패션 업계가 남들과 똑같은 제품만 만든다면 절대 1위가 될 수 없을 거라는 건 제가 처음 MJ에 들어오면서 했던 생각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너그러운 표정으로 말하던 신후가 입을 달싹이는 박 팀장의 말을 단번에 잘랐다. 송곳 같은 말투였다.

“박 팀장님께서는 좀 더 대중적인 패션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으니 이참에 미주 시장 쪽에서 일하시는 게 나을 것 같군요.”

원래 〈MJ 인터내셔널〉은 의류 제조 및 수출 기업이었다.

국내에 유명 브랜드도 갖고 있기는 했지만, 미국이나 유럽 쪽 브랜드 등의 디자인에 따라 제품을 제조 납품하거나, 유통업체들의 패션 브랜드 아웃소싱 전 분야를 담당했다.

특히 미국은 나라가 워낙 방대하니 유통업체들과도 이십사 시간 연락을 주고받아야 하는 빡빡한 지역이었다.

유배나 다름없는 결과에 박 팀장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신후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사양하지 마시죠. 인재를 적재적소에 등용하는 것도 관리자의 의무입니다.”

오히려 다른 직원들은 신후의 결정을 너그럽다 느꼈다.

여태껏 회사 일에 해를 끼치는 사람은 개국 공신이든, 최측근이든 거침없이 쳐내던 신후였다.

오히려 임원이면 아예 퇴직시킬 텐데, 그나마 관리자급이라 목숨은 남아있구나 여길 정도였다.

더는 신후에게 할 말이 없어진 직원들의 시선이 초연에게 향했다.

여자에게 휘둘리는 이사라는 소문은 잠재웠지만, 아직 약혼녀가 있는 남자를 빼앗은 여자라는 소문은 그대로였다.

언제 돌아온 것인지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규림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저, 저도 드릴 말씀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규림의 발언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쪽으로 향했다.

규림 역시 억울함을 쏟아내길. 그래서 여론이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돌아가길. 박 팀장은 간절한 시선으로 규림을 바라보았다.

“예전에 저희 아빠 회사가 어려울 때 회장님이 도와주신 인연으로 회장님이 저를 손녀딸처럼 예뻐해 주셨어요. 해서 약혼녀라고 소문이 난 것 같은데 민 이사님과 저, 아무 사이 아닙니다.”

규림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자존심에, 혹은 신후의 압력에 거짓말을 하는 것 아니냐는 눈빛들이었다.

“저, 남자친구 있어요.”

도저히 믿지 않을 수 없게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부끄러움 가득한 표정.

박 팀장과 그녀의 추종자들은 그제야 규림의 말이 모두 사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확실히 하고 넘어가죠.”

한결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타고 신후가 말했다.

“이초연 씨는 제가 오랫동안 구상했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중 만난 소중한 인연이니 다들 오해 풀고 잘 대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신후가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 모습에 사무실 안에 있던 직원들이 경악했다.

민 회장에게도 제 뜻은 굽히지 않는 대쪽같은 성격을 지녔다는 건 그들 역시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 신후가 여자 때문에 자신들에게 굽히고 들어왔다는 사실은, 직원들에게 가히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신후는 상관없었다.

자신이 허리까지 숙여 부탁하는데 적어도 앞으로 초연을 괴롭히는 사람은 없으리라, 계산한 행동이었다.

만일 누군가 다시 초연을 욕해도 그 상황을 껄끄러워하거나 감싸주는 사람도 많이 생길 것이다.

인사를 마친 신후가 나가고 박 팀장도 밖으로 뛰쳐나갔다.

박 팀장을 추종하던 세력들 역시 그녀를 뒤따라 나가고 사무실은 규림과 초연, 둘만 남았다.

초연은 규림을 쳐다보았다.

규림이 자신을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화장실에서 울 까닭이 없으니까.

자신을 위해 거짓말을 해준 규림에게 어떻게 고마움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저,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오해하시는 거예요.”

“?”

“아까 화장실에서 운 거. 저희 아빠 때문에 운 거예요.”

그 이후 규림은 초연이 몰랐던 이야기를 풀어갔다.

신후와는 이성적인 감정이 없었으며, 좋아한 적도 없고, 애인이 있다는 것 역시 사실이라는 것.

다만 〈MJ 인터내셔널〉과 사돈이 되고 싶어 하는 아버지의 추궁에 그동안 그녀 역시 약혼녀가 아니라고 강하게 말하고 다닐 수 없었다는 것.

그리고 아까 화장실에서는 자신의 애인을 못마땅해하는 아빠와 한바탕하느라 울었다는 것까지.

“아무래도 민 회장님께서 저희 아빠가 어려울 때 도와주셨고, 또 저를 예뻐해 주시니까 저 역시 마음대로 안 된다고 말씀드릴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어요.”

그제야 초연은 그동안의 일이 이해 갔다.

성식은 혈우병 D형을 앓고 있는 신후에게 바로 수혈해줄 수 있는 규림을 손주 며느리로 삼고 싶으셨을 것이다.

규림은 집안에 도움을 받은 게 있으니 쉽게 거절할 수 없고.

“근데 이번에 민 이사님이 아버지를 찾아뵙고 말씀드렸어요. 오해하게 만들어서 죄송하다고. 회장님과 저희 아버지가 원하는 인연은 못 잇겠지만 그래도 계속 관심을 가지고 회사를 도와주겠다고.”

오히려 자신은 그동안 신후가 무서웠노라고, 두 분 잘 어울리신다고 이야기를 해주는 규림 덕분에 초연의 마음 역시 후련해졌다.

***

초연은 검사실 앞 대기 의자에 신후와 나란히 앉아 솔이의 검사가 끝나길 기다렸다.

별거 아닌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괜히 손끝이 시려 무릎 위에 올려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솔이가 들어간 검사실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 제 손을 덮는 따뜻한 손길에 초연이 놀랐다.

검사실에 시선을 둔 채 언제 본 것인지 신후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손을 녹이려 잡은 것이다.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손등을 덮고, 엄지로 천천히 손바닥을 쓸었다.

그저 손을 따뜻하게 해주려는 움직임에 온몸이 간질간질해지고 배꼽 아래 열기가 모여들었다.

행여 솔이가 나오다 볼까. 잡힌 손을 빼려는데 신후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아다가 제 무릎 위에 놓고 만지작거렸다.

“솔이한테는 언제 말할 생각입니까? 전화 정도는 마음 편히 하고 싶은데.”

규림의 이야기에 초연은 신후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실히 깨달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신후의 따뜻한 시선에 가슴 한쪽이 자꾸 두근거렸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아직 남은 일이 있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야만 했다.

행여 그가 오해하면 어쩌지? 화를 내면? 그렇다고 헤어지자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지? 조금 화를 내다가 받아줄 거야.

여태껏 그를 밀어내기만 했는데 그의 처분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되자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다. 두려움과 기대가 뒤섞인.

“결혼하고 말할 건가? 결혼식 얼마 안 남았는데 빨리 말하는 게 좋을걸요. 결혼식 당일에 솔이 당황하게 만들 생각 아니라면.”

“신후 씨…….”

주저하는 초연의 목소리에 그제야 신후가 고개를 돌려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프러포즈가 없어서 쉽게 허락을 안 해주나.”

웃는 눈매가 보기 좋게 휘었다.

“허락 좀 먼저 해줘요. 프러포즈는 평생 질리도록 해줄 테니.”

“그게 아니라……. 할 말이 있어요.”

그녀의 말에 신후가 가만히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차분히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를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해요, 지금.”

“그게…….”

가볍게 재촉하는 그를 보며 마지막 용기를 짜내는데 전화가 왔다.

‘잠시만.’ 눈짓으로 양해를 구한 신후가 전화를 받았다. 강 비서였다.

- 이사님 큰일 났습니다. 지금 동남아 쪽에서 오기로 한 패션쇼 원단들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강 비서가 말하는 원단들은 오트 쿠튀르 쇼에 사용할 원단들이었다.

발해 시대의 컨셉으로 진행하는데 현재 한국에서는 당시의 원단을 직조하는 곳이 없었다.

해서 찾고 찾은 게 동남아 공장이었다.

만일 원단 수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쇼의 참가 자체가 불투명해진다.

“무슨 문제?”

- 물건이 중간에서 사라졌어요! 분명 컨테이너에 싣는다는 것까지 메일 주고받았다는데 컨테이너도, 업체도 사라졌습니다.

“다른 쪽 공장들은. 컨택해봤어?”

- 누가 이미 물건들 싹쓸이한 모양이에요. 내년까지는 줄 물건들 없대요.

“알았어. 내가 지금 회사로 갈게.”

전화를 끊은 신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에요.”

“원단 수급에 문제가 생겼다네요.”

“어떡해.”

그녀도 참여하는 프로젝트였고, 무엇보다 신후가 맡은 프로젝트였다.

이미 그의 일이 그녀의 일이 된 초연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이 작은 머리 터지겠네.’ 신후가 중얼거리며 초연의 머리를 커다란 손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회사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당신은 솔이 걱정만 해요.”

신후의 눈빛에는 어떠한 불안감도 없었다.

이번 일 또한 잘 해결할 거라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의 흔들림 없는 눈빛에 초연 또한 마음이 진정됐다.

“알았어요. 이따가 상황 봐서 전화해 줘요.”

그렇게 신후가 떠나고 초연은 홀로 남아 솔이를 기다렸다.

의사가 말한 검사 시간보다 조금 더 길어지고 있었다.

수술도 아닌데 검사가 시간이 길어질 일이 뭐가 있을까.

불안함을 누르며 기다리는데 전화가 왔다.

지은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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