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전화를 끊은 신후는 핸드폰으로 회사 익명 게시판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그가 예상한 대로 회사 내 소문이 쫙 퍼진 상태였다.
예상과 다른 점이 있다면, 생각보다 빨리 퍼졌다는 것.
마음 같아서는 당장 서울로 올라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일까지 프랑스 손님들 접대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들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거야?”
차에 기댄 채 팔짱을 낀 신후가 투덜거렸다.
오늘 신후는 프랑스 손님들을 데리고 부산 영화의 거리 투어를 하는 중이었다.
신후는 부산을 아시아 패션의 메카로 삼고, 국제적인 패션쇼를 만들려고 계획 중이었다.
현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서울도 괜찮지만, 좀 더 풍토적이고, 휴양 도시 느낌을 풍기는 부산이 그가 추구하는 패션 방향과 더 맞았다.
그래서 프랑스 프쉬케의 직원들과 오트 쿠튀르 패션 주최 측에 이러한 계획을 브리핑했다.
생각보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잡혀 있던 부산 투어를 포기하고, 몇 시간 동안 영화의 거리를 돌며 사전 답사를 진행했다.
강 비서에게 부탁해 영화제 조직위원회와의 미팅도 급작스럽게 잡았다.
그리고는 두 시간이 넘도록 영화제와 패션쇼를 결합하는 방식에 토론을 벌이는 중이었다.
처음엔 토론에 참석했던 신후도 중구난방 이어지는 회의에 슬쩍 나와 초연에게 전화를 하며 휴식 시간을 가진 것이다.
어차피 실무진과 통역사들은 안에 있으니 그 하나 잠깐 빠진다고 티 나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미 프랑스에서 열리는 오트 쿠튀르 패션쇼 관련 컨셉과 진행 상황 등, 본래의 목적은 달성한 터라 어느 정도 마음을 놓은 상황이기도 했다.
“이사님이 괜히 침 나올 만한 떡밥을 던져서 그런 거 아닙니까. 괜히 제 일만 많아졌습니다.”
갑자기 투어 일정을 짜고, 영화제 조직 위원회와 미팅을 잡느라 동분서주했던 강 비서가 그의 옆으로 다가와 투덜거렸다.
“이번 프로젝트 끝나면 한 며칠 휴가 줄게.”
“정말입니까?”
당분이 떨어졌다며 편의점에서 사 온 바나나 단지 우유를 쪽쪽 빨던 강 비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공증 남겨?”
“됐습니다. 대신 저녁에 광안리 쪽 가서 바다 보면서 회 한 접시에 소주 한잔 어떠십니까?”
“소주?”
“여기까지 와서 회 한 접시 못 먹고 서울로 올라가려니 억울해서 그럽니다.”
대학 후배인 강 비서는 일할 때 보면 종종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
그럼에도 신후가 강 비서를 버리지 못하는 건 이런 붙임성 좋은 성격 때문이었다.
요즘 강 비서에게 너무 빡빡하게 군 것 같아 신후 역시 미안하긴 했다.
“좋아. 근데 밤공기 찬데 왜 밖에서 마시려고. 내가 살 테니 좋은 데 골라.”
지금도 골이 지끈거리는 바다 냄새를 밤까지 맡고 싶지 않았다.
항상 신후의 조각난 꿈속에 공통으로 등장했던 게 바닷가의 짠 소금 내음이었다.
흐릿한 장면. 하지만 선명한 냄새.
소금기 가득한 바다 냄새는 항상 무언가를 놓친 듯 그를 답답하고 패배감이 들게 만들었다.
더는 과거에 연연하지 않기로 한 이상, 이 냄새에 미련 따위도 두고 싶지 않았다.
“아뇨. 그런 거 말고요. 광안리가 헌팅의 메카라고 하던데…….”
“그러면 혼자 가. 카드는 줄게.”
차라리 초연과 전화 한 번을 더 하지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건네는데 강 비서가 극구 거부했다.
“저 혼자 무슨 헌팅을 합니까? 게다가 민 이사님, 아니 선배님이 가셔야 헌팅도 잘되죠.”
“나 여자 있다는 걸 깜박하고 헛소리를 하는 거지, 지금?”
“결혼도 아직 안 하셨는데 그렇게 빡빡하게 구실 게 뭐가 있습니까? 그리고 결혼하시면 어차피 가정에 얽매이는데 지금 노셔야죠.”
강 비서의 의도는 뻔했다.
대학 시절부터 미팅이나 어디 놀러 갈 일이 있으면 강 비서는 꼭 신후를 데리고 다녔다.
신후도 처음엔 그저 좋아하는 선배로 강 비서가 자신을 데리고 가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신후가 끼면 여자들이 잘 붙으니 미끼 삼아 데리고 다니는 거였다.
괜히 또 강 비서의 꼬임에 넘어갔다가 초연과의 관계에 악영향을 미칠까. 어이가 없었다.
“좆은 순결한데 대가리만 음란하네, 이 새끼. 니가 그러니까 여자를 못 만나는 거야. 아니다. 너 나중에 결혼한다고 하면 내가 나서서 말린다.”
눈을 부라리는 신후를 보며 강 비서가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선순환과 악순환을 아십니까? 선배야 가만있어도 여자들이 들러붙으니 여자에 목말라 할 필요가 없죠. 저는 결혼하고 싶어 죽겠는데 여자가 없는데 어쩌란 말입니까, 여자가. 이렇게라도 노력해서 여자를 만나야 그중에 결혼하고 싶은 여자를 찾죠.”
꽤 불쌍한 표정을 짓는 게 가증스러웠다.
다시 이십 대 초반으로 돌아간 듯, 둘이 가볍게 권투 동작을 흉내 내며 투덕거릴 때였다.
“가가 가 아이가?”
“누군데예?”
육십 대 정도로 보이는 부부와 초연 또래의 여자 한 명이었다.
처음엔 그저 지나가던 사람들의 대화라고만 생각했다.
“와, 그 순례 할매네 집에 있던 양아치 새끼 있다 아이가.”
“아아. 그 얼라 임신시키고 토낀?”
“맞다.”
“맞나? 하이고마. 신수가 천지삐까리 좋아지서 몰라봤네예.”
저를 연신 훑어내리는 시선을 신후는 무시할 수 없었다.
혹시 어쩌면 잃어버린 시간의 단서를 가진 사람일지도 모른다.
신후는 성큼성큼 그들이 있는 파라솔 쪽으로 갔다.
190cm에 가까운 그가 그들 앞에 서자 그들 전체에 그늘이 졌다.
“절 아십니까?”
신후에게는 그저 단순한 질문이었지만 그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워낙 덩치가 큰 탓도 있지만, 날카로운 눈매, 흐트러짐 없는 차림과 자세가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신후에게 압도당해 얼어붙은 세 사람 중 그나마 빨리 정신을 차린 건 중년의 남자였다.
“그 짝이 우리를 모리는데 우리가 그 짝을 우예 아노?”
“맞심더. 우리가 그 짝을 우째 안다꼬. 가입시더.”
이번엔 나이든 여자가 먼저 일어나며 남은 두 사람에게 가자고 재촉했다.
그리고 세 사람은 순식간에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정말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허둥지둥 자리를 피할 이유는 없다.
세 사람의 뒤를 쫓는 신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강 비서 저 사람들 뒷조사해봐.”
“저 사람들이요?”
“어느 마을에 사는지. 저 사람들이 말하는 순례 할매가 누구인지.”
대화 중 아이를 임신시키고 도망쳤다는 말이 걸렸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설마 그럴 리 없다는 생각과 그럼에도 확신에 차 자신을 경멸하듯 보던 세 사람의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이사님. 어디서 닮은 사람 보고 착각하는 거 같은데. 저쪽에서 말하는 건 양아치 아닙니까. 근데 왜 이사님이.”
“빠른 시일 내에 결과 가져와.”
***
다음날이 되니 소문은 더욱 일파만파로 퍼졌다.
어제는 열에 세 명쯤 힐끗거리던 사람들이 이제는 초연이 지나가면 열에 여덟이 위아래로 훑었다.
숨이 막히는 느낌에 초연은 점심도 포기하고 화장실로 몸을 피했다.
사람들이 없는 곳이 필요했다.
변기 뚜껑을 내리고 앉아 눈을 감고 쉬었다.
아직 점심시간인데 몸은 종일 염색한 것처럼 피곤했다.
하지만 계속 여기에 있을 수는 없었다.
오후에 한두 시간이라도 일찍 퇴근하려면 일을 마무리해야 했다.
다행히 일은 순조로웠다.
패션쇼 컨셉은 프쉬케 측과의 회의에서 통과되었기에 초연은 기존 발해 복식의 염색 재현에만 신경을 쓰면 되었다.
회사 차원에서는 그녀의 일손을 도울 사람들을 붙여주었다.
본사 맨 위층에 연구실도 마련해주었다.
청도에서 본사까지 제 작업실을 전부 옮겨온 것 같은 연구실의 모습에 초연은 말문이 막혔다.
이 정도로 지원을 해주는데 회사에서 원하는 만큼의 결과를 만들어내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싫다고 느낄 정도의 압박은 아니었다.
오기가 생기는, 동기 부여 수준이었다.
초연이 문고리를 열고 나가려는데 바깥에서 우르르 사람들이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민 이사님이 그 염색 아들 체육 대회에 갔다며?”
“말도 마요. 얼마나 유세를 떨던지.”
문을 열려던 초연이 그대로 멈춰섰다.
박 팀장과 그녀와 친하게 지내는 다른 팀 무리였다.
“애 아빠는 없어? 이혼?”
“모르죠 뭐. 이혼인지, 사별인지. 근데 애 성도 이 씨더라고요.”
“그러면 미혼모?”
“제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관심도 없어요. 그냥 괜히 회사 안에서 분란만 안 일으켰으면 좋겠네요.”
“박 팀장 고생 많네.”
“근데 그 여자 민 이사님한테 박 팀장님 이상하게 말해서 상황 이상하게 만드는 거 아니에요?”
“벌써 낌새는 있지. 그 디자인 컨셉도 염색이 하자는 말대로 했다며?”
“실무도 안 한 사람 말을 철석같이 따르고. 정말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려고 하는지 걱정이 많아요.”
“나중에 혹시 불합리한 일 당하면 저희가 나서서 도와드릴게요.”
“고마워 자기.”
이미 체육 대회에 있던 일이 회사 내에 다 퍼진 모양이었다.
게다가 패션쇼 컨셉 건으로 박 팀장과 빚었던 마찰이 교묘하게 왜곡된 상태였다.
하지만 초연은 선뜻 나서서 설명할 수 없었다.
괜히 나갔다가 상황만 더 어색해질 뿐이었다.
“근데 그 여자. 안 그렇게 생겼는데 참 나……. 기가 막히네요.”
“안 그러게 생기긴. 남녀 사이 밤일을 누가 안다고.”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부뚜막 올라가는 재주가 아주 탁월한가 보죠.”
‘야옹.’ 고양이 흉내를 내는 박 팀장의 목소리에 다른 두 여자가 까르르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바늘이 되어 초연의 가슴을 쿡쿡 쑤셨다.
“그나저나 그 디자인실 김규림 실장 어떡해?”
“회장님이 찍어준 결혼 상대 아니에요?”
규림의 이야기에 초연은 철렁했다.
자신만 생각하느라 규림이 받을 상처는 생각 못 했다.
이미 회사에 신후의 약혼녀로 소문이 나 있을 텐데 괜히 자신이 끼어들어 상황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신후가 아무리 마음이 없다고 했더라도, 자신도 손 놓고 있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이 모든 게 제 잘못인 거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애도 있는 여자가 처녀 혼사 꿰차고 들어갔네.”
“대단하다, 대단해.”
곧이어 물소리가 들리고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나갔다.
사람들이 화장실을 나가고도 초연은 한참 동안 칸에 머물다가 밖으로 나갔다.
그때였다.
동시에 옆 칸의 문이 열렸다.
울었는지 빨개진 눈의 규림이었다. 초연을 발견한 규림 역시 화들짝 놀라 멈칫했다.
규림 역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안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김 팀장님. 저희 얘기 좀…….”
“죄송합니다.”
후다닥 화장실을 뛰쳐나가는 규림을 초연은 잡을 수 없었다.
***
오후 시간. 초연은 디자인 팀과 미팅에 참석했다.
그녀의 염색 원단과 털이 디자인 컨셉과 맞는지, 수정할 것은 없는지. 의견을 나누는 자리였다.
그녀가 그동안 염색했던 원단과 인조 모피를 한아름 들고 디자인실로 갔다.
규림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대신 박 팀장과 찬바람이 가득한 열 개의 눈이 그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초연은 타원형의 흰색 테이블 위에 염색 샘플들을 조심스레 올려두었다.
지난 일주일간 그녀가 손이 아리도록 염색한 천들이었다.
“지난번 말씀하신 대로 톤을 조금 내려봤습니다.”
테이블 가장 중앙에 앉은 박 팀장이 심드렁한 얼굴로 원단을 헤집었다.
“저희가 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
“어차피 민 이사님이 통과시키면 그대로 만들어야 할 텐데. 그냥 이초연 씨가 만든 원단에 맞춰 저희가 디자인을 하죠.”
비아냥대는 목소리에 초연이 울컥했다.
다른 건 몰라도 염색만큼은 온 정성을 다해 만드는 초연이었다.
그저 자신을 살려준 이범규 장인 밑에서 어쩌다 배운 기술이 아니었다.
처음엔 이범규 노인에게 은혜도 갚을 겸, 고된 염색 일을 하며 잡생각을 비우기 위한 시작이었다.
하지만 염색일을 하면서 초연은 점점 염색 자체에 빠졌다.
오랜 시간 삭혀 고운 빛깔을 만들어내는 재료들을 보며 자신의 상처도 삭히고 삭혀져 아름다운 빛깔이 되길 바랐다.
마침내 시간과 정성, 노동 끝에 자연과 우연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을 보며 자신의 인생을 스쳐 지나간 수많은 우연들도 결국 아름답게 남길 간절히 바랐다.
염색은 그녀에게 위로였고, 자식이었다.
그런 염색물에 대해 낮잡아보는 박 팀장의 태도를 참기 어려웠다.
“박 팀장님. 이건 지난번 팀장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디자인 컨셉에 맞춰 톤을 내린 겁니다.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열 번, 백 번이라도 수정하겠습니다. 지금 박 팀장님 태도 큰 프로젝트를 맡으신 분의 처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태도입니다.”
“뭐예요? 지금 제가 괜한 꼬투리라도 잡는다는 말씀이신 건가요? 이초연 씨야말로 지금 외부인이 너무 주제 넘는다는 생각 안 하십니까?”
답답함에 초연은 머리를 쓸어올렸다.
자기 일에 대한 불만이 아닌 사생활에 대한 비아냥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더욱 낮잡아보고 몰아대는 게 사람이었다.
7년 전 면접을 볼 때 자신을 무시하던 박 팀장의 모습과 겹쳐졌다.
그때는 당할 이유가 아닌데도 당했지만, 이제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지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소란스럽습니까.”
신후의 등장에 디자인실에 있던 모두가 일순간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