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 네가 거길 왜 가?!
다짜고짜 귀를 때리는 성식의 목소리에 신후는 전화기를 귀에서 한 뼘 정도 떼었다.
“그러면 할아버지께서는 왜 강 비서를 보내려고 하신 겁니까?”
- 내, 내 생명 살려준 아이한테 모질게 군 것 같아 사과하려고 그랬다. 그 정도도 못 하더냐?
당황한 듯 더듬거리는 성식의 목소리에 신후가 코웃음을 쳤다.
이미 성식이 솔이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건 신후 역시 알고 있다.
이상하게 그 집 사람들이 민씨 사람들을 홀리는 게 있지.
“목숨값을 치르실 생각이시면 어린이집 책 기증으로 끝내셨어야죠.”
일단은 성식이 초연과 솔이를 받아들일 때까지 솔이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노인네가 재롱은 보고 싶고, 손주는 안되고. 누구 마음대로란 생각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괜히 엄한 사람 갖다 붙였다가 나중에 두고두고 뒷말 들을 거 생각 못 하셨습니까? 혹시 초연 씨와 찬영이 회사에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길 바라신 거 아닙니까?”
- 뭐라고?
“그렇지 않고서야 회사에 소문이 날 게 뻔한데 왜 찬영이더러 체육대회 가라고 하셨습니까?”
통화하는 신후의 시선이 옆자리에 앉은 찬영에게 향했다.
동시에 찬영이 움찔하며 차 문 쪽으로 바짝 붙었다.
안 그래도 요즘 시시때때로 자신을 쳐다보는 신후의 냉기 어린 표정에 죽을 맛인데.
저를 죽일 듯이 쳐다보는 눈빛에 울고만 싶어졌다.
“네 이놈!”
성식의 목소리가 그의 서재 밖 거실에까지 들릴 정도로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신후가 솔이의 체육대회에 참가했다는 소식에 성식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이놈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생각지도 않는구나.
어쩌면 소문나길 원해서 거길 일부러 찾아간 거구나!
신후에게 당했다는 생각에 화가 머리끝까지 오르는 걸 참고 간신히 전화를 걸었다.
그래도 솔이를 위한 마음이었을 테니 어느 정도는 이해해 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초연에게 더러운 소문이나 붙여 떨어뜨리려는 노인네로 취급하는 신후의 말에 성식은 도저히 화를 참을 수 없었다.
“그러면 너는. 회사에 소문이 나도 괜찮고?”
- 소문나는 게 두려웠다면 그 여자 서울까지 데리고 오지도 않았습니다.
뻔뻔한 신후의 말에 성식이 뒷목을 잡았다.
‘회장님.’ 옆에서 지켜보는 비서가 성식을 부축하기 위해 다가왔다.
볼썽사나운 집안싸움을 고용인에게 보여주는 것도 부끄럽다.
휘휘 나가라는 시늉을 하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네가 정말 여자에 미친 게 틀림없는 모양이로구나. 그깟 사랑이 뭐길래 목숨을 걸고 사랑을 해, 사랑을!”
비서가 나가려 문을 열자, 문밖에는 다과상을 든 지은이 서 있었다.
지은의 조용히 하란 시늉에 비서는 마지못해 식사하러 주방으로 가고, 지은은 열린 틈 사이로 성식과 신후의 대화를 들었다.
- 제 목숨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미리 말씀드리는데 회사 가지고 협상할 생각 하지도 마십시오.
“내가 내 회사를 어떻게 하든 말든 네놈이 뭔데 욕심을 부려?”
- 할아버지께서 만드신 회사지만 제가 이만큼 키운 회사입니다. 과연 주주들이 어떤 선택을 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괜히 주가 떨어뜨릴 행동 하지 마십시오.
“이이이! 이 독한 놈! 하나도 양보를 안 하는구나, 하나도!”
길길이 날뛰는 성식을 보며 지은은 다과상을 지나가던 고용인에게 맡기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바로 동생인 지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 상무. 나야.”
- 어이, 누님.
기억을 찾지도 않았는데 신후는 초연에게 집착하고 있다.
저러다가 기억이라도 찾으면. 끔찍했다.
조금씩 그때 일이 드러나는 것 같아 미칠 것 같은데 동생의 천하태평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짜증이 확 치솟았다.
좋은 목소리가 나올 리 없었다.
“얘는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껄렁거려. 그러니까 신후가 너를 만만하게 보는 거 아냐. 왜 네가 프랑스까지 가서 해결한 일 신후가 제멋대로 바꾸는데 회장님과 주주들에게 제대로 어필을 못 해?!”
망할 자식.
어릴 때부터 아들이라고 아버지가 오냐오냐 키웠을 뿐. 지명은 영 쓸데없는 동생이었다.
그나마 지후가 클 때까지 〈MJ 인터내셔널〉에서 한 자리 잡고 신후를 견제하라고 보내놨더니 제가 할 일이 뭔지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가 따로 없다.
- 왜 또 전화하자마자 그러슈? 뭐가 또 누나 심기를 건드렸는데.
“이번에 프랑스 쪽에서 사람들 왔다며.”
- 집에 있으면서 소식 참 빨라.
“프랑스 진출까지 신후가 성공하면 네가 그렇게 지금처럼 여유롭게 살 수 있을 거 같아?”
- 그게 무슨 말이야. 민 이사가 무슨 말 해? 나 내쫓는데?
“너는 머리가 없어? 여태껏 신후가 네가 좋아서 그 자리에 놔둔 것 같니?”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수화기 너머가 조용했다.
지은은 화를 누그러뜨리며 조곤조곤 설명했다.
“내가 이 집에서 쫓겨나면, 그래도 네가 한가롭게 골프나 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아?”
자신이 이 집에서 쫓겨나면 너 역시 국물도 없다는 사실을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 그럼 어떡하라고?
“뭐라도 해야지. 신후가 승승장구하지 못하도록. 회장님의 신임이 사라지도록. 주주들이 차기 대표로 민신후를 못 밀도록!”
코앞까지 닥친 불안함에 지은이 정 상무를 들들 볶았다.
***
토요일 아침. 그녀가 잠에서 깼을 때 신후는 없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지만, 곧 침대 테이블 옆에 남긴 신후의 메모와 카드 한 장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마음에 드는 거로 사요. 이왕이면 몇 개 더.]
간결한 글씨로 써 내려간 음란한 마음이 퍽 심장을 간질간질하게 했다.
초연은 이불과 함께 무릎을 끌어안고 한동안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어제와 같은 하늘이지만 같은 하늘이 아니었다.
어제보다 더욱.
그녀의 가슴을 두근두근 벅차오르게 하는 하늘이었다.
***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출근하자마자 초연은 회사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했다.
수천 명이 근무하는 회사였지만 관련 부서가 아니면 여태껏 그녀에게 관심 두는 사람은 없었다.
한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어린이집에 솔이를 데려다주고 걸어오는 길에서부터 자리에 앉을 때까지 그녀를 훑는 시선들이 있었다.
혹시 자신의 과민 반응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디자인 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이 도착하니 허둥지둥 흩어지는 걸 보고 무언가 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금요일, 체육 대회에 신후가 왔던 게 회사 전체에 소문이 난 상태였다.
그저 회사 임원의 방문 정도로 넘어갔으면 좋겠다, 싶던 바람은 깨진 지 오래였다.
자신을 보고 쑤군대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이런 상황에 자신이 나서 해명을 하기도 우스웠다.
초연은 최대한 티를 내지 않았다.
점심시간, 초연은 구내식당이 아닌 근처 상가의 분식집으로 갔다.
종일 자신을 훑던 시선들로부터 피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점심시간이었고, 회사 근처 상가였다.
당연히 회사 직원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초연은 할 수 없이 분식집 가장 구석 자리에서 냉콩국수 하나를 주문했다.
두어 젓가락 떴을 때 즈음, 신후에게서 전화가 왔다.
주말에도 신후와 몇 번 연락을 주고받기는 했다.
행여 솔이가 눈치챌까 짧은 통화와 문자 정도였다.
지금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좁은 공간에 테이블이 다닥다닥 붙은 분식집은 차라리 회사 구내식당이 나을 정도였다.
초연은 최대한 핸드폰을 귀에 붙이고 볼륨을 줄였다.
- 뭐 합니까?
평상시보다 조금 경쾌한 톤이었다. 주말 내내 그랬다.
솔이가 있기에 친밀한 이야기는 어려웠다.
회사 프로젝트 이야기가 주로 이어졌고, 식사 때에는 기껏 메뉴 이야기였다.
별말이 아닌데도 그와 통화를 하다 보면 마치 예전 연애를 할 때로 돌아간 것처럼 가슴이 근질거렸다.
은근한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불러올 때면 당혹스럽게도 아래가 젖었다.
7년 전의 딱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행여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 통화 하는 사람이 신후임을 눈치챌까. 초연은 두려웠다.
“밥 먹어요.”
젓가락질하며 대답하는 초연의 어깨가 자꾸 움츠러들었다.
수화기 너머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 무슨 반찬 먹는지 물어봐야 합니까?
대화를 이어가려는 의지가 느껴지지 않는 간결한 대답에 대한 그 나름의 불만 표현이었다.
초연은 신후와의 통화가 길어지다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까 봐, 얼른 통화를 마무리하고 싶었다.
“바쁘실 텐데 이런 일에 일일이 신경 안 쓰셔도 돼요.”
또다시 침묵이 이어지고,
- 무슨 일 있습니까?
조금 전과는 달리 가라앉은 신후의 목소리에 초연은 뜨끔했다.
“아니요.”
- 박 팀장이 체육 대회 일로 뭐라고 했습니까?
초연은 움찔했다.
예전부터 눈치가 빨랐던 신후였다.
만약 지금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하는 상태라면 분명 그녀의 기분을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목소리만 듣는 상황이니 속일 수 있으리라.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 거 아니에요. 민…….”
그녀의 입에서 ‘민’자가 나오자마자 주변이 조용해졌다. 초연은 아차 싶었다.
호칭을 빼고 둘러댔다.
“점심 메뉴로 콩국수를 골랐는데 오랜만이라 그런지 맛있어서 정신을 놨네요. 미안해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가볍게 넘어가는 신후의 목소리에 초연은 숨죽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 미안하면 솔이 병원은 내일 나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요. 아마 네 시 정도면 도착할 겁니다.
내일은 솔이 첫 번째 검사가 있는 날이었다.
병원 방문은 오후 예약으로 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가뜩이나 체육 대회 일로 회사에 자신과 신후에 대한 소문이 파다한데 병원까지 같이 갈 수는 없었다.
신후의 외가가 하는 병원이라 〈MJ 인터내셔널〉 지정 병원이기에 병원에서 회사 사람을 마주치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럴 필요 없어요.”
- 이초연 씨.
신후가 나지막이 그녀를 불렀다.
그저 이름 석 자 불리는 것인데도 죄를 지은 사람처럼 뜨끔했다.
마치 벌 받는 사람처럼 젓가락을 들지도, 내려놓지도 못하는 사이 수화기 너머 신후가 말을 이었다.
- 처음부터 다시 합니까, 우리?
은근히 원망하는 목소리에 초연은 아랫입술을 감쳐 물었다.
어차피 그와 함께하기로 한 이상, 회사에 소문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신후에게 말하고, 신후가 모든 일을 받아들인 후 차례대로 일이 풀리는 건 그녀만의 욕심인지도 모른다.
“알았어요. 내일 함께 가요.”
초연은 자신의 마음을 다시 한번 다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