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아니야, 엄마.”
솔이 그녀의 손을 잡고 사람들이 없는 쪽으로 이끌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초연이 이번엔 신후를 추궁했다.
“무슨 일이에요?”
신후는 다시 무릎을 굽히고 솔이와 눈을 마주쳤다.
“영원한 비밀은 없어. 지금이 나을까, 나중에 아시는 게 나을까.”
여전히 초연은 알아듣지 못하는 말만 하는 두 남자의 분위기는 사뭇 진지했다.
“나머지는 아저씨가 잘 설명할게. 이민솔. 경기 참가할 거지?”
신후의 제안에 조금 망설이던 솔이는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종종걸음으로 체육관 한가운데로 나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앉아서 얘기합시다. 솔이가 이렇게 마음 놓고 뛰는 거 처음 아닙니까?”
신후가 그녀를 의자에 앉히고 자신도 그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제야 초연은 솔이 경기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말한 이유를 깨달았다.
자신이 상처받을까 봐 걱정한 것이다.
신후의 말대로 너무 똑똑한 솔이는 그 나잇대 아이들이 할만한 것 이상의 고민을 감당 중이었다.
저 작은 아이에게 보호를 받는 자기 자신이 한심했고, 미안했다.
저도 모르게 울컥하는 초연을 보고 신후가 가볍게 등을 토닥였다.
“울지 마요. 솔이 저렇게 승부욕 넘치게 경기하고 있는데 엄마가 약한 모습 보여야 되겠습니까?”
신후의 말에 초연은 얼른 가라앉는 마음을 추스르고 끝까지 환하게 웃으며 솔이를 응원했다.
***
신후의 제안대로 가족끼리, 부모와 자식 간에 짝을 지어 게임을 하는 대신, 팀별로 섞어 게임을 진행했다.
사람들은 내 아이 남의 아이 할 것 없이 같은 팀이면 응원했다.
게임에 참가하기 싫다던 말이 무색하게 솔은 승부욕을 발휘해 청팀의 에이스가 되었다.
컵 쌓기, 깃발 뽑기, 도전 골든벨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해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받은 우승 선물들이 키를 넘겼다.
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솔은 신후의 차 뒤에서 완전히 뻗었다.
초연은 뒷좌석에서 자신의 몸쪽으로 틀어 누운 솔이에게 무릎베개를 해 준 채 등을 쓸어주었다.
어릴 때부터 솔이 잠투정하면 등을 만져주던 버릇이었는데 이젠 그녀가 서운해 그녀의 버릇이 됐다.
“오늘 고마워요.”
신후가 없었다면 솔이 혼자 끔찍한 일을 당할 뻔했다.
게다가 신후가 아니었다면 아마 허겁지겁 자리를 피하느라 오늘 벌어졌던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의 일이 기분 나쁜 일이 아닌 추억으로 남을 수 있게 해준 신후에게 초연은 진심으로 고마웠다.
“별말씀을.”
초연은 정면을 주시하며 무심히 말하는 신후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신후는 운전을 하고, 뒷좌석에서 자신은 솔이를 재우는 이 순간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평범한 어느 주말 가족끼리 나들이를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런 평온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게 보통 가족의 하루일까?
그에게 느끼는 이런 감정이 다른 남편이 있는 여자들은 매일 갖는 든든함인가.
오늘 하루 솔이와 함께 보내느라 체력이 떨어진 그녀와 신후는 겉모습조차 달랐다.
간신히 졸음을 참으며 솔이를 토닥이는 자신과 다르게 가볍게 콧노래까지 부르며 운전을 하는 그는 피곤함은커녕 활기차 보였다.
만약 놀이동산을 가도 그는 정말 최선을 다해 솔이와 놀아주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초연이 그렇게 생각할 만큼, 오늘 신후는 솔이의 활약에 동기화가 됐다.
문제를 맞히느라 솔이가 집중하면 그 역시 같이 답을 읊조리고, 솔이 컵을 쌓을 때는 누구보다 집중해 경기를 보았다.
회의를 진행할 때조차 보지 못했던 그의 집중하는 모습에 이게 그럴 일인가 싶다가도 솔이가 경기에 이기고 그를 향해 손을 흔들 때면 같이 기뻐하는 그를 보면 이게 핏줄인가 싶었다.
상을 타는 솔이를 보는 신후의 눈빛은 뿌듯함에 가득 찬 아빠의 그것이었다.
아들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는데도 피는 끌리는 걸까.
초연의 시선을 느낀 그가 룸미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레 맞닥뜨린 신후의 눈빛에 당황한 초연이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저희 집에서 식사하실래요?”
“라면 먹자는 겁니까?”
그의 말에 초연은 순간 아랫배가 조여들었다.
하지만 룸미러를 통해 보이는 웃음기 가득한 눈빛에 초연은 신후가 장난을 쳤단 사실을 깨달았다.
저도 모르게 기분이 상했다. 혼자 이상한 상상을 한 것 같아 창피했다.
“아니요, 밥이요, 밥. 누가 라면 먹재요? 지금 집에 가서 밥 차려 먹기 힘들 꺼 아니에요. 마침 집에 아침에 김밥 만들다가 남은 재료도 있고, 또 아무래도 이사님이 밥 차리는 것보다는 제가 차리는 게 쉬울 것……. 아니에요. 됐어요. 그냥 이사님은 이사님 집에 가서 드시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은근히 접힌 신후의 눈꼬리에 말해봤자 제 무덤을 파는 것 같아 초연은 이내 설명하길 포기했다.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린 초연의 얼굴이 쌜죽했다.
그러는 사이 차는 집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녀가 조심스레 솔이를 안고 차에서 내리는 사이 어느새 뒷좌석 문을 연 신후가 단번에 솔이를 받아들었다.
“됐어요. 제가 할게요. 피곤하실 텐데 이사님은 이제 그만 올라가서 쉬세요.”
“야박하게 굴긴. 잔뜩 사람 설레게 해놓고, 취소하는 게 어딨습니까.”
설레게 했다니. 누가 누굴 오해하게 했는지 모르겠다.
초연은 괜한 오기가 났다.
그의 품에서 솔이를 빼앗으려는데 쉽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실랑이에 솔이 가늘게 눈을 떴다.
“흐음……. 아저씨?”
“솔아, 엄마한테 와.”
졸린 눈으로 그녀와 신후를 번갈아 보던 솔이 고개를 저으며 신후의 목에 팔을 둘렀다.
작고 보드라운 몸이 저를 신뢰하고 안겨 오는 느낌에 신후는 가슴 한쪽이 찌르르했다.
거 보란 듯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작은 몸을 더욱 단단히, 조심스레 추켜 안았다.
“빨리 쉬고 싶으면 얼른 앞장서요.”
그리고는 그녀가 다른 말을 할 시간을 주지 않고 성큼성큼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
그가 솔이를 눕히는 사이 초연은 얼른 밥을 안쳤다.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김밥 재료를 꺼내 김밥을 말 준비를 했다.
그 사이 흰색 트랙 슈트 상의까지 벗고 세수까지 하고 나온 신후가 주방 입구, 아일랜드 식탁에 반쯤 걸터앉았다.
흰색 티셔츠에 살짝 젖은 앞머리를 한 채 초연이 밥 차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신후는 마치 이곳이 제집인 양 익숙했다.
오히려 그런 신후를 보는 초연이 영 어색했다.
마치 6년 전 그에게 밥을 차리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도 그가 일을 마치고 오는 시간에 맞춰 초연은 저녁을 차렸다.
그러면 신후는 젖은 머리에 비누 향을 폴폴 풍기며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할머님이 나온다고, 저만치 떨어지라고 해도 무용지물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비명이 흘러나오고, 새초롬히 째려볼 때까지 지분거림은 계속됐다.
“저쪽에 앉아 있어요. 밥 얼른 해줄게요.”
초연은 그의 시선을 피한 채 더욱 분주히 몸을 움직였다.
그냥 사용해도 괜찮을 재료들을 다시 한번 데우고, 지단을 새롭게 만들었다.
아랑곳없이 아일랜드 식탁에 반쯤 걸터앉아 있던 신후가 무심히 질문을 던졌다.
“말해봐요. 어떻게 복수해주면 좋을지.”
“복수…… 라뇨?”
목이 멜 텐데 국물이라도 만들어야 하나. 딴생각에 빠져있던 초연이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두 눈만 깜박거렸다.
“설마 오늘 일 그냥 넘어갈 겁니까?”
“아, 그거요?”
“말만 해요. 당신 원하는 대로 해줄 테니. 헬스장 건물을 사서 헬스장을 내보내거나, 과격한 손님들을 보내 괴롭혀 줄 수도 있고. 아니면 박 팀장을 해외 지사로 발령내서 그 집 식구들을 당신 눈앞에서 치워버릴 수도 있고.”
팔짱을 낀 채 신후가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말을 할 때마다 팔짱 위로 도드라진 단단한 가슴이 움찔거렸다. 절로 시선이 갔다.
“뭐라고요?”
문득 그가 말을 끝내고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에 뜨끔했다.
“박 팀장이 당신 괴롭히잖아.”
“알고 있었어요?”
“내 여자 건드리는 것도 모를까. 말만 해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줄 테니.”
예전 방앗간집 일이 떠올랐다.
한복값 때문에 동네 양아치들을 섭외해 한동안 방앗간집 집 부부를 괴롭혔다는 사실을 초연은 뒤늦게 알았다.
동네 양아치들이 그들을 주시한다는 사실에 방앗간집 부부는 두려워했다.
양아치들이 가게 앞을 지킨 탓에 손님도 줄고, 매출까지 뚝뚝 떨어져 오랫동안 고생을 했다고 나중에 한 다리 건너 들었다.
그러니 자신에게 그토록 더 모질게 군 것도 이해가 갔다.
신후가 계속 지켜주지 않는 한 원망은 모두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 혁준이의 일도 이즈음에서 정리하는 게 맞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요.”
그녀의 대답에 신후가 얼굴을 찌푸렸다.
“난 솔이가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하는 꼴 못 봅니다. 그딴 애 옆에 있으면 솔이는 계속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릴 건데. 그런 일이 생겨도 상관없다는 건가?”
마치 제가 당한 일처럼 신후는 불쾌해했다.
어떻게 할지 벌 줄 방법을 선택하라는 듯한 눈빛에는 고집이 가득했다. 그녀가 말려도 들을 것 같지 않은 그런.
고집스러운 그의 모습에 초연은 어이없게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확실히 제 테두리 안의 사람들은 끝까지 책임지려는 태도였다.
누군가 제 사람들을 괴롭히는 걸 누구보다 못 참았다.
그의 테두리 안에 자신과 솔이 있다는 사실이 여실히 느껴졌다.
지금도 이런데 만일 그가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얼마나 근사한 아빠가 됐을까.
그러다가 문득 오늘 그의 모습을 보면 대단한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아빠가 됐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왜 웃지 지금?”
그녀의 반응을 오해한 그가 단번에 그녀를 당겨 품 안에 가뒀다.
순식간에 맞닿은 단단한 품에 온몸이 움찔하고 아래가 조여들었다.
코안을 파고드는 비누 향에 초연의 살갗이 간질거리며 일어났다.
“당신이 지금…….”
내가 뭘. 대답을 기다리는 집요한 눈빛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당신이 너무 솔이 아빠 같아서요.
너무 든든해 보여서 마음이 이상하네요.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말 대신 초연은 충동적으로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입술을 뗀 초연은 당황한 그의 표정에 그제야 제가 저지른 짓을 깨달았다.
그를 밀어내려는데 그가 초연의 몸을 끌어안은 채 놓지 않았다.
순식간에 그녀의 빈틈을 파고든 그가 그녀의 관자놀이와 귓가에 키스를 퍼부었다. 뜨거운 숨결에 솜털이 오소소 섰다.
“미, 미안해요……. 제가 잠깐 정신이 나갔나 봐요.”
자신이 먼저 입을 맞춰놓고도 금세 달아오른 그의 표정은 초연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의 가슴을 미는 그녀와 그녀의 손목을 잡고 손목 안쪽 여린 살을 쓰는 그 사이의 공기가 팽팽해졌다.
“그게 아니지.”
순간이지만 방어막이 뚫린 걸 본 이상 멈출 수는 없었다.
간신히 잡아두었던 자제력의 끈이 풀렸다.
블라우스 안을 파고든 커다란 손이 보드라운 살결을 쓸었다.
“들켰어, 당신.”
그의 손끝에서 시작된 전기에 초연의 온몸이 찌르르 전율했다.
“아!”
놀란 초연의 입술이 벌어진 순간, 신후가 그 사이로 제 혀를 밀어 넣었다.
까끌까끌한 혓바닥으로 그녀의 입속을 휘젓다가 그녀의 혀를 구슬려 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