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깊숙한 각인-40화 (40/84)

〈40〉

“너 이번엔 내가 봐준 줄 알아.”

솔이 씩씩거리며 책을 가방 안에 챙겨 넣었다.

괜히 여기 있다가 초연이 이 모습을 볼까, 걱정됐다.

차라리 아프다는 핑계로 집에 가는 게 낫겠다 싶었다.

가방을 메고 추스르는데 누군가 솔이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어어? 어린놈의 쉐키가. 친구를 쳤으면 사과를 해야지 이러고 가는 놈이 어딨어?”

혁준의 아빠였다.

바쁜 엄마 대신 헬스장을 운영해 시간이 자유로운 아빠가 항상 혁준을 데리러 왔기 때문에 솔이 역시 그를 알았다.

180cm가 넘는 거구의 남자가 허벅지보다 날씬한 아이의 목덜미를 잡은 모습에 주변에 있던 어른들이 경악했다.

하지만 험상궂은 남자의 표정에 누구 하나 쉽게 나설 생각도 못 했다.

어린이집 원장 역시 자리를 비운 탓에 남자를 말릴 사람이 없었다.

오로지 솔이만이 눈을 치켜뜨고 제 할 말을 했다.

“쟤가 먼저 잘못했는데요?”

“잘못하긴 뭘 잘못해?! 너 우리 혁준이가 어떤 아이인지 알아? 송씨 집안 4대손이라고!”

“보는 책 던지고, 서현이가 싫다는데 막 잡아당겼단 말이에요.”

“아빠 없어서 게임 못 하면서 잘난 척했단 말이야. 으앙.”

행여 아빠가 자신을 혼낼까, 혁준이 그만 울음을 터트렸다.

“없으니까 없다고 한 건데 그걸로 친구를 밀면 안 되지. 자, 사과해. 이 상처 흉 지면 어쩔 거야?”

남자가 혁준을 끌고 와 빨갛게 된 손바닥을 솔이 눈앞에 펼쳐 보였다.

넘어질 때 땅바닥을 짚느라 조금 빨개지고 먼지가 묻었을 뿐, 크게 다친 상처는 아니었다.

솔은 커다란 덩치로 혁준을 종잇장처럼 들고 흔드는 남자를 말없이 노려보았다.

아무리 어려도 뭐가 옳고 뭐가 잘못된 행동인지는 아는 나이였다.

친구의 약점을 가지고 약 올리는 건 분명 잘못된 행동이었다. 먼저 사과할 이유가 없었다.

“혁준이가 먼저 잘못했는데요? 혁준이가 사과하면 저도 사과할게요.”

“어른이 하라면 하는 거지. 너 이놈 아주 버릇이 없구나. 이리 와서 사과 못 해?”

쪼그만 게 금세 겁에 질려 사과할 줄 알았는데.

두려움 없이 말간 눈으로 올려다보는 솔의 행동에 남자는 부아가 치밀었다.

한 줌도 안 되는 솔의 손목을 확 잡아당기며 아랫입술을 크게 물고 ‘스읍.’ 겁을 줬다.

그때였다.

화이트 트랙 슈트를 입은 신후가 남자의 손목을 잡았다.

“애 몸에서 손은 떼고 말씀하시죠.”

말투는 정중했지만, 남자를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사나웠다.

하지만 구경하는 사람들은 등진 터라 신후의 표정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당장이라도 잡아 비틀어버릴 것처럼 노려보는 눈빛에 남자가 움찔했다.

“넌 뭐야?”

남자가 더욱 성질을 부리며 신후의 손에서 손목을 비틀어 뺐다.

신후와 솔이를 번갈아 본 남자가 물었다.

“이 애 아빠요?”

신후의 정체를 알고 있는 직원들은 소리 없이 놀랐지만, 남자에게 신후는 그저 좀 잘생기고 몸 좋은 애 아빠일 뿐이었다.

“아저씨 가요.”

솔이 심통 난 얼굴로 신후의 다리를 밀었다.

지난번 신후의 집에서 성식과 만난 이후 신후에 대한 솔의 마음은 좋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 신후를 아빠라고 오해까지 받으니 짜증이 났다.

그 모습에 남자가 피식 웃었다.

“아아, 아빠도 아니구만? 거 아무 데나 나서지 말고 가던 길 갑시다. 안 그래도 애 다쳐서 속이 시끄럽구만. 당신이 애 다친 아빠 마음을 압니까?”

신후는 남자의 말을 무시한 채 무릎을 굽혀 솔이와 눈을 맞췄다.

바짝 붙은 얼굴에 행여 신후가 자신을 혼낼까 솔이 움찔했다.

하지만 신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솔의 예상 밖이었다.

“전략적 제휴라고 알아?”

“뉴스에서 봤어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도 하는 착실한 대답에 신후의 입꼬리가 만족스레 휘었다.

“우리 그거 하자. 전략적 제휴 관계. 2대 1은 너 못 감당해.”

마치 작전을 세우듯 은밀히 전하는 신후의 말에 솔은 금세 솔깃해졌다.

“그럼 어떻게 할 건데요?”

신후가 불신 가득한 표정의 솔을 당겨 안고 자그마한 귀에 속삭였다.

처음엔 미덥지 못하겠단 듯 그를 보던 솔의 눈빛이 점점 확신에 찼다.

이윽고 솔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마지막으로 솔이와 가볍게 눈을 맞춘 신후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솔아, 친구를 밀친 건 잘못된 행동이야. 먼저 사과하고 안아줘.”

“밀쳐서 미안해. 내가 너무 속상해서 그랬는데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

솔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가 씩씩하게 사과했다.

조금 전까지 혁준이 사과하지 않으면 자신도 사과하지 않겠다고 버티던 것과는 딴판인 태도였다.

진정성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저보다 머리 반은 큰 혁준을 안고 토닥이는 손길이 제법 야무졌다.

솔의 작은 품 안에서 당황한 건 오히려 혁준이었다.

“자, 솔이는 사과했으니 그쪽 아이도 사과시켜 주시죠?”

하지만 혁준도, 남자도 머뭇거릴 뿐, 신후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신후가 속으로 입꼬리를 뒤틀었다.

어차피 사과 따위 받을 생각은 없었다.

미친놈이 솔이의 목덜미를 쥔 것을 발견한 순간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었다.

안타까운 건 여기가 회사 소속 어린이집 행사였고, 이 중 절반 이상은 그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이 상황에 제 목소리만 높여봤자 원망은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MJ 인터내셔널〉 회장 손자가 갑질이나 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질 게 뻔했다.

하지만 상대방이 버티면 버틸수록 원망은 상대에게 향할 것이다.

나중에 상대에게 뭔 짓을 해도 사람들도 이해할 것이다.

얼마나 버티는지 지켜보는데 그들 사이로 혜진이 뛰어들어왔다.

“여보, 이게 무슨 일이야?”

“아니 글쎄 말이야. 이 애가 우리 애를 밀었지 뭐야?”

남자가 혜진에게 이르듯 말했다.

그제야 상대가 신후임을 발견한 혜진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저, 민 이사…….”

며칠 전 초연이 체육대회를 이유로 오늘 프쉬케 팀의 공장 견학에 자신이 빠져도 되냐며 혜진에게 문의했다.

사실 회사 직원도 아니었기에 초연이 꼭 있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혜진은 다른 직원들 앞에서 초연에게 프로 의식 부족하다며 한마디 했다.

신후에게는 개인 일정 때문에 회사의 중요한 일정도 내팽개치는 사람과 왜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해야 하냐며 투덜거렸다.

지난번 패션쇼의 디자인 컨셉 회의 때 자신을 창피하게 한 복수였다.

그런데 이렇게 체육대회에서 신후와 마주쳤다.

그저 조용히 아들 얼굴이나 한번 보고 가려던 계획이 모두 깨진 것도 모자라 신후에게 자신의 꼼수를 모두 들켜버린 것이다.

혜진은 땅굴이라도 파고 들어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신 원장님.”

혜진이 변명하려는 데, 신후가 못 들은 척 몸을 돌렸다.

‘개나 소나 이사는 무슨…….’ 구시렁대던 남자는 혜진의 ‘우리 회사 이사님이셔.’ 하는 말과 팔꿈치 공격에 그제야 사태를 파악했다.

부인의 직위가 제 직위인 양 목에 힘을 주고 사람들을 대했는데 눈앞의 젊은 남자가 〈MJ 인터내셔널〉의 이사라는 소리에 그 역시 당혹스럽긴 매한가지였다.

어느새 볼일을 마치고 돌아와 신후의 옆에서 어쩌면 좋나, 하고 상황만 지켜보던 원장이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회장님께서 어린이집에 애정이 각별하셔서 특별히 살펴보라고 보내셨는데 아무래도 체육대회에 문제가 많아 보입니다.”

“네?”

“아이들이 어쩔 수 없는 일로 다른 아이들에게 공격을 당하거나 움츠러드는 게 정상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네, 아니죠…….”

“앞으로는 체육대회를 없애거나 아니면 다른 행사로 내용을 바꾸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찬영과 성식의 통화로 체육대회의 존재를 알았다.

그 역시 성식의 생각처럼 오늘 와서 솔이의 아빠 노릇을 하고 점수를 딸 생각이었지만 막상 보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벌써 부모 중 한 사람이 없다는 것 자체가 약점이 되어 공격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아빠의 역할을 한다고 한들, 솔의 마음속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

차라리 불필요한 부모 참가 행사를 없애는 게 낫겠다 싶었다.

“네, 알겠습니다.”

으앙. 이제 선물을 주는 체육대회가 없어진다는 말에 여기저기 아이들이 울상이 됐다.

몇몇 아이들은 문제의 원흉인 혁준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솔이와 신후가 눈빛을 주고받았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걸 감지한 혜진이 남편과 아이를 번갈아 추궁했다.

“송혁준. 무슨 일인지 엄마한테 말 안 해?”

신후가 여유로운 얼굴로 혜진에게 설명했다.

“별거 아닙니다. 솔이와 혁준이 사이에 작은 다툼이 있었고, 솔이가 사과했습니다. 이제 혁준이가 사과만 받아주면 간단하게 끝날 일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이 나잇대 남자애들이 다 이러면서 크는 거.”

한없이 너그러운 신후의 표정에 혜진은 더 몸 둘 바를 몰랐다.

혁준을 끌어다가 신후 앞에 세우며 채근했다.

“뭐 해? 사과 안 하고.”

“싫어.”

“친구랑 싸웠으면 사과해야지, 왜 안 해?”

짝, 혜진이 혁준의 등짝을 때리는 소리가 실내 체육관 안에서 공명을 일으키며 퍼졌다.

유난히 찰진 소리에 사람들의 두 눈도 커다래졌다.

혁준은 이렇게 많은 사람이, 친구들이, 그중에서 서현이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 창피했다.

결국,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울음 뚝, 안 그쳐? 당신은 애 제대로 안 보고 뭐 하고 있었어요? 가자. 저희 가보겠습니다.”

순식간에 혜진이 남편과 혁준을 데리고 사라졌고, 장내는 이내 평화를 찾았다.

그때 전화를 마친 초연이 그들 쪽으로 달려왔다.

“무슨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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