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성식이 어린이집 근처의 공원을 지날 때 즈음, 마침 오후 산책에 나온 아이들 속에 솔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성식을 발견한 솔이 잠깐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눈길을 피하며 꾸벅,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내키지 않지만 그래도 어른이라고 예의를 갖추는 티가 역력했다.
“오냐. 잘 지냈느냐?”
성식이 살갑게 인사를 받으며 반짝거리는 작은 머리통을 쓸어주려 손을 뻗을 때였다.
“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어느새 또 인사를 한 솔이 제 친구들 쪽으로 가려고 몸을 틀었다.
성식은 다급히 솔이를 붙잡았다.
“허허허. 고놈, 뭐가 그리 급해서. 이 할애비랑 얘기 좀 하다가 가.”
성식은 솔의 작은 손을 잡고 벤치에 앉혔다.
“할아버지가 저 싫어하셨잖아요.”
여전히 성식과 눈을 맞추지 않은 채 두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게 얼마나 골이 나 있는지 빤히 드러났다.
한데 그 모습이 밉기는커녕 애가 탔다.
제가 애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였으니 당연하다 생각했다.
“아이고, 내가 언제 그랬냐.”
“음……. 지난번 아저씨 집에 와서 엄마랑 저한테 뭐라 뭐라 그러셨잖아요.”
“아니, 이 할애비 뜻은 그런 게 아니라…….”
네가 미운 게 아니라 어른들 일이라 그런 거라는 걸 어떻게 설명해줘야 하나.
“솔아! 선생님이 들어오래.”
어린이집 문 앞에서 예쁘장한 여자아이가 솔이를 불렀다.
솔이 미끄러지듯 벤치에서 내려섰다.
“선생님이 부르신대요. 저 갈래요.”
이번엔 그가 잡을 새도 없었다.
자신이 책을 사준 이야기를 해주고 조금이라도 솔이의 마음을 풀어주려던 계획은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여태껏 수많은 회사 대표, 고위 공무원, 국회의원과 만났지만 이렇게 냉기가 돌던 만남이 또 있던가.
성식은 아쉬운 눈으로 저만치 가는 솔의 뒷모습만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때였다.
무언가 생각난 듯 솔이 몸을 돌려 그에게 돌아왔다.
“할아버지, 손 펴보세요.”
“응? 이 손 말이냐?”
주름진 성식의 손 위로 작고 보드라운 손이 잠시 겹쳐지더니 떨어졌다.
솔의 주먹이 지나간 자리에 딸기 맛 막대사탕 하나가 놓여있었다.
“이거 아무 때나 드시지 말고 급할 때 드셔야 해요. 이건 선물 아니고 제 꺼니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여전히 시선도 마주치지 않은 채 새침하게 제 할 말만 한 솔이 다시 반대편으로 내달리다 걷길 반복했다.
자신이 미울 텐데도 행여 저혈당이 올까 챙겨주는 솔이의 마음에 성식은 마음 한구석이 찌릿했다.
아이고. 이 어린애한테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가.
눈가가 시큰했다.
그때 저 멀리서 솔이보다 덩치가 꽤 큰 아이가 솔이를 향해 소리쳤다.
“솔아! 누구야? 너희 아빠야?”
“아니거든!”
“솔이 아빠는 할아버지인가 봐.”
“아니라니까!”
“아니면 왜 너는 아빠 사진 한 장 없냐? 보여줘 봐 보여줘 봐.”
솔이 멈춰 서서 아이를 노려보았다.
성식에게는 솔의 자그마한 뒤통수밖에 안 보였지만 어쩐지 솔의 표정이 그려졌다. 아니, 느껴졌다.
사실 성식도 유복자로 태어나 어린 시절 내내 아버지가 없다는 놀림을 받았다.
별것 아닌 거 같지만 그 시절 동기들에게 받은 상처가 어찌나 큰지 아직도 가끔 악몽을 꿀 정도였다.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이 듣기 싫어 더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그의 모친 역시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듣게 하지 않으려 더 엄격하게 키우고, 옷도 매일같이 빨아 입혔다.
반세기가 지나도 여전히 반복되는 괴롭힘에 성식은 덩달아 울컥했다.
“허. 저 고얀 놈들을 봤나.”
저도 모르게 솔이를 놀린 아이를 노려보다가 아차 싶었다.
어린아이를 탓하기엔 제가 준 상처가 더 컸기 때문이다.
성식은 솔이가 들어간 어린이집을 한참 바라보았다.
“안 되겠다.”
그리고는 전화를 꺼내 들었다.
***
같은 시각. 신후의 사무실에서 같이 서류 검토를 하던 찬영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
- 나인 거 티 내지 말고. 옆에 신후 있나?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전화를 받던 찬영은 제 말을 자르는 성식의 목소리에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찬영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신후를 보았다.
이미 이상 징후를 포착한 신후가 팔짱을 끼고서는 그를 빤히 쳐다보는 중이었다.
그것도 오른손으로 제 몸에 엑스자를 그리며.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오늘 또 민씨 조손 사이에서 등 터지는구나.
“이사님 지금 옆에 안 계십니다.”
찬영이 얼굴을 구긴 채 목소리만은 상냥하게 응답했다.
- 그래? 자네 이번 주 금요일 일정 어떻게 되나?
“프랑스에서 손님들 오셔서 민 이사님 모시고 평택 공장 방문 예정입니다.”
- 그래? 잘됐군. 그러면 자네는 아프다고 빠지고 어린이집 체육대회에 가.
“네?! 거길 제가 왜…….”
어이없어하는 찬영에게 성식이 제 계획을 말했다.
회사 부속 어린이집 체육대회에 참가해서 솔이의 아버지 역할로 같이 하루 놀아주라는 것이었다.
아니 그걸 왜 결혼도 안 한 자신에게 지시하는 것인가.
그러다가 회사에 본인에게 숨겨둔 자식이 있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게다가 성식이 규림과 신후의 짝을 지어주려 애쓰는 건 찬영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왜 초연의 아들 행사에 자신까지 동원시켜 챙겨주려는 건지.
윗사람의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없으니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대충 알았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자마자 신후가 말했다.
“지금까지 통화내용 머리 굴릴 생각하지 말고 그대로 읊어.”
살아있는 먹이의 목덜미를 노리는 맹수의 눈빛에 찬영은 울고만 싶어졌다.
***
금요일. 아침 일찍 눈을 뜬 초연은 창밖으로 바깥 날씨부터 확인했다.
체육대회가 실내에서 열린다는 건 알고 있지만 어쩐지 소풍을 가는 날처럼 날씨가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날씨는 맑았다.
“솔아, 날씨 좋다. 그치?”
“응.”
“김밥에 뭐 넣어줄까? 아니면 너 좋아하는 주먹밥 해줄까? 간식은 쿠키면 되고……. 음료는 무슨 맛?”
“알아서.”
들뜬 초연과 달리 솔은 차분했지만, 초연은 개의치 않았다.
막상 체육대회에 참가하면 솔이 역시 좋아하리라 생각했다.
사실 그녀가 들뜬 이유가 있었다.
항상 솔이가 과격한 놀이를 할까 전전긍긍하던 그녀였다.
하지만 지난번 산속에서 사고를 당했을 때 수혈도 하고, 치료제를 맞아 지금 솔의 몸 상태는 일반 아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즉, 출혈 사고가 나도 안전하다는 뜻이었다.
그동안 축구를 하거나 조금만 뛰어도 뛰지 못하게 했는데 오늘 체육대회는 마음껏 뛰게 해줘도 된다고 생각하니 그녀 역시 설렜다.
체육관에 도착해 정해진 좌석에 앉아 오늘 식순을 확인하며 초연이 물었다.
“솔이는 오늘 경기 뭐 뭐 참가해?”
며칠 전 어린이집에서 어떤 경기에 참여할지 표시해서 보내라는 공문이 내려왔다.
하지만 그만 피곤해 체크를 못 했다.
다음날 솔이 공문을 챙겨간 걸 보고 초연은 솔이 참가하고 싶은 경기를 알아서 표시했겠거니 생각했다.
“나는 안 해.”
생각지도 못한 답변에 초연은 당황했다.
초연은 자리에 앉아 그새 책을 꺼내 몰두하는 솔이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왜 안 해? 너 지난번에 수혈받아서 이제 뛰어도 돼.”
“그냥. 시시해.”
여전히 솔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책에 집중했다.
그렇게 뛰고 싶어 하던 게 얼마나 됐다고. 정말 흥미를 잃은 것인가.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경기에 참여하라고 해야 하나.
초연이 고민하는 사이 그녀의 옆으로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아이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아줌마. 솔이랑 책 봐도 돼요?”
“네가 서현이구나?”
“어? 어떻게 아셨어요?”
“솔이가 공주님같이 생긴 애가 서현이라고 알려줬거든.”
초연의 설명에 서현이 부끄러운 듯 웃었다.
“정말요?”
“난 거짓말 안 해.”
책을 보던 솔이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솔은 원래 살가운 성격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먼저 친하게 지내자고 말하는 성격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래서 서울로 올라오면서 걱정했다.
치료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래도 서울에 있는 동안 솔이가 외로울까 염려했다.
하지만 다행히 짝이 된 서현은 살가운 아이였다.
첫날부터 사탕도 나누어주더니 놀이를 할 때는 꼭 솔이를 끼워준다고 했다.
어린이집에서 인기가 많은 서현이 솔이를 챙기니 다행히 솔이도 아이들과 금세 친해졌다.
그러니 초연의 입장에서는 서현이 고마울 뿐이었다.
“솔이랑 친하게 지내줘서 고마워. 이거 솔이가 너 선물 주려고 직접 고른 거야. 이거 먹고 솔이랑 재밌게 놀아.”
틴케이스에 그려진 공주가 꼭 서현과 닮았다며 솔이 직접 고른 쿠키 세트였다.
서현이 자신의 엄마 쪽을 바라보자 서현과 꼭 닮은 엄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초연도 덩달아 서현의 엄마와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한 아이가 솔이의 옆에 나란히 앉아 머리를 맞대고 책을 보기 시작했다.
“이거 재밌어?”
“응. 이게 뭐냐면…….”
금세 책 이야기에 빠진 두 아이를 쳐다보는데 전화가 왔다. 강 비서였다.
오늘은 프랑스에서 손님들이 와서 공장 견학을 하는 날이었다.
덕분에 다행히 그녀의 스케줄을 뺄 수는 있었지만 혹시 연락할 일이 있으면 바로바로 받기로 이미 말이 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수십 명의 아이와 어른들의 말소리와 노랫소리로 체육관 안은 시끄러웠다.
도저히 전화를 받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엄마 잠깐 전화 받고 올게.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어.”
솔이에게 일러두고 초연은 밖으로 나갔다.
그때 솔이와 서현 옆으로 솔이보다 머리 반이 큰 혁준이 다가왔다.
“야! 문서현. 나랑 같이 방방이 타러 가자.”
아직 본격적인 체육대회가 개최되기에 앞서 분위기를 띄우는 경기들이 운영 중이었다.
그중에 하나가 트램펄린이었다.
노래 하나마다 경기 하나로 쳤는데 어떤 판에서는 여럿이 뛰는데 넘어지지 않고 가장 오래 버티는 아이가 1등이 됐고, 다른 판에서는 아빠와 함께 가장 높이 뛰는 아이가 1등이 되었다.
오래 버티기도, 아빠와 함께 가장 높이 뛰기도 혁준에게는 모두 자신 있는 경기였다.
“싫어. 나 솔이랑 이 책 볼래.”
제가 잘하는 모습을 서현이에게 자랑하고 싶은데 서현이 솔이랑만 노니 혁준은 짜증이 났다.
“그러지 말고 방방이 타러 가자아. 우리 아빠 운동 신경 엄청 좋아서 1등 할 거야. 1등 하면 상품으로 네가 좋아하는 미니어처 집 준대! 그거 너 줄게 가자아.”
혁준이 서현의 팔을 잡고 늘어지자, 서현이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솔이에게 물었다.
“솔아 너도 할래?”
“아니. 별로.”
“그럼 나도 안 해.”
서현의 거절에 혁준은 울컥했다.
솔이가 온 이후로 서현이 솔이랑만 놀아 쌓이고 쌓였던 서운함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
“치. 아빠 없으니까 못 하는 거면서.”
혁준은 솔이가 보고 있는 책을 뺏어 바닥에 집어 던졌다.
“너 뭐 하는 거야?”
솔이가 의자에서 내려 혁준을 노려보았다.
제 코밑에도 오지 않는, 예쁘장하기만 한 솔이가 혁준의 눈에 무서울 리 없었다.
“너 아빠 없으니까 시합 못 하는 거잖아. 왜 안 하는 척하냐?”
되려 보란 듯이 도발했고,
“이게.”
솔이가 확 혁준을 밀었다.
설마 저 작은 몸이 저에게 덤비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혁준이 벌러덩 뒤로 넘어졌다.
“으앙!”
아프다기보다는 민망함과 당황스러움에 혁준이 그만 울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