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깊숙한 각인-38화 (38/84)

〈38〉

잠시 후, 초연은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카페에서 지은과 마주했다.

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지은은 그때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그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지은을 마주한 초연의 감정.

급작스러운 반응에 우왕좌왕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의 초연은 허둥대지 않고 지은과 눈을 맞췄다.

“오랜만이네요. 시간 뺏고 싶지 않아서 커피는 미리 주문해놨어요. 괜찮죠?”

초연을 위아래로 훑은 지은이 자리를 권했다.

“네. 괜찮습니다.”

“어디에선가 새 인생을 잘살고 있겠지, 항상 응원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니 의외네요.”

다리를 꼬고 앉은 지은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미소지었다.

우아한 자세였지만 초연의 눈에는 지은의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다.

“저도 놀랐습니다. 사모님도, 신후 씨도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 몰랐거든요.”

“몰랐다고요? 그랬다면 그냥 신후 만났을 때, 모르는 척. 지나갔으면 됐을 텐데.”

주눅 들지 않는 초연의 태도에 지은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지은은 며칠 전 성식이 비서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우리 부속 어린이집에 애들 책이 적나?’

‘그럴 리가요. 저희 어린이집이야 〈MJ 인터내셔널〉의 자랑이고, 전국 어린이집 평가에서도 매번 1, 2위를 해서 기사가 날 만큼 괜찮습니다. 게다가 본사 어린이집은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 수준이고요.’

‘그래? 근데 왜 볼 만한 책이 없다는지…….’

‘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아닐세. 자네 본사 어린이집에 책 좀 더 사서 보내주게. 권장 도서 그런 거 말고 애들이 보고 싶어하는 책 설문 조사해서 팍팍 좀 넣어줘. 돈은 내 사비로 할 테니 아끼지 말고.’

성식이 어린이집에 신경 쓰는 게 솔이 때문이라는 걸 지은은 단번에 알았다.

신후 빼고는 아이 예뻐하는 꼴을 본 적 없는 노인네였다.

자기 아들인 지후에게도 장난감 하나 사주지 않던 분이었다.

그런데 책이라니.

피는 당긴다더니 그런 건가 싶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초연과 솔이 서울에 같이 머무르는 한, 마주칠 기회가 많아질 테고 그러다가 행여 솔이 신후의 아들임을 알게 될까 봐 신경이 쓰여 죽을 것 같았다.

“제가 의도가 있어 신후 씨를 따라 서울에 올라왔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닌가요? 돈까지 받아놓고 애 다 커서 나타나다니. 이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죠?”

지은이 본바, 초연은 자존심이 강한 여자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6년 전 신후가 〈MJ 인터내셔널〉의 후계자 임을 안 순간 껌딱지처럼 들러붙었을 터였다.

하지만 자신을 모른 척 한 신후를 보고는 다시는 그의 앞에 안 나타났다.

보통 자존심이 아니란 소리였다.

사실 지은은 한동안 초연에게 사람을 붙였다.

행여 초연이 신후의 앞에 나타나 자신이 그와 사랑하던 사이임을 밝히거나, 도재나 성식 앞에게 신후의 아이를 가졌다고 말할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초연은 결코 서울로 올라오지 않았다.

이제는 됐구나, 저 앤 다시는 우리 앞에 안 나타나겠구나 안도했을 즈음이었다.

갑자기 초연이 서울로 올라온다는 연락을 붙여두었던 사람에게서 받았다.

병원에서 입원 중이던 신후에게 급하게 사복을 입혀 집으로 데리고 왔다.

가족들에게는 병원에만 있으니 얼마나 지루하겠냐며, 연말에 가족끼리 집밥 한 번 먹자고 핑계를 댄 것이지만 실은 초연에게 쐐기를 박고 싶어서였다.

다행히 기억을 잃은 신후는 초연을 못 알아봤고, 초연은 그가 자신을 알면서 모른 척했다고 생각하고는 그 길로 서울 쪽은 얼씬도 안 했다.

그 뒤로도 한 3년 사람을 붙였지만, 초연이 서울로 올라올 기미는 없어 보였다.

주변에 괜찮은 남자도 있는 것 같아 제 인생 찾아 잘 살겠거니 했더니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설마 신후가 일 때문에 초연과 접촉할 일이 생길 줄은 정말 몰랐다.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지은의 붉은 입술이 뒤틀리는 걸 본 초연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때는 제가 너무 어려서 순진하게 사실 파악도 안 하고 넘어갔네요.”

“그게 무슨 말이죠?”

“신후 씨. 그냥 놀다가 저 버리고 서울 간 게 아니라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오토바이 사고가 나서 연락이 끊겼다고 알고 있어요. 그 사고 때문에 기억도 잃고, 복학도 못 하고 몇 달 병원에 누워 있었던 건데 저한테는 여행 갔다고 하셨죠.”

“그, 그건…….”

원망 섞인 초연의 눈에 지은은 아차 싶었다.

초연도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애송이가 아니었다.

“퇴원해서도 저와 있던 기간의 기억을 잃었다면, 말씀을 해주셔야 했던 거 아니에요? 왜 그 사람에게 사실대로 말씀해주시지 않으신 거죠? 왜 저에게 거짓말을 하신 거예요?”

당시 오해했던 일의 진상을 모두 알게 되었으니 이것도 문제였다.

이걸 신후에게 말이라도 한다면.

지은은 서둘러 변명했다.

“그건 신후 아빠 때문이에요.”

“?”

“신후 아빠가 신후 가출한 거 세상에 알려지길 원치 않았어요. 그렇지 않겠어요? 〈MJ 인터내셔널〉의 후계자가 대학도 졸업하기 전 가출했다가 동거하고, 임신까지 시켰다는 소문이 났다면 지금 신후 저 자리에 못 올랐을 거예요.”

“그럼 저한테는 말씀해주셨어야죠.”

맥이 탁 풀린듯한 초연의 반응에 지은은 가슴을 진정시키며 머리를 굴렸다.

“말해서 뭐 하게요. 신후는 어차피 기억도 못 하는데 다시 그쪽을 사랑할 거라는 자신이라도 있었던 건가요? 그리고 그쪽 집안. 우리 애 아빠와 회장님이 받아들였을 것 같아요? 〈MJ 인터내셔널〉 같은 대그룹의 안주인으로 좀 더 괜찮은 자제분께 욕심이 나지 않겠어요?”

지은의 말들이 모두 바늘인 것처럼 초연의 가슴을 찔렀다.

하나하나 틀린 말이 없다.

초연은 아랫입술 안쪽 여린 살을 깨물며 지은의 말에 귀 기울였다.

“신후가 회장님 눈 밖에 나면 저야 좋죠. 신후에게 배다른 동생 있는 거 알죠? 신후가 회장님 눈 밖에 나면 결국 〈MJ 인터내셔널〉은 제 아들 것이 되는 건데 제가 뭐 하러 신후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겠어요.”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지은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도재를 방패막이로 사용했다.

“이게 다 신후를 지키기 위한 아버지의 결정이었다는 걸 모르겠어요?”

자식을 위한 부모의 결정이었다는데 그녀가 뭐라 말할 수 있을까.

지은의 말에 초연은 무력감을 느꼈다.

착잡해진 초연의 표정을 보며 지은이 흡족한 얼굴을 했다.

“초연 씨 아들, 혈우병 D형으로 〈K 병원〉에서 수혈자 찾는다는 거 알아요.”

초연이 놀란 눈으로 지은을 바라보았다.

“제 친정이 〈K 병원〉인 거 모르셨나요?”

그제야 초연은 신후가 말한 특정 응고 혈액 보유자를 세 명 연결해준다거나 더는 수혈 걱정하지 않게 해준다는 게 단순히 〈MJ 인터내셔널〉의 힘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엄마이기는 하지만 그의 외가이기에 가능한 일인 것이다.

어쩔 줄 모르는 초연을 보며 지은이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치료도 잘 받고, 앞으로도 수혈에 문제없도록 제가 아빠에게 잘 부탁해 놓을게요. 난 진짜 초연 씨가 아이랑 행복하게 잘 살길 누구보다 원하는 사람이니까요.”

그제야 초연은 지은이 자신을 부른 이유를 깨달았다.

솔이를 볼모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었다.

“제가 어떻게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까요.”

힘 빠진 초연이 지은에게 물었다.

“예전에 만났던 거. 오늘 만난 거. 신후에게는 비밀로 해줘요. 괜히 두 사람 떼어놓은 게 남편이라는 소리 신후 귀에 들어가서 신후가 죽은 제 아빠 원망하는 모습 보고 싶지는 않네요.”

신후에게 그동안의 이야기를 한다면. 솔이가 당신의 아이라는 말을 한다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며칠 동안 궁금했더랬다.

그동안 거짓말을 했던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믿어주지 않으면 어떻게 증거를 보여줘야 하지?

그때 혈액을 속였던 건 어떻게 달래줄까?

수없이 생각했다.

하지만 더는 그런 고민을 할 이유가 없다.

신후를 아무리 사랑해도 솔이와는 비교할 수 없다.

벌써 마음 한구석이 뻥 뚫린 것처럼 찬바람이 불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초연 씨도 부모니 잘 알 거 아니에요. 부모로서 얼마나 자식이 잘 되길 바라는지. 자식과 사이가 나빠지면 얼마나 속상한지.”

“알겠습니다.”

초연은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아무리 아쉬움이 남아도 과거는 과거였다.

그녀에게는 아쉬움과 원망 가득한 과거보다는 솔이의 미래가 더 중요했다.

***

다음날 점심 무렵. 성식은 오랜만에 회사에 들렀다.

한 달에 두세 번쯤은 회사에 들러 보고를 받으니 특이할 것 없는 일과였다.

점심을 마치고 성식은 창가 러닝머신 위에서 가볍게 걸었다.

당뇨 환자는 식후 삼십 분 유산소 운동이 좋다는 의사 말에 회장이 운동할 시간이 어딨냐며 따지니 의사가 제안한 방법이었다.

그가 운동하는 사이 비서가 그의 옆에서 그동안의 일들을 보고했다.

운동도 하면서 보고도 받으니 효율성이 높다고 성식도 만족하던 방법이었다.

“지난번 말씀하신 어린이집 도서가 어제 다 도착했다고 합니다. 책꽂이가 부족해서 책꽂이도 추가 주문했습니다.”

“잘했네. 그래, 아이들이 책을 좋아하던가?”

솔이를 본 이후 성식은 자꾸 솔이 생각이 났다.

괜히 어른 잘못에 애한테 상처를 준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그러다가 생각난 것이 책이었다.

엄마를 기다리는데 재밌는 책이 없어 지루하다는 말이 기억난 것이다.

한데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알 수가 있나.

솔이의 반응이 궁금했다.

성식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공원 나무에 숨어 안 보이는 어린이집을 찾아보았다.

어린이집도 안 보이는데 솔이 보일 리 없었다.

“글쎄요. 제가 확인한 건 아니라……. 근데 애들은 책보다 장난감을 더 좋아하지 않을까요?”

“이런 쯧쯧.”

성식이 러닝머신에서 내려와 겉옷을 주워들었다.

“어디 가십니까?”

“날도 선선해지는 데 바깥 산책 좀 합세.”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성식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아직 대낮은 더운데…….”

땀 흘릴 생각에 얼굴을 잔뜩 찡그린 비서가 투덜거리며 성식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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