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깊숙한 각인-37화 (37/84)

〈37〉

“할아버지께서 솔이를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신후가 언짢은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성식에게는 지금 신후의 반응보다 솔이의 반응이 더욱 신경 쓰였다.

불안하게 저를 올려다보는 똘망똘망한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니 아차 싶었다.

“너 나랑 잠깐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 좀 하자.”

성식은 그대로 신후를 데리고 그의 안방으로 갔다.

“솔이 어린이집 찾아가신 겁니까?”

“혹시 저 애. 네 아들인 게냐?”

“네?”

아까 어린이집에서 봤을 때도 참으로 신후와 닮았다 생각했다.

옆에 나란히 세워놓고 보니 판박이가 틀림없었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어릴 적, 제 아비가 엄마가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지은을 데리고 온 후부터 신후는 사람에게 냉소적이었다.

특히 여자에게 그랬다.

결혼 적령기인데도 여자에게 관심이 없어 그가 더욱 규림을 짝지어주려 애쓰는 것도 있었다.

그런데 여자에게 관심도 없던 놈이 갑자기 여자한테 빠져 뻔질나게 청도를 들락거리는 것도 그랬고, 그 여자의 아들 일에 이렇게 지극정성인 것도 그랬다.

도통 신후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쟤 생일이 언제냐? 이놈 이놈. 여자한테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그 짝이로구나.”

이제 결혼해 언제 저만치 손자를 키울까 한숨이 절로 나왔는데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손자가 떨어진 기분이었다.

성식은 대뜸 엄지와 나머지 손가락의 짝을 지워보며 신후가 언제쯤 낳은 아이인지 짐작해보았다.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대학교 때 사고 치고 숨겨놨던 아들 아니야? 이 할애비한테 말해봐.”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니 대충 계산해도 군대 즈음.

졸업도 하기 전에 사고를 친 게 부끄러워 숨겼던 건가.

“할. 아. 버. 지.”

퉁명스럽던 신후의 목소리에 이제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참 꽃밭 속을 거닐 던 성식이 손을 내리고 신후를 쳐다보았다.

“아닌데 너랑 같은 병에 저렇게 너랑 똑 닮아?”

“혈액 검사까지 했습니다. 아닙니다.”

“아니라고? 정말?”

“네. 저 AB형이지 않습니까? 솔이 O형입니다.”

검사까지 해보았다는 소리에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제 자식이면 굳이 거짓말할 이유는 없을 테니 말이다.

갑자기 있던 손주를 뺏긴 것처럼 입맛이 썼다.

실망하는 성식을 보며 신후가 한마디 내뱉었다.

“그래서 인연인가 봅니다.”

“?”

“핏줄도 아닌데, 이 정도 닮았으면 가족이 되라는 운명 아니겠습니까?”

성식은 제정신이 퍼뜩 들었다.

솔이가 탐나기는 하지만 제 핏줄이 아니면 의미가 없었다.

“안 된다. 너와 같은 병. 불쌍한 아이 도울 수는 있다. 그것까지 막지는 않으마. 하지만 네 핏줄도 아닌 아이를 키우는 건 안 돼. 지후 보지 않았냐. 엄마가 다르니 결국 형제간에 분란 소지만 생기지 않느냐. 부모가 다른 형제는 안 돼.”

“지후와 제 경우와는 다릅니다. 솔이는 친부에 대한 기억이란 게 없습니다. 그러니 엄마가 낳은 동생에게 반감을 보일 이유도 없고요. 정 안되면 아빠 다른 아이 안 만들면 됩니다.”

앞에 말은 그도 생각하던 말이었지만, 뒷말은 화가 나 내뱉은 말이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핑계 삼아 결혼을 막으려는 성식의 고집을 그 역시 알기에 어깃장을 부리는 것이었다.

“뭐? 네 자식을 안 보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깟 핏줄이 대숩니까?”

팽팽해지는 분위기에 성식이 입을 꾹 닫았다.

괜히 언성을 높이다가 문밖에 있는 아이가 들을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됐다. 오늘은 여기까지 얘기하고 다음에 얘기해.”

성식은 신후를 내버려 두고 거실로 나왔다.

거실에는 아이도, 아이 엄마도 없었다.

둘이 대화하는 사이 집에 간 모양이었다.

못들은 게 다행이긴 한데 또 아이가 저를 어떻게 여길까 생각하니 절로 마음이 편치 못했다.

“허허. 이 일을 어쩌나.”

성식이 난처한 표정으로 이마를 긁적이며 현관문 쪽을 바라보았다.

***

솔이가 막 잠이 들었을 때였다.

신후로부터 문자가 왔다.

[솔이 잡니까?]

[네. 지금 막 잠들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얘기 좀 합시다. 지금 문 앞입니다.]

잠시 망설이던 초연은 현관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신후가 와인 한 병과 잔 두 개를 들고 있었다.

‘두고 봐요.’

‘두고 본다라……. 이따 와인 한 병 준비해놓으라는 겁니까?’

문득 아까 그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른 초연의 얼굴이 굳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흑심 품고 온 거 아니니까. 둘 다 속 시끄러울 테니 한잔하자는 겁니다.”

그녀가 한쪽으로 비켜서자 그가 안으로 들어왔다.

초연은 냉장고에서 솔이 간식으로 사두었던 치즈 몇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는 자리에 앉았다.

신후가 와인 잔에 붉은 와인을 따라 건넸다.

와인 잔을 받다가 손끝이 닿았다. 단단한 손마디와 그의 높은 체온이 느껴졌다.

순간 둘 사이의 공기가 묘하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가 이런 분위기를 일부러 만들려고 한 게 아니라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

모르는 척. 잔을 받아 그대로 제 앞에 내려놓았다.

괜히 술을 마시고 감정이 부풀어지는 걸 겪고 싶지 않아서였다.

“회장님은 잘 가셨어요? 아까 저혈당 쇼크 오셨던 것 같던데. 괜찮으세요?”

“노인네가 못된 짓을 하려니 하늘에서 벌을 내렸나 봅니다.”

심술궂은 신후에 반응에 어이없어 초연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신후가 그녀를 보고는 한쪽 눈썹을 밀어 올렸다. 이 상황에 웃냐는 의미였다.

그러게. 왜 웃음이 날까. 초연은 스스로 되물었다.

“근데 민 이사님 어떡해요? 회장님이 많이 화나신 것 같던데 저희가 곤란하게 만든 것 같아 죄송하네요.”

당황하긴 했지만, 성식의 행동이 이해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애지중지 키운 손주, 그것도 〈MJ 인터내셔널〉의 대표가 될 사람인데 당연한 반응이었다.

게다가 집안 싸움.

그것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그런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구나, 이해가 갔다.

“미안한 건 오히려 접니다. 할아버지는 조용히 처리하려고 했는데……. 당신과 솔이한테 겪지 않아도 될 일 겪게 한 것 같아 미안할 뿐입니다.”

오히려 놀라웠던 건 신후의 태도였다.

“민 이사님이 그 정도로 진지한 줄 몰랐어요.”

자신과 솔이에 대해 그 정도로 진지하게 생각하는 줄은 미처 몰랐다.

아마 그래서 성식의 말에도 크게 마음이 동요하지 않은 듯싶었다.

신후를 바라보는 초연의 얼굴에 어색함과 미안함이 스며들었다.

“정말 내 말은 믿지 않았군.”

“나에게 막무가내로 다가오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기 힘들잖아요.”

어이없어하는 신후의 표정에 초연이 어깨를 으쓱했다.

태연한 초연의 모습에 이번엔 신후가 모욕이라도 당한 얼굴로 와인을 들이켰다.

그녀의 머릿속에 계속 성식의 말이 맴돌았다.

‘이놈 이놈. 여자한테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그 짝이구나.’

그녀가 알고 있는 신후의 이미지와는 다른 말이었다.

그의 새엄마가 거짓말을 한 걸까?

문득 성식이 말한 대로 그를 견제하기 위해 그녀에게 나쁜 말을 전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그가 철저히 회장님께 본 모습을 속인 걸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래서. 이제는 믿는다는 말입니까?”

“네. 적어도 그쪽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건. 믿을게요.”

뻔뻔한 초연의 표정에 신후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에 초연도 따라 작게 웃었다.

“그럼 기념으로 건배 한 번 합시다.”

짠, 초연이 그가 들어 올린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쳤다.

그에 대한 불신의 벽이 조금씩 깨지고 있었다.

***

며칠 동안 초연은 정신없었다.

오트 쿠튀르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이번 쇼 주최 측과 프쉬케 본사 임원 방문 일정에 맞춰 선보이겠다는 신후의 계획에 따라 본사 모두가 발등에 불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패션쇼의 큰 테마는 발해 복식으로 잡았다.

유교 사상으로 움직임을 원활하지 않았던 조선 시대의 복식보다는 기마와 수렵에 적절했던 발해 시대의 디자인이 현대 복식에 좀 더 적용할 요소가 많다는 판단에서였다.

디자인 팀에서는 과거 복식의 재현과 현대 복식에서 과거 복식 디테일의 차용, 두 가지 디자인으로 나누어 디자인을 진행했다.

당시의 의복 연구를 위해 수많은 문헌을 참고했고, 소재를 찾아냈다.

전국 구석구석을 뒤져 당시의 직조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구했고, 한국에서 생산되지 않는 실크 직조 원단은 동남아까지 뒤져 재료를 공수했다.

디자인을 정하자 그녀 역시 덩달아 바빠졌다.

당시에는 가죽, 모피, 어피를 많이 사용했는데 최근에는 천연 소재를 사용하는 것은 부담스러워해, 인조 소재로 쇼를 진행하기로 했다.

초연 역시 인조 소재를 가지고 천연 소재에서와 같은 색감을 내기 위해 수없이 염색을 반복하며 실험해야 했다.

해외에서 공수해온 원단 역시 그녀가 다루던 원단들과는 달라 원하는 색감을 내는 데 꽤나 애를 먹었다.

그렇게 며칠 지내던 날.

퇴근하려는데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본사에서 근무하면서 타 팀 직원들이 연락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에 초연은 의심 없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 신후 엄마예요. 좀 만났으면 하는데.”

형식적인 인사도 없이 냉랭한 지은의 목소리에 6년 전에 보았던 지은의 모습이 자동으로 그려졌다.

“무슨 일이시죠?”

초연 역시 형식적인 인사 같은 건 건네지 않았다. 대신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만나서 얘기해요. 지금 차 보낼 테니 그거 타고 와요.”

“네, 알겠습니다.”

초연은 순순히 약속을 잡았다.

대충 무슨 이야기를 할지 그려졌지만 만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녀 역시 지은에게 궁금한 게 많았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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