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애도 있는데 이게 무슨…….”
행여 솔이가 들었을까. 초연이 그를 흘겨보았다.
“애 핑계로 숨는 것도 적당히 해야 할 겁니다. 내가 당신 필요하다고 한 거. 당신도 받아들인 거로 알고 있는데.”
신후가 그녀를 잡아 세워 자신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단순히 섹스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처음엔 자신의 기억을 찾는 도구로 초연을 가까이 두어야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이상하게 그녀의 옆에만 있으면 그동안 기억나지 않던 단서들이 떠올랐으니까.
더 함께 오래 있다면 잃어버린 기억을 모두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저 뜨겁게 초연을 원했다.
입을 맞추고, 그녀의 몸을 안고. 사춘기 시절에도 겪어보지 못한 충동을 서른이 넘은 나이에 느끼는 중이었다.
자신만큼 뜨겁지 않은 그녀의 태도에 목이 말랐다.
가까이 지내는 건 그녀의 온도도 자신과 같아질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초연이 미꾸라지처럼 피하기만 하는 태도는 용납할 수 없었다.
마치 그녀에게 계약 조건을 잊지 말라는 듯. 진지한 경고에 초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금세 움츠러든 초연을 보고, 신후는 팔을 풀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초연도 그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맞은편 집인 그의 집의 구조는 좌우가 바뀌었을 뿐, 똑같았다.
대신 인테리어는 전혀 달랐다.
아이보리와 연핑크로 따뜻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의 집과는 달리 블랙과 화이트 톤의 그의 집은 텔레비전도, 소품도 없어 썰렁했다.
그가 자신의 집에 얼마나 신경을 써 줬는지 새삼 느껴질 정도였다.
괜히 벽을 세운 자신의 태도가 미안했다.
게다가 솔이도 지켜보는데 계속 냉랭한 태도로 있을 수는 없었다.
초연은 자신이 먼저 숙이고 들어갔다.
“아, 이사 도와주신 거 고마워요. 솔이가 침대 아주 마음에 들어 해요.”
“당신 침대는. 당신도 마음에 듭니까? 난 좀 부족한 거 같던데.”
그의 질문에 괜히 이상한 쪽으로 상상이 갔다.
‘그녀의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그’ 같은 거…….
제 과민 반응이겠지.
초연이 머리를 가로저으며 서둘러 대답했다.
“아니에요. 부족한 거 없이 마음에 쏙 들어요.”
그녀의 감사 인사에 그제야 표정을 푼 그가 고개를 까닥이며 그녀의 사과를 받아줬다.
셋은 바로 식사를 했다.
솔이의 어린이집에 대한 소감과 새로 사귄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로 분위기는 금세 풀어졌다.
그 사이 솔이가 식사를 먼저 끝냈다.
텔레비전도 없는 탓에 솔이가 조용히 둘이 식사하는 걸 지켜보았다.
신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에서 커다란 상자를 가져와 솔이에게 건넸다.
“자, 이건 네 거.”
“뭐예요?”
솔이가 신나 단번에 박스를 뜯었다.
명품 자동차 1/8 크기의 미니어처를 발견한 솔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아! 지난번 아저씨가 주신 슈퍼카 백과사전 속 차랑 똑같이 생겼어요.”
“마음에 들어?”
“당연하죠! 헤드라이트랑 안에 시트 모양도 똑같아요.”
“차 문 열어봐.”
“문도 열려요? 어? 불도 켜지네?”
“와…….”
솔이가 감탄을 쏟아내며 자동차를 이쪽저쪽으로 돌려 가며 감상했다.
그런 솔이를 신후가 뿌듯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몇 개 더 주문했는데 그건 오는 중이래.”
“언제 와요?”
“네가 엄마 말 잘 들을 때마다 하나씩?”
“네!”
그의 말에 솔이 금세 순한 양이 되어 두 눈을 빛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신후는 당장이라도 양손에 장난감을 챙겨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앞으로 서울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수많은 검사와 수혈로 힘들 수 있다.
그때마다 하나씩 주려고 대기 중이었다.
그런 둘의 모습을 보는 초연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애 선물치고는 너무 비싸요.”
“뇌물이 이 정도는 돼야죠.”
“뇌물이 뭐예요?”
솔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솔이에게 선물을 주는 거라고 어떻게 말할까. 초연이 말을 얼버무렸다.
“그런 게 있어.”
“너한테 잘 보이려고 내가 사주는 선물.”
신후가 몸을 낮춰 솔의 볼을 가볍게 쥐며 말했다.
초연은 자신이 착각했음을 깨달았다.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아.”
솔은 신후와 그녀를 번갈아 보았다. 알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신후에게 말했다.
“저 망원경으로 별 보러 가도 돼요?”
“당연.”
신후의 허락에 솔이 단번에 작은 베란다 쪽으로 갔다.
솔이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찬 그의 집이, 그의 집에서 너무 자연스러운 솔이 부담스러웠다.
“애한테 너무 잘해주지 마요.”
“왜. 솔이가 내 편이 될까 봐 무섭습니까?”
팔짱을 낀 채 묻는 그의 눈빛은 그녀가 뭘 생각하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듯했다.
그의 말대로 초연은 그가 자신의 마음을 잡기 위해 솔이를 이용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어차피 저희는 프로젝트 끝내고 청도 내려가야 하는데 정이 많이 들면 헤어지기 힘들잖아요.”
“헤어지지 않으면 되지 않습니까.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끝을 정해버리고 경기를 진행하는 건 비겁한데.”
“민 이사님…….”
그와 자신의 짧은 계약 관계에 솔이까지 끼어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제발 그만 해요, 초연이 간청하듯 그를 바라보았다.
쉴 새 없이 자신에게 부딪혀오는 신후 때문에 초연은 힘들었다.
밀어내도 또다시 밀고 들어오는 그 때문에 힘들고, 때때로 그를 받아들이면 어떨까 하는 기대 때문에 힘들었다.
“솔이 병이 어떤 건지 압니까?”
“?”
“마음대로 뛸 수 없고, 행여 다칠세라 마음껏 놀지도 못합니다.”
물론 그처럼 솔이와 같은 병을 앓는 건 아니지만 그녀도 솔이를 키우며 병에 대해 알 만큼 안다.
게다가 자식을 향한 마음과 걱정을 그가 어떻게 알까.
초연이 발끈했다.
“그 정도는 저도 알아요.”
“아니. 당신은 완전히 이해 못 합니다. 매일 매일 남들에게는 별 것 아닌 일상을 지내면서도 혹시 내가 진짜 죽을까, 두려움에 떠는 기분이 어떤지.”
신후의 기억 속에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그가 기억을 하던 가장 오래된 순간부터 함께였다.
그가 뛰면 얼굴이 굳고, 작게 생채기라도 나면 울 것 같은 모친의 얼굴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어른들이 아무리 별거 아니라고 해봤자, 그들이 갖는 공포는 고스란히 전이됐다.
특히 솔이처럼 똑똑한 아이는 모를 수 없다.
자신도 그랬다.
어른들이 하는 말 중 무엇이 거짓이고, 진실인지 빤히 보였다.
그저 자신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한 말이니 모른 척할 뿐이었다.
자신과 꼭 닮은 솔이를 보며, 신후는 이상하리만치 솔이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래서 더 솔이에게 마음이 가는 것이리라, 신후는 생각했다.
단순히 초연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솔이 그 자체로 그에겐 또 다른 소중한 인연이었다.
“하지만 솔이는 그 정도는 아니에요. 물론 민 이사님도 같은 병이시니 제가 무시하려는 건 아니지만 저희 솔이는…….”
“티 내지 않을 겁니다, 솔이는.”
신후의 말에 초연은 무언가 가슴에서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자기가 두렵다는 티를 내면 엄마가 더욱 힘들어하고 안절부절못한다는 걸 알거든.”
어쩌면, 솔이가 그 정도로 병을 깊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했다.
아직 어리니 어렴풋이 알고 정확히는 몰랐으면 좋겠다, 기대했다.
그래서 수혈만 한다면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지낼 수 있다고, 별거 아니라고, 학교 가기 전에 다 낫게 해주겠다고 누누이 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솔이는 똑똑한 아이니까 엄마의 기분을 파악할 겁니다. 그러니 더 꼭꼭 제 감정을 숨기겠지.”
하지만 신후의 말에 초연은 자신의 현실 부정이 실패했음을 확인 사살당한 기분이었다.
“당신한테 말로 들으니 더 잔인하네요.”
초연의 얼굴이 굳는 걸 보고, 신후는 표정을 풀었다. 그녀를 겁주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저 정도 응석은 받아줘도 됩니다. 어차피 응석받아준다고 엇나갈 만큼 당신이 잘 못 키우지도 않았고 솔이가 생각이 없지도 않으니까. 난 그저 솔이가 좋아하는 걸 할 때만이라도 당신 생각, 자기 건강 생각 안 하고 즐거웠으면 좋겠습니다.”
가만히 그의 말을 듣던 초연이 문득 질문을 던졌다.
“당신도 그랬나요?”
그에게 더는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어린 시절이 궁금했다.
“비슷합니다.”
“아직도요? 그래도 지금은 낫죠? 지금은 정기적으로 수혈도 받으니까요.”
대답 대신 신후가 미소를 지었다.
무감한 눈빛이었지만 초연은 그가 아직도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오랜 시간 자신의 병에 대해 다른 이에게 쉽게 마음을 터놓고 표현하지 못했을 그가 안쓰러웠다.
아마 솔이도 그렇겠지.
네 외로운 마음을 이 엄마가 어떻게 보듬어주어야 할까.
차라리 같은 병이라면 더 잘 이해했을 텐데. 오히려 같은 병이지 못한 게 안타까웠다.
“민 이사님께 많은 걸 배우네요.”
“옆에 있으면 더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믿음직스러운 그의 말에 초연은 마음이 흔들렸다.
그저 자신 때문에 솔이에게 잘 보이려는 것인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그만큼 솔이를 깊게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차라리 못 이기는 척 그의 마음을 받아들인다면.
예전엔 가볍게 놀았더라도 이제는 정신을 차리고 살지 않을까?
자신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 초연은 이상하리만치 이 여자 저 여자 가볍게 만나는 그가 연상되지 않았다.
그때였다.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올 사람 없는데.”
작게 중얼거리던 신후가 현관 쪽으로 나갔다. 현관은 그녀가 있는 주방에서는 보이지 않는 위치였다.
“연락도 없이 웬일이십니까?”
사람을 맞이하는 신후의 시큰둥한 목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이야기 좀 하자고 왔다. 그 여자 사는 집이 어디…….”
신후가 문을 열자 득달같이 안으로 밀고 들어오던 성식이 초연을 보고 깜짝 놀랐다.
“벌써 집에까지 부르는 사이인 게냐?”
“겨우 밥 한 끼 먹는 거 가지고 과민 반응하지 마세요.”
“겨우? 겨어우?”
성식의 방문에 탐탁지 않아 하는 신후의 반응에 성식은 뒷목을 잡았다.
잘못된 행동을 해놓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놈과는 할 이야기가 없다.
대신 성식은 초연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쪽도 너무하는구려. 알만한 사람이 이렇게 총각 집을 제집 드나들 듯 드나들면 어떡합니까. 누구 앞길 막으려는 것도 아니고. 이 동네 신후 얼굴 모르는 사람이 어딨다고.”
어디 감히 미혼모가 총각을 꼬시느냐는 투의 성식의 말에 초연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조금 전 그를 받아들일까 말까 한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우스운 건지.
신후는 〈MJ 인터내셔널〉의 후계자였다.
자신만 받아들인다고 될 문제가 아니었다.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이 확, 현실감이 몰려들었다.
쥐구멍으로 숨고 싶었다.
초연은 자신의 집으로 갈 생각에 일어나 허둥지둥 인사를 했다.
“죄송합니다.”
초연에게 향하는 성식의 시선을 신후가 막아섰다.
“싫다는 당신 내가 데리고 온 건데 왜 초연 씨가 죄송합니까.”
“네 이놈! 내가 그렇게 말해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게냐!”
제 눈앞에서 여자를 감싸는 신후의 모습에 성식이 더욱 역정을 냈다.
“할아버지……?”
조그맣게 들리는 아이의 목소리에 세 사람의 시선이 모두 솔이에게 향했다.
솔이를 발견한 성식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아, 아니. 네가 여긴 왜 있는 게냐?”
“솔아 이리 와.”
아이를 제 품에 끌어당긴 초연이 행여 솔이가 상처받을 만한 말을 성식이 할까, 얼른 귀를 막았다.
그제야 성식은 솔이 초연의 아이임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