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아이고, 편의점이 어딨는 거야?”
어린이집 근처, 야외 공용 주차장에 주차하고 편의점을 찾던 성식이 휘청였다.
식사 때를 놓쳐 저혈당 증세가 온 것이다.
운전을 하고 올 때부터 슬슬 신호가 왔지만 차 안에는 하필 비상용 간식이 똑 떨어진 상태였다.
정신을 놓치기 전에 뭘 좀 먹어야 하는데 근처에 사람도, 편의점도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가 죽겠구나, 핸드폰을 꺼내 비서에게 전화를 하려다가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핸드폰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데 머리가 팽팽 돌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결국, 성식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정말 오늘이 내 제삿날인가 싶었다.
“괜찮으세요?”
살았구나 싶었지만 곧이어 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실망했다.
혀도 짧은 아이가 뭘 할 수 있을까.
“어른, 어른 좀 불러와. 혈당……. 혈당이 떨어져서.”
성식은 굳어가는 혀로 최대한 아이에게 설명했다.
그때 그의 입속으로 무언가 쏙 들어왔다.
복숭아 향 사탕이었다.
어린 게 어떻게 알고 이걸 넣어 줬을까 싶었지만 성식은 쉽게 눈을 뜨지 못했다.
“이것도 드세요. 혀 조심하세요.”
그때 성식의 입으로 단단하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조심스레 들어왔다. 빨대였다.
쭉, 하고 빨대를 빨자 망고 주스가 그의 목구멍을 타고 흘렀다.
당이 순식간에 퍼지는 느낌.
이제 살았구나 싶었다.
잠시 후 성식이 천천히 눈을 떴다.
동그랗고 뽀얀 얼굴에 똘똘한 눈빛.
“신후냐?”
“할아버지 괜찮아요?”
그제야 성식은 눈앞의 아이가 신후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신이 없으니 헛게 보이는구나 싶었다.
고사리손의 부축을 받고 일어난 성식이 근처 벤치에 앉았다.
“이거 다 드세요.”
성식은 솔이 건네준 주스를 쪽 빨며 아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 할아버지한테 단 거 먹여야 한다는 건 어찌 알았누?”
암만 보아도 어릴 적 신후와 똑 닮은 아이였다. 이렇게 닮으니 착각을 하지 싶었다.
“우리 할아버지도 당뇨거든요.”
“그래?”
솔은 성식이 주스를 마시는 동안 솔은 핸드폰을 주워와 건네고는 벤치에 앉아 얌전히 기다렸다.
바닥에 닿지 않고 팔랑거리는 다리와는 다르게 제 주스를 보는 표정이 꽤 우울했다.
그제야 성식은 아차 싶었다. 코 묻은 아이의 간식을 뺏어 먹을 수는 없지.
“이건 얼마냐.”
“괜찮아요. 짝꿍 됐다고 서현이가 선물 준 거예요.”
“선물인데 내가 뺏어서 어떡하누?”
“음……. 위험에 처한 사람은 도와줘야 하니까 서현이도 이해해 줄 거예요.”
“허허. 고놈 참.”
어린 게 말하는 건 어린 애 같지 않게 똑똑했다.
그 모습이 더 신후와 닮았다.
그놈이 결혼하면 꼭 이렇게 생기고, 이만치 똘똘한 자식을 낳을 것만 같은데.
이제 결혼시켜서 언제 이런 똥강아지 같은 손주를 보나.
앞으로 적어도 8년은 걸릴 텐데 언제 애를 키워 손잡고 놀러 가나.
그때가 되면 자신은 더욱 꼬부랑 할아버지가 될 텐데 이런 똥강아지 같은 손주와 제대로 놀아주지도 못할 생각을 하니 속이 착잡했다.
“근데 왜 표정이 그러는 게냐. 친구랑 싸웠어?”
“그게 아니라 다음 주 금요일에 어린이집에서 체육대회 한대요.”
그제야 성식은 아이가 자신의 회사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긴 회사 업무 지구라 주택가가 있는 것도 아니니 당연했다.
그의 회사 어린이집은 매년 이맘때 공원 옆의 실내 체육관을 대관해 체육대회를 개최했다.
“허허. 근데 왜? 애들은 그런 거 좋아하지 않나? 부모님이 바쁘신 게냐?”
말이 체육대회지 아이들에게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상품을 받는 날이었다.
아무리 체육을 못해도 양손 가득 상품을 챙겨가는 날이라 아이들이 좋아했다.
게다가 아무리 직원들이 바빠도 한두 시간이라도 꼭 빼서 체육대회에 참가하라고 독려하니 직원들도 좋아했다.
한데 이렇게 우울한 표정이라니. 누가 이 아이를 슬프게 했을꼬.
어떤 부모가 일을 핑계로 바쁘다고 체육 대회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했을까. 당장 불러서 혼쭐을 내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전 아빠가 없거든요.”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성식이 움찔했다.
똘똘하던 아이의 어깨가 축 늘어지는 걸 보니 제가 괜한 질문으로 아이를 슬프게 했나 싶었다.
성식은 아이의 작은 등을 다독거리며 위로했다.
“아빠가 없어서 친구들이 놀릴까 봐 걱정하는 게냐. 괜찮다. 니 나이 때는 그런 게 중요할 수도 있지만 커 보면 그거 별거 아니다? 이 할애비도 아빠 없지만 이렇게 잘 컸지 않냐.”
“그게 아니라 엄마가 속상해할까 봐요.”
“뭐?”
“다른 애들은 다 엄마 아빠랑 오는데 나만 아빠 없는 거 보면 엄마가 엄청 속상해하거든요.”
“허허.”
아이의 어른스러움에 성식은 말문이 막혔다.
솔이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말 안 하면 모르겠죠?”
간절해 보이는 눈빛이 기특했고, 안쓰럽고, 아이에게 무언가 해주고 싶었다.
“그날 다 체육관으로 가는 거 아니냐? 혼자 원에 남아 뭐 하게?”
“…….”
“이 할애비가 그날 행사 없애줄까?”
기뻐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아이의 표정은 여전히 침울했다.
“그러면 다른 친구들이 슬프잖아요.”
아이고 기특한 것.
신후와 비슷한 게 아니라 신후보다 훨씬 낫다 싶었다.
어디서 이런 애가 나타났나.
이 아이의 엄마는 배도 안 고프겠다 싶었다.
“허허, 고놈.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냐?”
“모르겠어요.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솔이가 고개를 갸웃, 할 때마다 보드라운 머릿결이 찰랑거렸다.
심각한 고민을 하는지 음, 하고 입을 꼭 다무니 복숭앗빛 오동통한 뺨 위로 볼 우물이 패였다.
남자아이인데도 사랑스럽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성식은 자신이 여기 온 목적도 잊고, 솔이와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해야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을지 같이 고민했다.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 솔이를 불렀다.
“선생님이 부르세요. 저 가봐야 해요. 그럼 할아버지 안녕히 계세요.”
아이가 폴짝, 벤치에서 내려 공수를 하고 그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인사성도 밝다. 제 엄마가 잘 키웠구나 싶었다.
아직은 아이를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에 성식은 쓸데없는 질문으로 아이를 잡았다.
“엄마가 아직 안 오셔서 어쩌누.”
“일하시는 거니까 괜찮아요. 근데 엄마 걱정 안 하게 기다리는 건 좀 지루해요. 여긴 재밌는 책도 별로 없거든요.”
총총 뛰던 아이가 금세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걸어 어린이집 안으로 들어갔다.
조그마한 몸짓에 어찌 저리 의젓한지, 성식은 한참 동안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너무 시간을 보냈음을 깨달았다.
이 정도면 어린이집 아이들도 죄다 하원 했겠다 싶었다.
“이런, 너무 늦었구먼.”
성식은 핸드폰을 꺼내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기 어린이집 근처 공원인데 자네 이리로 좀 오게. 그리고 그놈 이사한 집 주소 좀 알아봐.”
***
퇴근 후 초연은 서둘러 솔이를 데리러 갔다.
“미안, 엄마가 너무 늦었지?”
초연은 그녀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달려오는 솔이를 혼내지 않고 꼭 안아주었다.
첫날부터 너무 오래 솔이를 어린이집에 둔 것 같아 미안했다.
“다른 애들도 많아서 괜찮아. 엄마 꼴등 아니야.”
유리창 너머 아이들을 가리키며 속삭이는 솔이의 모습에 노심초사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집에 얼른 가서 밥 먹자. 신 여사님이 네가 좋아하는 함박 스테이크 만들어 놓으셨다고 하셨어.”
신 여사는 신후가 소개해준 도우미 분이었다.
도우미라는 말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기품이 넘쳐흘렀고, 우아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초연에게 원하는 사항을 묻고 십 분도 안 돼 앞으로 이 집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관리 스케줄에 대해 브리핑도 해주었다.
특히 초연이 감동한 부분은 솔이의 케어에 대한 부분이었다.
행여 그녀가 일하느라 퇴근이 늦을 때는 솔이를 알아서 늦게까지 돌봐줄 테니 걱정하지 말란 말을 해주었다.
말만으로 든든했다.
집 관리에 아이 관리까지. 비용이 궁금했으나 신 여사는 모든 건 신후가 이미 지불했다며 옅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처음엔 신후의 호의가 부담스러워 거절하려 했는데 그냥 받아들인 게 다행이었다.
해보지 않은 직장생활에 갑자기 투입된 상황이라 이것저것 파악할 것들이 많았다.
이 상태로 살림과 솔이 챙기기를 다 못 했으리라.
생각보다 신후가 섬세한 구석이 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집에 도착해 비밀번호를 누르는데 신후가 맞은 편 자신의 집에서 나왔다.
“그쪽 말고 이쪽.”
언제 퇴근한 건지 베이지색 면바지에 흰색 면티. 그 위에 가벼운 가디건을 걸친 그는 아까보다는 한결 편안해 보였다.
“네?”
“아주머니가 식사 이 집에 차려놨습니다.”
당황한 초연이 자리에 우뚝 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사이 신후는 문을 더욱 활짝 열고 한쪽으로 비켜섰다.
훤히 열린 문 사이로 함박 스테이크 냄새가 솔솔 났다.
“민신후 씨.”
“아주머니께 식사를 따로 준비해 달라는 말을 실수로 전달하지 못했습니다.”
덤덤한 그의 표정에 이 ‘실수’가 진짜 ‘실수’일 뿐인지 의심 갔다.
“엄마. 죄는 미워해도 음식은 미워하지 말랬어.”
자신이 좋아하는 함박 스테이크를 먹지 못하게 될까, 솔이 꽤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붙잡고 올려다보았다.
깜박깜박. 귀여운 고양이 같은 눈망울로 부리는 애교에 초연은 할 말을 잃었다.
“어어? 이민솔. 자동차도 태워주고, 책도 사주고, 망원경도 보여준 아저씨한테 그런 말이 나와?”
신후가 허리를 굽히고 솔이의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그녀를 볼 때와는 표정이 사뭇 달라졌다.
순식간에 무장해제된 표정에 초연은 그가 언제 이렇게 솔이와 가까워졌나 싶었다.
“몰라요.”
몇 번 옆구리 공격을 당한 솔이가 까르르 웃으며 신후의 집으로 뛰어갔다.
아직 못 마땅해하는 그녀를 보며 신후가 턱짓으로 다시 한번 자신의 집 안을 가리켰다.
“들어갑시다. 솔이 배가 쏙 들어가 있던데.”
은근히 압박하는 신후의 모습에 뭐라 한마디 하고 싶지만 이미 솔이의 저녁 시간을 넘긴 지 한참이었다.
“두고 봐요.”
“두고 본다라……. 이따 와인 한 병 준비해놓으라는 겁니까?”
초연이 그의 옆을 지나쳐갈 때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