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그 남자……. 잊었다고 하지 않았나?”
“잊으려고 해도 문득 떠오를 때가 있잖아요. 내가 원치 않아도 기억이 떠오를 때.”
스스로 그 사람을 기억하는 것과 스치는 모든 것에서 그의 흔적을 느끼는 것.
둘 중에 뭐가 더 기분이 나쁠까.
고민해 볼 것도 없이 둘 다 기분이 더럽다.
신후의 질투 어린 표정에 초연이 그의 손에서 팔을 뺐다.
누가 누굴 질투하는 건지. 하지만 바로 잡고 싶지 않았다.
겨우 이름 하나에도 자신을 소스라치게 만든 그도 그만큼 마음고생을 했으면 싶었다.
“회의 안 할 거면 저 어디로 가면 되는지나 알려 줘요.”
의심 가득한 초연의 시선에 신후가 전화를 들었다.
그리고는 회의에 참석할 사람들을 올려보내라고 지시 내렸다.
전화를 끊은 신후가 여전히 책상에 걸터앉아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내려보았다.
“거짓말한 거 아냐.”
그를 쳐다보지 않고 테이블 위에 노트북과 다이어리를 펼쳐 회의 준비를 했다.
“거짓말이 아니라면 곧 사람들이 오겠군요.”
‘그렇게 계속 앉아 있을 거예요?’란 시선에 신후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곧 회의 참석자들이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디자인 팀장 김규림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초연입니다.”
규림이 들어서자 초연은 규림에게 가벼운 목인사를 했다.
그때 규림이 급하게 올라가느라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여기 있는 동안 규림이에게 인사라도 제대로 해야겠다, 마음먹다가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의 섹파로 온 곳에서 약혼녀에게 감사의 인사라니.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한심스러웠다.
혼자 작게 한숨을 쉬며 옆으로 시선을 돌리던 초연은 깜짝 놀랐다.
“총괄팀장 박혜진이에요.”
7년 전 그녀의 면접을 봤던 사람이었다.
당시 이름이 자신의 대학교수님 중 한 분과 같아 똑똑히 기억했다.
하지만 상대방은 초연을 기억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초연은 매년 만나는 수백 명의 지원자 중 한 명일 뿐이었다.
이런 우연이 있나 싶었지만, 초연은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하고 자신은 청도로 내려가면 그뿐이었다.
자신과 〈MJ 인터내셔널〉과 어떤 인연이 있는지 그에게도, 혜진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초연과 신후, 규림과 혜진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둘씩 앉았다.
“이쪽 업계에서 일한 경력은 있으신가요?”
여전히 초연을 보는 혜진의 시선이 곱지 못했다.
어릴 때는 저 시선에 상처도 받았지만 인제 보니 그냥 저런 눈빛이 기본인 여자이구나 싶었다.
“없습니다.”
“협업할 염색 전문가로 모시고 온 거지 박 팀장 지금 면접 보는 거 아닙니다.”
예의를 갖추라는 신후의 눈빛에 혜진이 금방 쌜죽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같이 작업하다 보면 업계 사정도 좀 아셔야 이야기가 통할 것 같아서요.”
“네. 제가 업계 쪽은 잘 모릅니다. 제가 해야 할 일, 알아야 할 일, 알려주시면 배우면서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무섭지도, 잘 보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그저 같이 일하는 사람으로 초연은 최대한 예의를 지키며 말할 뿐이었다.
“천연 염색이라는 게 워낙 정량화가 되지 않아 저희처럼 대량 생산을 하는 회사 차원에서는 동일한 퀄리티를 유지하는 게 관건입니다. 이 원장님께서는 이 부분에 신경을 많이 써 주셨으면 좋겠어요.”
한마디로 제 할 일만 하지 그 이상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선 긋기였다.
초연은 모르는 척, 혜진의 말에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인사를 하기 전보다 조금 더 어색해진 분위기를 깬 건 신후였다.
책상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리고 상체를 기울인 그는 의욕이 넘쳐 보였다.
자연스레 방에 있던 다른 사람들 역시 그의 말에 집중했다.
“다다음 주 파리에서 오트 쿠튀르 주최 측과 프쉬케 본사 측에서 손님들이 오기로 했는데, 공장 방문과 이 원장님 공방 방문 일정은 어느 정도 픽스가 됐고. 패션쇼 진행 상황은 어떻습니까?”
“아……. 아직 디자인 컨셉 잡고 있는 중입니다.”
규림이 혜진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신후의 얼굴이 구겨졌다.
“아직이요? 그동안 조선 시대 한복은 몇 번 선보였으니 고구려나 신라 시대 복식을 재해석하는 건 어떻냐는 의견 전달 못 받았습니까?”
“아니 그게…….”
난처해하는 규림의 말을 끊고 혜진이 끼어들었다.
“근데 이사님. 꼭 디자인 라인을 한복으로 잡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신후가 한쪽 눈썹을 밀어 올리며 혜진을 바라보았다.
“사실 한복이라는 게 그동안 서양 쪽에서는 신기해서 관심을 가졌던 거지 한복 자체가 복식으로 크게 매력 있는 옷은 아니잖아요. 신체적 매력을 못 살리고 꽁꽁 싸매기만 하는 한복이 언제까지 먹힐지 비관적이네요.”
자기 일이 아니기에 초연은 가만히 있으려고 했다.
하지만 묘하게 한복을 낮게 보는 듯한 혜진의 말에 울컥했다.
초연 자신도 모르게 반박이 먼저 튀어나왔다.
“전 한복을 친자연적이고, 현시대의 트렌드를 가장 잘 구현한 옷으로 홍보 방향을 잡으면 꽤 괜찮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갑작스러운 초연의 발언에 여섯 개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초연은 차분한 얼굴로 자기 생각을 말했다.
“한복의 재단 기법은 버리는 원단을 가장 최소화하는 재단 기법이죠. 게다가 저고리의 여밈 위치 조절, 말기 위치, 소맷단의 거들지 디테일을 사용하면 다양한 사이즈의 체형들이 소화 가능하고요.”
그녀 역시 패션을 전공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한복과 가까이 지냈다.
그녀에게 패션의 꿈을 심어준 것도 사실은 할머니가 만든 한복이었다.
현대 사람들이 서양식 패션을 많이 입기에 대학 커리큘럼이나, 취업 문이 서양 복식 쪽으로 많이 열려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한복이 서양 복식에 대해 열등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오트 쿠튀르가 향후 〈MJ 인터내셔널〉 방향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에, 단순히 한국의 의복이니 한복을 접목한다는 것보다 이러한 측면을 부각시켜 당위성을 갖추는 게 괜찮을 것 같습니다.”
초연의 논리적인 반박에 혜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오트 쿠튀르 고객층도 생각해야죠. 그들은 시장을 이끄는 사람들이니까요. 그 사람들은 환경에 신경 쓰지 않아요.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옷 따위도 싫어합니다.”
자존심이 상한 혜진이 날카롭게 쏘아댔다.
“그렇다면 한복이 더욱 적절하겠네요.”
‘뭐가 있죠?’란 혜진의 말 없는 질문에 초연이 그녀와 시선을 맞추고 또박또박 말했다.
“한복의 봉제 기법이요. 한번 박고 끝나는 서양 바느질 기법에 비해 깨끼 바느질은 더 촘촘한 간격으로 적어도, 세 번, 혹은 네 번까지 박아 시접 자체가 디자인 요소가 되게 하죠. 하늘하늘한 원단이 이어지는 부분, 섬세한 봉제 기법은 옷 자체의 품위를 살려줍니다. 동양 자수나 금박 역시 서양의 그것에 비해 섬세하고요. 고급스러움에 환장하는 사람들이라면 더 좋아하겠네요.”
마지막에는 결국 초연도 참지 못하고 발끈했다.
그 모습에 신후가 피식, 소리 없이 웃었다.
그제야 초연은 아차 싶었다.
그저 콜레보레이션을 하러 온 상황에 너무 깊숙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곧 신후가 회의를 마무리한 탓에 더는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사람들을 내보내고 신후가 그녀의 책상 앞에 걸터앉았다. 늘씬하고 단단한 허벅지가 그녀에게 닿을 듯 가까웠다.
“한복에 대해 관심이 많은가 봅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체험 학습에서도 한복 만드는 거 설명도 하고.”
초연이 한복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이 신후는 흥미로웠다.
그가 사고 후 회사에 돌아오면서 외국 시장과 한복의 결합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숙제였다.
그의 계획을 들은 사람들은 황당하다고, 가망 없다고 말했지만 그에게는 승산이 있어 보였다.
어차피 스토리텔링의 시대.
외국 명품이 갖는 히스토리를 〈MJ 인터내셔널〉 같은 기업이 가질 수는 없다.
그렇다고 외국의 스토리를 갖다 쓰기에는 말이 안 됐다.
지금은 프쉬케를 통해 유럽 시장에 나아가지만, 결국 세계적으로 먹힐 한국의 스토리텔링을 가진 명품 브랜드를 만드는 것.
그것이 그의 목표였다.
처음엔 비관적이던 이들도 한류 바람에 외국 브랜드들이 한국 연예인과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갖는 것을 보고는 수긍했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아직 한복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반응이 많았다.
그런데 초연이 이렇게 한복에 열성적이라니.
그녀와 자신이 통하는 게 참으로 많은 것 같다.
마치 영혼의 쌍둥이처럼.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런 신후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초연이 시선을 돌려 짐을 챙기며 답했다.
“대학에서 패션을 전공했어요.”
“박 총괄과 김 팀장도 다 패션 전공인데. 우리가 운명이라는 생각 안 듭니까?”
“그런 걸로 운명 운운하다가는 길가다가 하루 열 명쯤 운명의 상대자를 만나겠어요.”
신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벗어나려는 초연의 팔을 잡았다.
“이것도 아니다?”
어디까지 우길 거냐고 묻듯, 웃는 신후의 한쪽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초연은 가슴 속 무언가 뜨겁게 치밀어 올라오는 기분을 느꼈다.
기억을 잃은 와중에 한복을 좋아했다는 건 이게 돈이 될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
자신에 관한 기억은 모두 잃은 채 별것도 아닌 것에 운명 운운하는 그가 우스웠다.
기억이 있다면 차마 뻔뻔하게 내 앞에서 운명 소리는 못 할 텐데.
초연은 똑바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 사람과도 잘 통했어요. 같이 한복 브랜드를 만들까, 행복한 계획을 세웠던 적도 있죠. 그럼 그 사람과 저도 운명인가요?”
아픔이 담긴 초연의 눈빛에 신후는 할 말을 잃었다.
간신히 찾은 그녀와의 연결 고리가 더럽혀진 기분이었다.
금세 불쾌하다는 듯 변한 신후의 표정에 초연이 화제를 돌렸다.
“그러면 제가 일할 곳 좀 보여주시겠어요? 아무래도 욕 안 먹으려면 더 열심히 일해야겠네요.”
***
퇴근 시각. 성식은 자신의 집 마당에서 정원수를 정리했다.
친구들이야 손주며 뒤늦게 자식을 보고 꼬물거리는 것들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하지만, 그에게는 그런 재미가 없었다.
실은 손주 욕심에 신후의 결혼을 재촉하는 것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신후는 본인 능력으로 아이를 만드시지, 왜 애꿎게 저만 닦달하냐고 한소리 했다.
그게 말인지, 똥인지.
자신보고 첩질이라도 하라는 말인가.
그의 가문에 그런 인간은 없다.
그 나이 먹도록 연애 한 번도 안 하는 신후를 보면 신후에게도 그 피가 그대로인 듯싶었다.
다만 죽은 도재는…….
“미친놈.”
부인이 죽고 얼마 되지도 않아 지은을 데리고 온 도재는 아직도 그에게 처죽일 자식이었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가문에 먹칠을 해놓고 오래 살지도 못하고 죽은 건 더욱더 처죽일 자식이었다.
그러면 뭐 하나. 등짝 한 번 때릴 새도 없이 죽어버렸는데.
정원수를 다듬는 그의 손길이 거칠어졌다.
“회장님. 저녁 식사 시간인데 들어가시죠.”
성식의 심기가 편치 않다는 걸 눈치챈 비서가 최대한 공손한 목소리로 사다리 밑에서 그를 불렀다.
“오늘은 회사에 무슨 일 있었는지 보고해봐.”
골치 아픈 회사 일이야 신후에게 맡기고 한 달에 몇 차례 회사에 나가는 정도로 일을 줄였다.
대신 회사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비서를 통해 보고 받았다.
“아, 저……. 들어가서 식사라도 한술 뜨시면서…….”
공복에는 더욱 예민해지는 성식이었기에 비서가 안절부절못했다.
“말해.”
성식의 재촉에 결국 비서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이초연이라는 분이 회사에 출근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예상했던 일이었다.
“음. 다른 건? 오늘따라 왜 이리 뜸을 들이시나.”
“그분 아들이 본사 어린이집에 등록되었다고 합니다.”
싹둑. 성식이 애지중지 길게 남겨두었던 나뭇가지가 잘려나갔다.
“뭐? 우리 회사 어린이집에 그 여자 아들이 다닌다고?”
“네. 어제 민 이사가 직접 가서 아이 서류 접수했다고 합니다.”
“미친놈.”
성식은 들고 있던 장갑과 가위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사다리를 내려왔다.
비서가 다급히 사다리를 잡으며 성식을 말렸다.
“어디 가십니까 회장님? 저녁 드실 시간인데요?”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여자랑 애새끼인지 보러 가야지!”
“그래도 저녁 드셔야지 때 놓치시면 안 됩니다.”
비서가 그를 따라나서려 하자 성식이 손을 내저었다.
“자네는 올 거 없네.”
“네?”
“회장이 어린이집 들락거린다는 거 소문나서 좋을 게 뭔가!”
“아니 회장님 그래도 식사는 하시고 내일 가시죠.”
어차피 출입 자체가 소문인 것을.
하지만 이 집안의 수장답게 최고의 소고집인 성식이 그대로 차고로 향하는 걸 비서는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