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일하고 다니지 않습니까?”
문밖 지은과 고용인들은 오래간만에 들리는 성식의 호통에 안절부절인데, 오로지 성식의 앞에 독대 중인 신후만이 태연했다.
손이 귀한 집의 장손. 그것도 본처가 남긴 유일한 아들.
그것이 신후가 가진 힘이었으며,
그렇기에 성식 역시 신후를 애지중지 키웠다.
게다가 어린 시절부터 똑똑했던 신후는 성식의 기대를 한 번도 저버린 적 없었다.
또래들보다 저만치 앞섰으며, 오히려 그의 기를 꺾으려는 제 위 형들까지 힘으로든, 말로든, 머리로든 어떻게든 이겼다.
회사에 입사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로열패밀리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 누구보다 뛰어난 성과로 〈MJ 인터내셔널〉의 주가를 몇 배로 키웠다.
신후가 아니었다면 〈MJ 인터내셔널〉이 이토록 공격적으로 해외 진출을 해서 성과를 이루지는 못했을 것이다.
결국 패션의 메카라는 프랑스 한가운데서 그들의 자존심과 같은 명품 브랜드를 인수하고, 오트 쿠튀르 무대에까지 설 기회를 마련한 건 전적으로 신후의 능력이었다.
지금의 〈MJ 인터내셔널〉은 단순한 후계자가 아닌 민신후라는 전문 경영인을 만나 날개를 단 기업이 되었다는 외부의 평가를 성식 역시 부정할 수 없었다.
만약 자신과 신후가 대립을 한다면 신후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MJ 인터내셔널〉을 떠나리라는 건 성식이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미 신후의 기세는 제가 꺾는다고 꺾을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고 생각한 성식이 화를 꾹꾹 참으며 다시 물었다.
“규림이에게 수혈받았다는 게 누구인 게냐?”
“프쉬케 오트 쿠튀르 참가 건으로 협력 요청한 이범규 염색장의 손주입니다.”
“그게 아니라 뭐 하는데 규림이한테 그런 부탁까지 한 게야!”
그의 뜻을 알만도 한데 말을 뱅뱅 돌리는 신후의 태도에 성식이 참지 못하고 다시 한번 성질을 부렸다.
이 모든 게 그 여자를 만나고 나서인 것만 같아 벌써 이초연이라는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시니 이렇게 화를 내시는 것 아닙니까.”
고저 없는 싸늘한 얼굴에 그제야 성식은 그 여자의 뒷조사를 했다는 사실만으로 신후가 성질을 부리는 중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 내가 그 집 뒷조사 좀 했다. 네가 정신을 못 차리고 허튼일에 정신을 파니 내가 불안해서 살 수가 있어야지 말이냐.”
그저 애 딸린 여자를 만난다고 이러는 게 아니었다.
신후에게 규림은 생명줄 같은 존재였다.
어떻게든 결혼해서 옆에 두어야 저도 안전하게 살 수 있을 텐데.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미혼모와 그 자식을 챙긴답시고 규림의 마음을 다치게 할까, 걱정되고 화가 났다.
“사람 목숨 살리는 게 허튼일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언제부터 그런 일에 신경을 쓰는 착한 놈이었다고! 그 아이 엄마 때문인 게지!”
쾅! 성식이 책상을 내리쳤다.
신후의 성격은 성식이 가장 잘 알았다.
똑똑하고 영민하긴 했지만 쓸데없는 측은지심 따위는 없었다.
성식은 신후의 그런 점을 오히려 높이 쳤다.
큰 회사를 운영하는 데 제일 중요한 건 선택지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정에 이끌려 이걸 못 하니 회사가 망하고, 집이 망하는 것이다.
그동안 신후는 모든 일에 이성적이었고, 냉철했다.
소수의 출혈이 있더라도 회사에 큰 이익이 되면 고민 없이 그 방법을 선택하던 아이였다.
그런데 갑자기 회사 헬기까지 띄워 애를 살리다니.
평상시의 신후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대답 없이 바위처럼 앉아있는 신후의 모습에 성식은 제 짐작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혹시나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아이에 대한 연민일까, 했던 기대가 무참히 깨졌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하고 목덜미가 뻑뻑해져 성식은 손으로 목덜미를 감쌌다.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하고 간절한 눈으로 신후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규림이 마음 다치는 건 생각 안 한 게냐?”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규림이와 결혼할 생각 없습니다.”
“미친 게야? 네 놈은 목숨이 열 개라도 돼?”
“규림이 아니더라도 다른 방법이 있을 겁니다.”
“허허, 이놈이 호강에 겨우니 헛소리를 지껄이는 게지. 지금이야 네 새엄마가 순순히 너에게 피를 준다만, 지후가 크고 나면. 그때도 너에게 순순히 피를 줄 것 같으냐?”
문밖에서 성식의 언성을 듣고 있던 지은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영감탱이. 규림과 신후를 짝지어주려는 이유를 모르지는 않았지만, 이토록 노골적으로 저와 지후를 견제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자신이야 본처가 아니라지만 지후는 반쪽이라도 민씨 집안의 피를 갖고 있는데 어찌 저렇게 밀어내기만 한단 말인가. 야속하고 원망스러웠다.
게다가 신후가 빠진 초연이라는 여자도 문제였다.
분명 6년 전의 그 여자가 틀림없었다.
성식이 뒷조사를 한다는 사실에 지은 역시 사람을 써 초연의 뒷조사를 했다.
겨우 사진 몇 장을 구한 것이지만 기억 속의 얼굴이 맞았다.
아이의 나이 역시 대충 계산해 보니 맞았다.
게다가 무엇보다 아이의 얼굴.
처음 신후를 봤을 때와 닮은 얼굴에 소름이 돋았다.
똑똑한 줄 알았는데 애도 안 떼고 이렇게 나타나 뒤통수를 치다니.
그때 애를 제대로 뗐는지 확인하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었다.
만약 신후가 기억이라도 돌아온다면.
여자가 그 애가 신후의 애라는 걸 밝히기라도 한다면.
이 집안에서 자신과 지후의 몫은 없다.
20년 넘게 이 집에 머물면서 지후가 〈MJ 인터내셔널〉을 차지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그럴 수는 없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담.”
살 궁리를 하는 지은의 두 눈이 번뜩였다.
***
월요일 아침, 초연은 솔이와 함께 출근길에 올랐다.
실은 회사 내 있는 사내 어린이집에 솔이를 맡기기 위해서였다.
신후의 회사에 솔이를 맡긴다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방법이 없었다.
동네는 이미 정원이 차서 대기해도 올해는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받았다.
그렇다고 사람을 써서 혼자 둘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신후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다.
〈MJ 인터내셔널〉은 여성 직원이 많은 곳으로 그들을 위한 복지가 잘되어 있는 회사였다.
그중 하나가 어린이집 지원이었다.
정직원, 임시직원, 사무직 직원, 공장 직원 할 것 없이 마음 놓고 아이를 맡기고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본사 외 모든 지사와 공장에도 어린이집이 갖춰졌다.
덕분에 초연도 그 혜택을 볼 수 있었다.
본사에서 걸어서 삼 분 거리 공원을 끼고 있는 어린이집.
신발장 앞에서 쪼그려 앉은 초연은 고사리 같은 손을 만지작거리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솔이를 바라보았다.
“잘 지낼 수 있지?”
이럴 줄 알았으면 신후의 말대로 좀 쉬었다가 출근을 할 걸 그랬나.
괜히 제 욕심에 솔이만 고생시키는 건 아닌지 걱정되고, 미안했다.
“엄마는. 내가 앤가.”
초연에게 손이 잡힌 채 이미 까치발을 하고 창문 너머 안쪽 상황을 파악하는 솔이의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맞다. 그녀 앞에서나 어리광을 부렸지, 제 또래들과 있으면 언제나 이겨 먹는 아이였다.
어느새 자기 생각보다 훌쩍 커버린 솔이를 보며 초연은 불안한 마음을 숨기고 일어났다.
“그치. 애가 아니지. 그러면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초연은 허리를 굽혀 최대한 예의를 갖췄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민 이사님께도 연락드릴게요.”
신후가 무슨 말을 했길래 솔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에게 연락한다는 걸까.
초연은 괜히 선생님이 둘 사이를 오해할까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지 마시고 솔이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민 이사님 말고, 저한테 연락 주세요. 민 이사님이 저 프로젝트 제대로 일하라고 저희 모자한테 이만큼 배려해주시는 것도 고마운데 더는 폐를 끼칠 수 없어서요.”
초연은 신후와의 선을 분명히 그었다. 일부러 들으라는 의미였다.
“네.”
의아하다는 듯한 교사에게 초연은 자신의 번호를 남기고 어린이집을 나섰다.
***
출근한 그녀의 목적지는 신후의 방이었다.
디자인실로 바로 출근하기에 앞서 그에게 직접 프로젝트 참가원들을 소개받기 위함이었다.
1층 안내 데스크의 안내를 받은 후, 그의 사무실을 향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길. 초연은 생각에 잠겼다.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시험을 치르기 위해 왔던 이곳을 다시 올 줄이야. 감회가 새로웠다.
7년 전 자신이 입사했더라면 그동안 이 방에 올 일이 있었을까.
그와 자신의 거리가 얼마나 먼지 실감했다.
이사실 문 앞에서 심호흡을 들이킨 초연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문을 열었다.
이제 이 방에 있는 사람은 그녀의 애인이거나 솔이의 아빠가 아니라 그저 〈MJ 인터내셔널〉의 이사님일 뿐이었다.
만약 자신이 허튼 행동을 하다가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면 자신만 우스워질 뿐이었다.
방에 들어서던 초연은 신후와 눈이 마주쳤다.
평상시에도 보던 정장 차림이었지만 회사에서 마주한 그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와 거리를 둬야지, 했던 마음이 무색하게 존재 자체로 위압감이 느껴졌다.
“다른 분들은……?”
“어서 와요. 소개는 회사 적응부터 하고. 솔이는 잘 데려다줬습니까?”
어색한 그녀와 달리 신후가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또다시 그의 제멋대로인 배려에 당했다.
그의 방에서 미팅이 잡혀 있다고 생각해서 온 거지 아니었으면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출근하자마자 이사실로 직행한 자신에 대해 어떤 소문이 퍼질까. 아찔했다.
강 비서가 슬금슬금 초연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이초연 원장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민신후 이사님의 비서 강찬영이라고 합니다.”
신후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아이의 엄마.
사실 재벌, 기억 상실, 숨겨둔 자식 같은 드라마 같은 이야기는 없을 거라는 걸 그도 알고 있다.
하지만 신후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집요하게 구는 걸 본 적이 없기에 관심이 갔다.
정 상무가 패션쇼 주최 측을 설득해 한복으로 하기로 한 걸 굳이 전통 염색으로 다시 돌려 초연을 섭외한 것.
공과 사의 구분이 철저한 그가 회사 헬기를 제멋대로 사용한 것.
초연의 아들을 위해 굳이 어린이집에 들러 아이를 입소시키고, 아이의 상황에 관해 설명하고 자신의 연락처를 남긴 것.
찬영에게는 이 모든 게 신기할 뿐이었다.
그리고 초연의 외모에 찬영은 신후가 이상한 짓을 벌인 원인이 초연 때문이라는 걸 단번에 깨달았다.
찬영의 명함을 건네받은 초연의 얼굴이 굳었다.
강찬영.
한때 그가 신후의 이름인 줄 알고 불렀던 이름의 주인공이 이 사람이구나.
“뭐 해?”
눈에 띄게 굳은 초연의 모습에 신후가 물었다.
“이름이……. 인상 깊으셔서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명함을 만지작거리며 초연이 어색한 얼굴로 대답했다.
신후는 그제야 찬영이라는 이름이 초연이 비 오는 산속에서 정신을 잃는 순간에 불렀던 이름과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필 전남편인지, 첫사랑인지 모를 놈의 이름이 제 비서의 이름과 같을 이유가 뭐란 말인가. 속이 뒤틀렸다.
“하하하. 저희 조부모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나름 괜찮기는 하죠. 근데 흔한 이름인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신후는 쓸데없이 친화력을 발휘하는 찬영을 보고 얼굴을 구겼다.
“강 비서 그만 나가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