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깊숙한 각인-32화 (32/84)

〈32〉

불길한 예감이 머리에 스쳤다.

“민신후 씨?”

“같은 집이 아니라 실망했습니까?”

신후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물었다.

은근히 농담 섞인 눈빛에 초연은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었다.

“장난치지 말고요. 이게 뭐죠?”

“그러면 내가 어디에 집을 얻어 줄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한 십 분 거리? 아니면 대략 한 시간 정도? 그 정도면 날 피할 수 있습니까?”

계약을 지키지 않는다고 생각한 건지 그의 눈빛에 질책이 가득했다. 초연은 움찔했다.

“내가 분명 당신 필요하다고 했을 텐데?”

신후가 한 발 다가왔다.

순식간에 둘 사이의 공기가 변했다.

손도 대지 않았지만 끈적한 시선에 절로 늦은 밤 자신의 침대 속에 몰래 들어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그를 상상했다.

얼마 전 그와 뜨거운 시간을 보냈던 몸이 그의 신호에 제멋대로 반응했다.

아래가 젖고 유두 끝이 간질거렸다.

“그래도 이건 너무 가까워서……. 솔이가 뭐라고 생각할지 생각 안 했어요?”

아무리 자신의 몸을 담보로 서울까지 따라왔지만 그렇다고 솔이가 버젓이 있는 집에서 그 짓을 저지르고 싶지는 않았다.

행여 솔이 들을까 주변을 둘러보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한 발 물러서는 초연의 팔을 그가 잡았다.

팔꿈치 안쪽 여린 살을 엄지로 쓰는 야릇한 움직임에 초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뭐가. 이것도 마음 같아서는 내 집에 데려다 놓고 싶은 거 솔이 생각해서 참은 건데.”

뜨거운 시선에 초연은 그가 정말 그러고도 남았을 남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긴, 할머니가 있건 말건 상관도 없던 사람이 애가 있다고 달라질까.

정말 기억을 잃어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구나.

“엄마! 여기 와 봐!”

그의 집에서 들리는 솔이의 목소리에 초연이 재빨리 그의 손을 쳐냈다.

아쉬운 듯, 초연을 잡았던 손을 내려본 신후가 손을 다시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내 집은 언제든 와도 됩니다. 집이 불편하면 당신 편한 곳으로 날 불러도 좋고.”

섹스할 곳을 알아서 고르고 연락을 하라는 말 같지도 않은 배려에 초연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벌써 그와의 이웃 생활에 숨이 막혔다.

***

이사랄 것도 없었다.

필요한 가구와 가전들은 이미 신후가 세팅해둔 뒤였고, 미리 올려보낸 짐도 모두 정리되어 있었다.

그녀가 가져온 소지품 몇 개 더 정리하는 건 한 시간도 안 걸렸다.

저녁을 함께 먹자는 신후를 피곤하다는 핑계로 보내버리고 솔이와 간단히 짜장면에 탕수육을 시켜 먹었다.

사실 초연은 솔이가 병원에서 퇴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몸에 좋은 음식을 먹이고 싶었다.

하지만 솔이가 이사하는 날에는 원래 짜장면을 먹는 거라고, 텔레비전에서 봤다며 꼭 해보고 싶다는 부탁에 그녀가 졌다.

식사하고, 집 안 구석구석을 구경하고, 샤워까지 마치고 나니 아홉 시.

어서 솔이를 재우고 그녀 역시 자고 싶을 만큼 피곤한 날이었다.

신후가 꾸며놓은 솔이의 방은 근사했다.

오래된 한옥에 인테리어랄 것도 없이 자동차가 그려진 이불과 베개로만 아쉬움을 달랬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전체적으로 대리석과 아이보리계열 로코코 풍의 가구가 꽉 찬 집안 다른 공간과 달리 솔이의 방은 푸른색 계열의 벽지에 원목으로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게다가 자동차 모양의 2층 침대와 그 아래 아지트 같은 공간은 그 나잇대 남자애들이 딱 좋아할 만한 디자인이었다.

그녀가 꿈으로만 그리던 솔이의 방을 신후가 마련해 주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이상했다.

다행히 솔이는 그녀의 기분은 모른 채 그저 새로운 방을 좋아하며 책도 보지 않고 바로 이불 속으로 직행했다.

솔이를 재우고 자신의 방에 돌아온 초연은 침대에 몸을 뉘었다.

창밖으로 환한 보름달이 보였다.

분명 청도에서 보던 달과 같은 달인데도 느낌이 달랐다.

어색하고 정이 가지 않았다.

언제 다시 청도로 내려가서 매일 보던 그 따뜻한 달을 볼 수 있을까.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방문이 열리고 솔이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엄마…….”

“왜?”

“같이 자면 안 돼?”

‘이리 와.’ 초연이 이불을 들어 올리자 솔이 환하게 웃으며 이불 속으로 쏙 들어왔다.

초연은 제 팔베개를 하고 누운 솔이의 머리를 정리했다.

그저 내 새끼 잘생겼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신후와 꽤 닮았다.

쌍꺼풀 없이 큼지막한 눈은 아직 초롱초롱했지만 이 눈도 나이가 들면 안광이 돌고,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꼼짝 못 하게 하겠지.

이 앙증맞은 콧대도 더욱 크고 단단해져 오만해 보이는 인상에 한몫하겠지.

보지도 않은 솔이의 미래 모습이 그려졌다.

그러면 그 사람의 잠버릇은 어떨까.

솔이처럼 옆으로 누워 잘까?

항상 후다닥 몸만 섞거나 그녀가 먼저 곯아떨어지고, 그가 먼저 일어나는 바람에 그의 자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었다.

문득 제 신경이 온통 옆집 남자에게 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머릿속 생각을 털어내려 솔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새집으로 이사 오니까 잠이 안 와?”

“응. 강이 엄청 커. 우리 동네 아지천이랑은 비교도 안 돼. 저기는 겨울에 얼어?”

“글쎄……. 옛날에는 얼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안 언다고 뉴스에서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왜? 겨울에 한강 얼면 썰매 타보고 싶어?”

청도는 서울에 비해 따뜻한 지역이었다.

눈이 오거나 저수지가 어는 일 역시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작년 한파에 저수지가 얼었고, 재윤이 솔이를 데리고 나가 썰매를 태웠다.

그 이후 몇 번 썰매를 타고 싶다고 졸라대는 걸 이렇게 따뜻한 지역에서는 어렵다고, 나중에 서울이나 더 북쪽으로 이사하면 놀자고 달랜 적이 있다.

“아니. 집에 가고 싶어.”

솔이가 고개를 도리도리하더니 그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의외의 대답이었지만 이해도 됐다.

아파서 온 곳인데, 친구도 없는 곳에서 뭐가 좋을까.

자신에게 저 달이 낯설 듯, 솔이에게도 이곳이 낯설겠지.

“그래 얼른 솔이 병 고치고 가자. 가서 아랫목에서 귤도 까먹고 호랑이가 잡아먹으러 내려오기 전에 이불 속에 꼭꼭 숨어 자자, 어흥.”

초연이 솔의 머리를 크게 베어 무는 시늉을 하며 장난쳤다.

어릴 적 솔이 안 잔다고 버티면 범규는 늘 잠 안 자면 호랑이가 내려와서 잡아간다, 겁을 줬다.

어릴 때는 꽤 잘 속더니.

이젠 저도 다 컸다며 전혀 속지 않은 솔이가 대신 눈을 빛내며 물었다.

“나 진짜 나을 수 있을까?”

“그럼. 아저씨가 낫게 해준다고 하셨으니 낫게 해줄 거야. 아저씨 말 믿지?”

“응! 여태껏 나랑 약속한 거 다 지켰어.”

초연은 가슴 한쪽이 시큰했다.

자신과의 약속은 안 지켜도 제발 솔이와의 약속은 지켜줬으면.

그래 준다면 그에 대한 원망도 미움도 이젠 다 훌훌 털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저씨 집에 재밌는 것도 엄청 많다? 아까 망원경 보러 오라니까 왜 안 왔어?”

“집 정리해야지 엄마가 그런 거 볼 시간이 어딨어.”

“치……. 시간 얼마 안 걸리는데.”

“이 엄마가 너처럼 노는 게 제일 좋은 나이인 줄 줄 아니?”

초연이 일부러 머릿속 기억을 지우며 솔의 코를 가볍게 잡고 흔들었다.

“아 참, 아저씨가 밤에 엄마랑 별 보러 오라 그랬는데 지금 보러 가면 안 돼?”

“안 돼.”

“왜?”

그의 집은 오늘도, 앞으로도 그녀가 절대 가서는 안 되는 곳일 뿐이었다.

“너무 늦었잖아.”

대충 얼버무렸지만, 초연은 덜컥 겁이 났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언제 이렇게 가까워진 걸까.

‘그래도.’ 입술을 내밀며 투정 부리는 솔이를 품에 꼭 안았다.

“솔아. 아저씨 자꾸 귀찮게 하지 마.”

“안 귀찮게 했어. 나 안 졸랐는데 아저씨가 책 사주고, 망원경 구경하라고 한 거야…….”

억울한 듯 솔이가 아랫입술을 삐죽거렸지만 그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아저씨도 아저씨 생활이 있는데 솔이가 불쑥불쑥 찾아가면 곤란해할 거야.”

“으응.”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그러면서도 엄마 말이니 어쩔 수 없이 대답하는 솔의 작은 등을 초연은 오랫동안 다독여주었다.

정을 주었다가 나중에 상처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것이 나았다.

***

신후가 본가에 도착하자 지은이 제일 먼저 나와 그를 반겼다.

“왔어?”

“할아버지 어디에 계십니까?”

신후는 가볍게 목인사를 하며 성식을 찾았다.

“서재에. 화 많이 나셨어. 기분 좀 잘 풀어드려.”

평상시라면 신후가 성식의 심기를 거스르든 말든 신경도 안 쓰던 지은이였다.

하지만 오늘은 성식의 마음이 곧 그녀의 마음이었기에 서재 앞까지 신후를 따라가며 단속했다.

“넌 도대체 뭘 하고 다니는 게야?!”

그가 문을 열자마자 성식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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