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깊숙한 각인-31화 (31/84)

〈31〉

결국, 동네 응급실에서 다시 산부인과로 간 초연의 임신 소식이 동네방네 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할머니……. 미안해.”

“아이다. 니가 와 미안하노. 아무래도 영이한테 뭔 일이 생깄는갑다. 전화번호 좀 도.”

“아니야. 내가 연락할게. 할머니도 아프잖아.”

“아이다. 내가 하믄 된다. 니는 아도 뱄는데 좀 쉬라 안 했나.”

초연은 차마 신후의 일을 순례에게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사실대로 말을 했다가는 순례가 충격으로 쓰러질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해서 순례가 아직 추운 날씨에 노상 전화를 붙잡고 사는 것도, 그의 자췻집 주소가 적힌 종이 한 장을 들고, 서울로 그를 찾아 나선 것도 말리지 못했다.

하지만 순례는 아무런 성과 없이 다시 내려와야 했고, 몸을 추스른 초연은 이번엔 자신이 그를 찾아 서울로 갔다.

그가 말한 학교에 민신후라는 이름은 있었지만, 복학 기록은 없었다.

인터넷 신문 기사를 모조리 검색해 〈MJ 인터내셔널〉의 본가가 있는 동네를 찾았다.

그것도 정확한 주소는 알 수 없어 온 동네 중국집과 부동산을 다니며 수소문했다.

그렇게 〈MJ 인터내셔널〉의 본가 대문 앞에서 초연을 발견한 지은은 다소 놀란 얼굴을 했다.

“무슨 일이죠?”

“오빠 한 번만 만나게 해주세요.”

“아가씨. 아가씨 인생도 젊은데 이제 본인 인생 살아야죠. 언제까지 헤어진 애인 미련 두고 살 거예요? 그런다고 신후, 아가씨한테 다시 안 돌아가요.”

“제발. 제발 한 번만…….”

헤어지더라도 얼굴을 보고 제대로 끝맺음은 하고 싶었다.

아니, 아이는 어떻게 할 거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이럴 거면 왜 날 사랑했냐고, 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준 거냐고 퍼부어주고 싶었다.

“사실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지금 신후 해외여행 중이에요.”

“네?”

“복학하기 전에 바람 좀 더 쐰다고 유럽 여행 갔어요.”

“그럴 리가…….”

“학교 가봤으면 알 것 아니에요. 이번 학기 등록 안 한 거.”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들이지만 증거가 그랬다.

간이라도 빼줄 것 같던 눈빛과 달콤한 말 한마디란 얼마나 의미 없는가.

초연은 그때 깨달았다.

“이거라도 받아요. 애 지우고 연락하면 유학이라도 갈 수 있게 돈 더 줄게요. 하지만 알죠? 허튼소리로 언론에 말하거나 하면 아가씨 앞날에도 좋을 거 없다는 거.”

초연은 지은이 쥐여 주는 돈을 뿌리치지 않았다.

어차피 깨어진 인연.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으니까.

그깟 민신후. 앞으로 죽을 때까지 찾지 않으리라.

나중에 나와 아이를 찾아와도 그때는 내가 당신을 모른 척하리라.

굳게 맹세했다.

그리고 신후를 지우고 살았다.

출산이 한 달 남은 시점, 순례의 폐렴이 급속도로 악화했다.

순례의 폐렴이 심해진 원인이 모두 자신이 쓰러진 후 신후를 찾아다니다가 그런 것 같아 초연은 죄책감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우야꼬……. 내 죽으면 우리 연이 불쌍해서 우야꼬. 콜록.”

“할머니……. 그런 소리 하지 마. 기운 내. 응? 내가 잘못했어. 다신 안 그럴게.”

순례를 볼 때마다 초연은 눈물 바람이었다.

그저 할머니와 아이만을 생각하며 버티던 초연에게는 힘겨운 현실이었다.

“연아. 니 정신 똑띠 차려야 한다. 니는 이제 얼라가 아이다. 니 배 속에는 니 아가 있다. 그 아는 니가 지켜야 하는 기라. 무신 일이 있어도 정신 똑띠 차리고 살믄 또 살만해 질끼라. 이 할미 없다꼬 너무 슬퍼하면 아한테 안 좋으니까 마이 슬퍼하지도 말고 정신 차리그래이.”

마지막 순간에도 순례는 초연과 그녀의 아이 걱정만 했다.

그렇게 순례를 떠나보내고 초연은 매일 울고만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순례의 말대로 그녀는 아이의 엄마였기 때문이다.

어린 게 지 엄마 팔자를 닮아 박복하다는 말도, 남자 잘못 만나 인생이 꼬였다는 말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일부러 더 씩씩하게 산후 조리원을 알아보고, 출산 준비를 했다.

하지만 산부인과에 남편과 같이 오는 여자들을 보면 한없이 죄인이 된 듯싶었다.

사람들의 시선 때문이 아니었다.

아빠 없는 아이로 자라게 될 아이에게 그녀는 죄인이었다.

해서 초연은 추운 겨울, 다시 한번 서울로 올라갔다.

일찌감치 해가 떨어진 그의 집 앞에서 무작정 아는 사람을 기다렸다.

지은이 나오면 어떻게든 물고 늘어져 신후와 연락이라도 한 번 해보려는 마음이었다.

저녁 여덟 시가 넘은 시각.

패딩과 핫팩으로 몸은 버틸 만했지만, 운동화 속 발가락과 귀는 찬기에 마비되어 감각이 없어질 지경이었다.

연신 손으로 귀를 막고 발을 동동거리는 그녀 앞으로 검은색 세단 하나가 지나가다가 그의 집 앞에서 섰다.

그리고 그 차에서 나오는 건 신후.

초연은 집으로 들어가려던 신후와 눈이 마주쳤다.

“찬영 오……. 아니 신…….”

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 미간을 살짝 찌푸린 신후가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고, 오히려 경멸 어린 시선.

초연은 지은의 말대로 그가 자신을 다시 만나길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오빠 없다고 못 살 줄 알아?”

덜덜 떨리는 몸을 추스르고, 아이가 배고프지 않게 든든하게 국밥까지 챙겨 먹고 부산으로 향하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추운 데서 몇 시간이나 떨다가 따뜻한 곳에 들어와서일까.

진통이 그녀를 괴롭혔다.

그리고 그 진통이 두 시간이 넘어가면서 점점 버틸 수 없을 정도로 거세졌다.

“아. 배가. 배가…….”

“아가씨. 어디가 아프오?”

“살려주세요. 애가, 애가 나올 것 같아요. 으윽.”

양수가 터진 걸 직감한 초연은 옆에 있던 노신사를 붙잡고 애원했다.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은 없었다.

그녀는 아이를 건강하게 낳아야 할 책임이 있는 엄마일 뿐이었다.

“이런. 아이가 나오려나 봅니다. 신랑은. 신랑 연락처가 어떻게 됩니까?”

“없어요.”

“그러면 부모님은. 어디 연락할 데 없어요?”

“없어요. 부산에, 부산에 병원 예약해 뒀어요…….”

“여기서 부산까지 못 갑니다. 안 되겠다. 여기서 내립시다. 여기 근처에 내가 아는 병원이 있으니 그리로 갑시다.”

그리고 어떻게 됐는지 초연은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오래된 한옥 아랫목에서 몸을 푼 후였다.

노신사는 동네 산부인과가 다 문을 닫아 집으로 산파를 불렀다고 했다.

지금은 덜하지만, 이 동네 그 산파 손에 태어난 사람이 스무 명도 넘는다며, 그중에는 판 검사가 된 사람도 있고, 의사가 된 사람도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초연을 안심시켰다.

“애는……. 건강해요?”

“그럼요. 아기 목소리가 쩌렁쩌렁하니 큰 인물이 될 거라고 합디다. 한 번 안아보겠소?”

“예뻐요.”

아직 눈도 못 뜨는 붉은 핏덩어리를 보는 순간 초연은 참고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갈 데는 있소?”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나랑 삽시다. 나는 딸이 없고, 그쪽은 부모가 없으니. 여기서 나랑 딸하고 아버지하고 삽시다.”

“어떻게 그런…….”

“아까 그쪽이 버스 타면서 나한테 사탕 하나 주지 않았소. 그 인연이라 여기시오.”

겨우 사탕 하나에 이렇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는 게 말이 맞나 싶었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지금 그녀는 자신과 솔이를 위해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네.”

그렇게 초연은 이범규 염색장의 딸로, 청도에 살기로 마음먹었다.

“아이 이름은 생각해둔 게 있소?”

포대기에 싼 작은 솔이를 품에 안고 초연은 창문을 바라보았다.

한지가 발린 문살에 소나무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여기가 소나무가 많은 동네입니다. 소나무 향이 좋지요?”

그녀가 살던 곳에서도 해송이 많았다.

소나무의 꽃말은 불로장생.

“솔이라고 지을래요.”

아가 아무 걱정 없이 건강히 자라렴. 엄마가 널 지켜줄게.

“그러면 성은?”

“민솔.”

차마 아빠의 성을 제대로 붙여주지 못하고 그저 이름으로 넣는 이 엄마를 용서하렴.

“이민솔이요.”

***

“다 왔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사이 어느새 신후의 차는 서울에 도착했다.

한강 변 고급 빌라 단지였다.

한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조망에 50평은 족히 되어 보이는 크기.

게다가 온통 대리석과 수입 가구로 장식된 내부는 한눈에 봐도 자신과 같은 보통 사람이 살만한 집은 아니었다.

“와, 엄마 집 엄청 좋아. 아저씨 내 방은 어디예요?”

“저기.”

“와! 대박!”

서울에 올라가야 한다는 소식에 조금 심란해 보였던 솔이도 신후가 꾸며놓은 자신의 방에서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고마워요. 근데 이렇게 큰 집 필요 없는데…….”

이 모든 게 초연에게는 부담이었다.

하지만 인제 와서 제 마음 편해지자고 이사 가겠다고 해봤자 일만 번거로워지고, 신후가 제 말을 듣지 않으리라는 건 뻔했다.

제 말을 들을 사람이라면 애초에 묻고 결정했겠지.

초연은 한숨을 쉬며 화제를 돌렸다.

“회사는 언제부터 출근해야 해요?”

“굳이 서두를 필요 없습니다. 솔이랑 초연 씨 적응부터 한 다음에 출근해요.”

“괜찮아요. 어차피 일하러 온 건데 빨리 시작해야죠.”

조급한 초연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신후가 잠시 그녀를 쳐다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다음 주 월요일. 내일부터 일 봐주시는 분이 와주실 겁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저 혼자 청소해도 충분해요.”

“솔이 병원도 다녀야 하고, 회사 일로 바쁠 겁니다. 게다가 어차피 내 집은 별로 치울 것도 없어서 괜찮습니다. 비용도 내가 알아서 처리하기로 했으니까 신경 쓸 거 없고.”

그의 집을 청소하는 사람이 여기까지 와서 또 청소한다는 말인가.

괜히 일하는 사람 번거롭게 하는 것 같아 미안했지만 고집스러운 신후의 모습에 초연은 별말은 하지 않았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알았어요.”

초연이 얼른 가보란 듯이 손을 내저었다.

피곤함과 귀찮음을 숨기지 않는 노골적인 내쫓음에 신후가 주머니에 손을 꾹 찔러넣고 말했다.

“급하면 벨 누르고.”

집도 모르는데 벨은 왜. 게다가 급한데 왜 그의 집까지 간단 말인가?

의아한 얼굴로 두 눈을 깜빡이는 초연을 보며 그가 말했다.

“살림살이 필요한 거 있으면 가져가도 좋습니다. 비번은 솔이 생일.”

이해할 수 없는 신후의 말에 초연의 미간이 점점 좁혀졌다.

“엄마. 아저씨 집 구경 갈래? 아저씨 집에 천체 망원경도 있대!”

제 방에서 나온 솔이 열린 현관문을 통해 쪼르르 나가 맞은편 집 비번을 누르는 걸 보고 초연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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