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잠시 후 두 사람은 초연의 방에 마주 앉았다.
행여 거실에서 얘기를 하다가 할머니가 이상한 소리를 들을까, 일부러 초연이 방으로 데려온 것이었다.
소파와 의자도 없이 침대만으로 방의 반이 차는 작은 방이었다.
바닥에 개다리소반을 사이에 두고 앉은 지은이 방 안을 휘, 둘러보았다.
온통 최고급에 둘러싸인 채 한평생 살아온 신후가 자의로 이런 집에서 몇 달 지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게 다 이 눈앞의 여자 때문이겠지. 지은은 짐작했다.
옷차림은 그다지 고급스럽지는 않았지만 반반한 얼굴에 자신의 앞에서도 쉽게 주눅 든 것 같지 않은 태도는 누가 보아도 눈길이 갈만했다.
“이름이……. 아까……?”
사진과 지은을 번갈아 보는 초연의 얼굴에는 아직 혼란스러움이 가득이었다.
“신후요. 민신후. 이름을 제대로 말 안 해줬나 보죠?”
작년 여름, 제대하고 온 신후가 자신과 부친의 전화 통화를 들었다.
그때 신후의 친모 치료를 적극적으로 진행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적극적으로 치료를 했다가 살아났으면 어쩔 뻔했냐며.
그랬다면 자신이 〈MJ 인터내셔널〉의 사모님이 될 기회는 얻지 못했을 것 아니냐는 내용이었다.
신후는 그녀에게 한바탕 퍼붓고 집을 나섰다.
그가 당장 민재나 성식에게 가서 사실을 말할까 두려웠지만, 다행히 신후는 그 누구도 찾지 않았다.
그제야 지은은 신후가 민재 역시 그의 친모 사망에 관련이 있다고 오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신후가 제 아버지를 오해하고 가출한 건 차라리 지은으로서는 다행이었다.
괜히 제 아비와 말을 섞다 자신이 저지른 짓을 민재에게 말하기라도 하면 민재가 자신을 내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렇게 된 마당에 신후가 어디 시골구석이라도 가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민재와 성식 역시 신후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자기 아들인 지후에게 더 정성을 쏟을 것 아닌가.
하지만 성식은 포기하지 않았다.
평소 그녀를 못마땅해하고 신후만 애지중지하던 성식은 사람들을 풀어 그를 찾았다.
신후의 방어 역시 만만치 않았다.
신용카드를 쓰지 않고, 핸드폰도 버렸다.
가출 초기 대량의 현금만 딱 한 번 인출 했을 뿐, 그 뒤로는 현금 인출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신분과 관련된 것들을 일절 사용하지 않으니 찾을 방도가 없었다.
3개월의 수혈 주기가 지나자 성식은 더욱 미친 듯이 신후를 찾기 시작했다.
아예 신후의 사진을 가지고 전국 수배령을 내렸다.
그러다가 얼마 전 결국 신후로 추정되는 사람을 본 것 같다는 제보를 받았다.
흥신소 사람을 보내 확인을 했고, 신후가 맞는다는 확답도 받았다.
신후의 가출 이유를 모르는 성식은 그래도 네가 어미니 한 번 내려가서 잘 설득해보고, 그것도 안 되면 수혈이라도 해주고 오라고 지은에게 명을 내렸다.
해서 신후의 사진 한 장과 이 집 주소, 그리고 간단한 정보들을 가지고 온 길이었다.
사실 신후를 데려오라는 특명을 받고 내려오긴 했지만, 지은은 내심 신후가 자신을 따라 안 올라가고 여기 눌러살았으면 좋겠다 싶었다.
“신후는 지금 어딨나요? 전화해서 지금 오라고 해요.”
아무래도 여기서 신후와 담판을 짓고 올라가는 게 낫겠다 싶었다.
어떻게 해야 신후의 입을 닫게 할 수 있나. 지은은 머리를 굴렸다.
“서울에……. 복학 신청하러 갔습니다.”
예상 밖, 초연의 대답에 지은의 한쪽 눈썹이 쓱, 하고 위로 향했다.
의외였다.
그냥 시골에 처박혀 살 건가 싶었는데 결국 정신을 차리고 돌아올 결심을 했나 보다.
신후가 서울에 올라올 준비를 했다는 사실에 지은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 스스로 모든 걸 포기하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모르겠지만 일단 복학까지 정신을 차리면, 언제 회사로 돌아오겠다고 할지 모를 일이었다.
신후가 돌아와 지후와 회사를 두고 싸울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졌다.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지후가 언제 대학까지 졸업하고 신후와 맞설 수 있을까.
그사이 신후가 회사를 장악할까 염려스러웠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이렇게 날아가나.
신후를 정신 차리게 한 원흉이 초연인 것만 같았다.
이 애를 신후에게서 떨어뜨리게 하면 신후 역시 실연의 상처에 서울행을 포기하려나?
“우리 신후 〈MJ 인터내셔널〉 민도재 사장의 아들이라는 사실 알아요?”
“아니요…….”
“신후가 말하고 싶지 않았나 보네……. 내가 괜한 걸 말했나 봐요, 미안.”
초연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보고 지은은 속으로 웃었다.
어린 여자아이 마음 하나 흔드는 건, 일도 아니다 싶었다.
이렇게 신후와 여자와의 사이에 균열이 생기고, 자존심이 상한 여자가 헤어지겠다고 난리라도 부려준다면.
이런 거지 같은 집에 남고, 복학까지 결심한 신후가 여자를 잡기 위해 여기 머문다면 그것으로도 꽤 괜찮은 성과였다.
“아참, 우리 신후랑 계속 만날 생각은 아니죠?”
이럴 줄 알았다면 돈 봉투라도 가져와서 모욕을 줬어야 했나.
아니면 커피라도 면상에 부어야 하나. 지은은 고심했다.
하지만 여자의 반응은 생각외였다.
“결혼, 할 겁니다.”
비록 혼란스럽지만 단단한 표정은 쉽게 변하지 않을 마음이라는 게 느껴졌다.
“젊은 아가씨가 눈치가 빠르네. 〈MJ 인터내셔널〉 후계자라니까 탐나나 보죠?”
혼잣말인 것처럼 비꼬는 말에 초연이 얼른 제 변명을 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전 〈MJ 인터내셔널〉 후계자인지 모르고…….”
“하지만 이젠 알았잖아요. 알았어도 신후와 결혼하겠다는 거잖아요, 지금. 이런 집에서 살면서 우리 집안에 들어오겠다니. 주제에 너무 욕심이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것도 어른들께 허락도 안 받고 본인들 마음대로 결정이라니. 정말 부모 없이 못 배운 티 내는 것도 아니고.”
지은은 어떻게든 초연의 입에서 신후를 포기하겠다는 말이 나오도록 신경을 긁었다.
“찾아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 우욱. 죄송합니다.”
초연이 다급히 손으로 입을 가렸다.
지은은 그제야 초연이 이 모욕에도 신후와 결혼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지 그 이유를 알았다.
임신한 것이다.
민신후. 죽어라 했더니 죽지도 않고, 씨를 달고 왔구나.
신후도 모자라 그의 자식까지.
제 아들은 어떻게 될지 머리가 아파져 왔다. 지은이 곱게 립스틱이 발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때였다. 지은에게 전화가 왔다. 그녀의 남편인 도재였다.
“네, 여보.”
여기까지 보내놓고 웬 또 전화람.
어서 빨리 신후를 데리고 오라는 재촉 같아 짜증 났지만, 지은은 기분을 숨기고 나긋하게 전화를 받았다.
- 신후가 서울로 올라오다가 사고가 났대!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지은의 얼굴이 굳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흥분되는 마음을 누르고 지은은 꽤 안타까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 이를 어째. 얼마나요?”
지은은 초연의 반응을 살폈다.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것인지 초연은 신후의 사고 전화라는 사실도 모르는 듯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초연이 신후의 존재를, 사고를 모르는 게 일을 처리하는데 훨씬 편할 테니까.
- 덤프트럭에 치여서 머리도 깨지고 혼수상태래. 과다 출혈이라는데 당신 당장 그리로 가봐! 장인어른께도 연락드리고. 얼른!
신후의 가출이 길어지자 성식은 전국 모든 병원에 신후의 사진을 돌렸다.
만약 이 사람이 들어오면 바로 연락을 하라는 내용이었다.
성식의 병원 수배령이 없었으면 손도 못 써보고 죽었을 텐데, 짜증스럽게도 신후는 또 한 번 살아날 기회를 얻었다.
“그래서 어디 병원이라고요?”
도재가 불러주는 병원의 이름을 종이에 적는 지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어쩌면.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릴 수도 있다.
전화를 끊은 지은이 두 손을 곱게 무릎 위에 포개고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바쁜데 시간 잡아먹어서 미안하네. 본론부터 얘기하죠.”
조금은 달라진 지은의 분위기에 초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우리가 막지 않아도 신후가 그쪽이랑 결혼할 생각은 없을 거예요.”
“?”
“제 아버지랑 조금 다툼이 있어서 한 몇 달 집 떠나서 바람 좀 쐬고 싶었던 것 같은데 이제 정신 차리고 서울로 올라올 생각이었나 보네요.”
한없이 너그러운 표정이지만 묘하게 속을 긁는 발언.
초연은 얼른 지은의 제멋대로인 해석을 정정했다.
“그런 게 아니라 저랑 결혼하기 위해 자리 잡으려고 졸업을 생각한 거예요. 오늘도 본가에 가려는 게 아니라 자취할 집 따로 계약하러 간 거니 어머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건 아니었을 거예요. 그래도 제가 찬영 오빠, 아니 신후 오빠랑 같이 가서 인사드리고…….”
“신후가 그럴 것 같아요? 〈MJ 인터내셔널〉을 버리고 당신이랑 이런 자취방에서?”
그럴 일 없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지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 채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깔보는 듯한 시선에 초연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지은과 눈높이를 맞췄다.
“두고 보면 알겠죠. 신후가 그쪽 연락을 받는지, 여기로 다시 돌아오는지. 그럼 누구 말이 맞는지 알지 않겠어요?”
지은이 손을 뻗어 초연의 손을 잡아당겨, 그 위를 다른 제 손으로 덮었다.
위로하는 듯하면서도 묘하게 빈정대는 것 같은 느낌.
“같은 여자로서 하는 말인데 너무 오래 기다리지는 말아요.”
하지만 신후의 어머니이기에 초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그렇게 지은이 가고 순례가 기다렸다는 듯 방 안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와. 그 여자 누구드나? 혹시 찬영이 엄마가?”
모르겠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다만 걱정 가득한 순례의 표정에 초연은 자신이 이렇게 넋 놓고 있을 일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얼른 개다리소반을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하이고……. 부모한테 말도 안 하고 여기 내려왔었는갑네. 우야꼬……. 근데 뭐라카는데? 결혼 이야기는 했고?”
입도 대지 않은 커피잔의 커피를 개수대에 버리고 잔을 깨끗하게 박박 닦았다.
조금 전 자신이 겪을 일도 이렇게 박박 씻어 버리고만 싶었다.
지은이 남기고 간 흔적을 모두 치운 초연이 그대로 제 방으로 들어갔다.
“할머니. 나 좀 피곤해. 쉴게.”
따라 들어오려는 순례를 거부한 채, 불도 켜지 않고 침대에 기어들어 갔다.
초연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챈 순례도 뭐라 입을 달싹이다가 곧 그만뒀다.
“그래그래. 이따 점심 묵을 때까지 좀 쉬아라.”
커튼도 걷지 않은 방. 문을 닫자 곧 어둡고 고요해졌다.
초연은 다시 벌떡 일어나 신후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장이라도 따져 묻고 싶은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하지만 연결음 소리가 한창 반복되다가 음성 메시지로 넘어가기 일쑤.
신후와의 통화는 좀처럼 연결되지 않았다.
초연은 핸드폰 충전기까지 연결한 채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통화 버튼을 계속 눌렀다.
“도대체 뭐 하느라 이렇게 전화를 안 받는 거야?”
오토바이를 타는 중이라 못 받는 걸까?
오후 6시가 넘어가자 그 가능성은 점점 떨어졌다.
이 정도면 서울 도착해서 계약서에 도장 찍고 내려올 시간이었다.
아무리 바빠도 해가 다 지도록 전화 한 통 할 시간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제발 전화 좀 받아…….”
시간이 지날수록 온몸이 점점 차가워졌다.
한기에 온몸이 오슬거리고 이가 달달 떨렸다.
혹시 사고라도 난 걸까?
신후의 통화목록은 온통 그녀였고, 가끔 일 관련 사람들이 있을 뿐이었다.
만약 그에게 일이 생겼다면 그녀에게 누구보다 먼저 연락이 왔을 것이다.
반복되는 기계 음성에 머리가 지끈거리고 배가 쿡쿡 쑤실 지경이었다.
초연은 몸을 한껏 쪼그려 다리를 세운 채 쿡쿡 쑤시는 아랫배를 문질렀다.
식은땀이 나는 이마를 손등으로 연신 훔쳤다. 속이 메슥거려 시원한 물 한잔이 마시고 싶었다.
“오빠 아니지……. 제발. 제발…….”
결국, 연결되지 않는 수화기를 붙들고 초연은 지은의 말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두고 보면 알겠죠. 신후가 그쪽 연락을 받는지, 여기로 다시 돌아오는지. 그럼 누구 말이 맞는지 알지 않겠어요?’
순례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연아, 밥 묵으라. 야가. 불도 안 키고 뭐 하고 있노.”
“할머니 나. 물 좀…… 으윽.”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초연이 얼굴을 찌푸리며 배를 감싸고 주저앉았다.
갑자기 수천 개의 바늘로 배를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와? 배 아프드나? 그르케 점심도 굶고 앉아만……. 아이구야?! 이게 뭐꼬? 피, 피가! 와이라노, 와이라노!”
초연의 연보라 치마가 붉게 변한 걸 발견한 순례가 깜짝 놀라 어쩔 줄 몰라 했다.
그제야 초연은 아이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할, 할머니 구급차. 구급차 좀 불러줘.”
바보같이. 허튼 생각을 하느라 널 생각 못 했어. 미안해.
초연이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배를 끌어안고 덜덜 떨었다.
여기서 울면 안 좋은 상상이 현실이 될까.
초연은 떨리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 울음을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