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임신의 기쁨을 함께 나누기도 전 신후는 서울로 떠날 채비를 했다.
오토바이에 올라 헬멧을 쓰는 신후의 모습에 초연은 불안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서울에 같이 올라갈까?”
“오토바이로 둘이 어떻게.”
“오토바이 타지 말고 둘이 고속버스 타고 가면 되잖아.”
해서 초연은 난생처음 신후에게 어리광을 부렸다.
하지만 신후는 그녀의 뺨을 커다란 손으로 어루만질 뿐, 초연의 불안함을 알아채지 못했다.
“됐어. 임신 초기에는 조심해야 한다며.”
실은 그의 머릿속에 다른 생각들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말은 했지만 실은 걱정이 됐다.
가장으로서 신경 써야 할 것들이 순식간에 수십 가지가 떠올랐다.
자신의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만으로 몇 분 사이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
막중한 책임감이 절로 느껴졌다.
집에 연락하지 않고, 결혼하고, 애를 낳아도 되나.
괜히 나중에 성식이 알고 초연에게 난리를 칠까 걱정이 됐다.
게다가 아이도 문제였다.
아이를 키우는 데 돈이야 문제 될 일이 없다.
문제는 자신의 병이었다.
만약 자신의 병이 유전이라도 된다면.
지은의 부친인 정 원장은 국내 특정 응고 혈액 보유자의 연결을 책임지고 있다.
만약 지은이 정 원장에게 말해 아이와 특정 응고 혈액 보유자와 연결을 막는다면.
지은의 치부를 알고 있는 그와, 그의 자식 목숨을 살려준다는 보장이 없다.
게다가 자신과 아이는 지은의 아들인 지후가 〈MJ 인터내셔널〉을 차지하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지은으로서는 없애고 싶을 것이다.
더러운 꼴을 보고 싶지 않아 집을 나왔지만 아이는 그럴 수 없다.
그리고 실은, 그 역시 초연과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지은에게 더는 당신의 더러운 피는 받지 않겠노라며, 죽을 결심을 하고 집을 나섰지만, 그때의 객기는 초연의 옆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자신이 건강하게 초연과 아이의 옆에 있기 위해서는 지은과의 협상이 필요했다.
자신이 〈MJ 인터내셔널〉에 가진 지분을 모두 내려놓는 조건으로 자신과 아이의 평생 수혈을 보장받는 것.
이번 서울 상경의 목표가 바뀌었다.
이런 과정을 초연이 알게 해서 좋을 리가 없다.
모든 걸 해결하고, 그때 얘기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래도.”
“가자마자 연락할게.”
환하게 웃으며 신후가 헬멧을 썼다.
“응. 꼭 도착하자마자 전화해야 해.”
부릉.
그녀의 마지막 당부가 바람결에 흩어졌다.
***
신후를 배웅해주고, 초연은 집 안으로 들어섰다.
늘 답답하다며 방문을 모두 열고 작업을 하던 순례가 요즘 들어 자꾸 문을 닫고 일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어디 갔다가 집에 들어오면 하던 일을 멈추고 후다닥 정리했다.
혹시 방앗간집 여자 주문을 또 받았나.
만약 이번에도 방앗간집에서 말도 안 되는 가격에 주문을 맡긴 거라면 일 시작하기도 전에 가서 따지리라.
초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방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문 닫고 뭐 해?”
“바람 차다. 문 닫아라.”
역시나 순례가 작업하던 무언가를 커다란 라면 박스에 넣고 박스 뚜껑을 여몄다.
그리고는 금세 다른 과자 박스를 앞에 끌고 와 그녀와 함께 작업했던 모시 한복을 꺼냈다.
옆집 김 씨 아저씨가 자신의 어머님께 드린다고 주문하고 간 옷이었다.
“내가 뭐 도와줄 거 없어?”
“됐다. 내 혼자 하믄 된다.”
초연은 순례의 말을 못 들은 척, 방 안에 들어가 문을 닫고 앉았다.
그리고는 순례가 그녀의 손이 닿지 못하게 저만치 옮겨놓은 라면 박스에 손을 뻗었다.
“뭐 하는데 나 보지도 못하게 숨겨? 그냥 같이해.”
“니가 하도 일하니까 폐 안 좋아진다고 잔소리하니까 그라는 거 아이가. 됐다. 한숨 자다가 할 끼다.”
순례는 이번엔 아예 베개를 꺼내 불까지 끄고 그녀와 라면 박스 사이에 턱 하니 자리를 잡고 누웠다.
초연은 라면 박스를 한 번 바라보다가 그냥 할머니의 옆에 누웠다.
사실 그녀가 순례의 방에 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근데 할머니이…….”
“와.”
진짜 잘 거라는 듯 눈을 감고 무심히 대답하는 순례의 등 뒤에서 초연은 조심스레 팔을 뻗어 그녀를 안았다.
예전에는 팔 가득 차던 몸이 어째 반도 안 되는 것 같아 더욱 꼭 끌어안으며 가슴을 만졌다.
‘축 늘어진 할매 가슴 만져 뭐 할라꼬.’ 하면서도 순례는 거친 손으로 초연의 손등을 쓸어주었다.
초연은 잠시 할머니와의 이 시간을 즐겼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옛날 트로트와 불투명 창문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 그리고 그 빛을 통해 뿌옇게 반짝거리는 먼지.
예전에는 이렇게 할머니와 누워 자신의 미래가 어떨까 생각한 적이 있다.
그리고 지금의 결과는 비록 그녀가 꿈꾸던 미래는 아니었지만, 누구보다 잘 살겠노라고, 할머니께 말씀드리고 싶었다.
“나 찬영 오빠랑 7월에 결혼하려고.”
초연의 말에 순례가 몸을 홱 돌리며 눈을 빛냈다.
“참말로? 영이캉 말이 된 기가?”
초연이 그의 이름을 들은 다음 날, 둘은 순례에게도 바로 그의 이름을 제대로 밝혔다.
다만 그동안 이름도 모른 채 폭주남이라고 불렀던 것이 창피해서 주남은 어릴 적 집에서 부르던 이름이고, 대외적인 이름은 찬영이라고 그와 입을 맞춘 후 둘러댔다.
다행히 순례는 의심 한번 없이 넘어갔다.
원래 그런 분이었다.
그녀가 팥으로 메주를 쑨 데도 그게 맞는 방법이라고 하고, 네가 만든 팥으로 쑨 메주가 제일 맛있다며 칭찬해줄 분이었다.
“응. 오빠랑 얘기했어. 바로 복학해야 하니까 학기 중에는 어렵고, 여름 방학에 식 올리기로.”
“그라믄 집은. 니도 서울로 갈 끼가?”
“그, 그래야지.”
아직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말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결혼을 했으니 같이 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문득 오늘 계약하기로 한 집이 아닌 조금 큰 데 다시 얻었어야 했나. 걱정됐다.
괜히 따라가지 못한 게 다시 아쉬워졌다.
조금 전 신후를 보내며 불안했던 마음은 날아간 지 오래였다.
초연의 머릿속은 그새 작은 단칸방에서 어떻게 신혼살림을 시작할 것인가.
무엇을 사고, 무엇을 챙겨갈까.
출산 병원은 어떻게 정해야 하나.
산후조리는?
취업은?
온갖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겨났다.
“잘됐다. 그라믄 빨리 만들어야겠다.”
평소에는 허리가 아프다며 천천히 일어나던 순례가 벌떡 일어나 불을 켜고, 라면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짙은 파란색과 붉은색, 녹색의 한복 갑사 원단들이 가득했다.
“이게 뭐야?”
“으응, 니 결혼식 때 이 할매가 곱게 한복 입혀줄라꼬.”
순례가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파란색 원단을 바닥 가득 펼쳐놨다.
그러고 보니 결혼식 폐백드릴 때 많이 입는 한복 색깔이었다.
자신의 결혼을 바라지만 말도 못 하고 한복을 준비했을 순례의 마음에 초연은 울컥했다.
“나 결혼 안 하면 어쩌려고.”
어느새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슬픈 건 아니었다.
그저 바닥 가득 펼쳐진 파란 원단에 신후가 사모관대를 갖추면 얼마나 멋있을까, 하면서 할머니 걱정을 잠시 잊은 채 그의 멋진 모습만 떠올린 자신이 꽤 괘씸해 흘린 악어의 눈물 같은 것이었다.
“기야 모르지만……. 이제 눈이 침침해가꼬. 기냥 쉬엄쉬엄 만들라 캤다.”
신후의 키가 큰 만큼, 그가 입을 옷을 재단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방 안 가득 천을 펼치고 자로 쓱쓱 원단을 정리하는 순례는 옷에 비해 한없이 작았다. 초연이 자로 손을 뻗었다.
“내가 할게. 나 줘. 단령 만드는 건 두루마기 만드는 거랑 재단이 비슷한가?”
어느새 그녀가 할머니와 같이 일한 지도 반년.
치마나 남자 바지같이 간단한 것만 만들던 초연도 이제는 여자 저고리며, 남자 저고리, 배자, 두루마기까지 가리지 않고 만들 수 있었다.
“안된다! 결혼식 한복 지 손으로 맨들면 평생 바느질만 하믄서 살아야 한다 안 했나? 니는 결혼하면 고생하지 말고 영이 벌어오는 돈으로 알뜰살뜰 살면 되는 기라.”
자를 뺏으려는 초연의 손등을 순례가 찰싹 때리며 질겁을 했다.
마치 자신의 인생이 그랬으니, 너 역시 네 옷을 만들면 나처럼 인생이 순탄하지 않을 거라는 듯한 순례의 질색하는 표정에 초연은 순순히 팔을 내렸다.
“알았어.”
“아 참, 근데 저 읍내에 있는 예식장. 거가 여름에 결혼식 하믄 더울 낀데…….”
초연이 사는 마을에는 예식장이라고는 그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흰색의 궁전 같은 모양의 1층짜리 예식장 한 군데밖에 없었다.
초연이라고 서울의 아름답고, 최신식의 식장을 모르지는 않는다.
다만 자신의 형편에 대한 객관적 판단이 빠를 뿐이었다.
신후와 자신 모두 부모가 없고, 나이도 어리고, 사회 경험도 별로 없어 결혼식에 초대할 지인도 많지 않았다.
굳이 서울을 고집할 필요도 없다.
사실 자신과 신후의 형편에 결혼식이 필요한가 싶어 혼인신고만 하고 살까도 고민했다.
하지만 할머니를 위해서도 결혼식 하는 모습은 꼭 보여드리고 싶었다.
자신을 손가락질했던 사람들 앞에서 보란 듯이 결혼해 신후를 떳떳하게 ‘우리 손주 사위’라고 부르게 해드리고 싶었다.
“요즘 예식장 다 에어컨 있는데 뭐.”
그러니 싼 가격에 결혼식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초연은 더는 바라는 게 없었다.
“그래도. 내가 몇 번 옷 맞춘 사람들 옷 입혀준다꼬 따라갔더니 신부들 더워가 땀을 찔찔 흘리던데…….”
“한복 입는 거 잠깐인데 신경 쓰지 마. 예쁘겠네.”
“하모. 니는 걱정 말기라. 이 할매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한복으로 만들어줄끼다.”
어느새 두 사람의 얼굴에는 진짜 결혼을 앞둔 신부와 가족의 행복감이 가득했다.
그때였다.
현관 밖에서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세요?”
초연은 밖으로 나가 방문객을 확인했다.
시골 마을에는 어울리지 않은 고급 외제 세단. 머리부터 발끝까지 휘감은 명품.
기껏해야 사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그녀의 마당보다 백화점 명품 매장이 훨씬 잘 어울릴만한 분위기를 풍겼다.
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는 지은의 시선에 초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분해졌다.
“누구세요?”
“여기가 신후 사는 곳이라던데. 신후 있어요?”
“잘못 찾아오신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 안 살아요.”
용건만 간단히 말하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는 초연을 잡은 건 여자의 다음 말이었다.
“이초연 씨. 맞죠?”
초연이 경계하는 눈으로 지은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그녀와 엮인 사람도 아니거니와 엮일만한 사람도 아니었다.
“누구시죠?”
예민해진 그녀의 질문에 지은은 대답 대신 옆에 있던 남자에게 턱짓했다.
남자는 순식간에 품에서 사진 하나를 꺼내 초연에게 건넸다.
사진을 확인한 초연의 두 눈이 커졌다.
사진 속 인물은 찬영이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