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깊숙한 각인-26화 (26/84)

〈26〉

신후가 그녀의 집에 눌러앉은 지도 6개월이 지났다.

그사이 해도 바뀌었다.

할머니의 미싱 앞, 창가에 올려둔 라디오에서는 이제 봄이라며 쉴 새 없이 봄 노래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초연에게 봄은 너무 먼 얘기였다.

“콜록콜록.”

“할머니 병원 가자.”

초연은 미싱을 멈추고 거치적거린다고 벗어두었던 조끼를 다시 걸치는 할머니를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병원은 무신.”

“기침 너무 심해. 벌써 몇 달째 기침 달고 살잖아.”

“겨울에 기침하는 기야 당연한기라.”

“기침 소리도 심상치 않아서 안 되겠어, 병원 가자.”

“이 할매가 어릴 때 폐를 앓아가 폐가 안 좋아서 그런 거래두.”

초연은 아예 재단하던 원단을 내려놓고 옷에 붙은 실밥을 떼어냈다.

가자 가자 말만 하니 도통 병원 갈 생각을 안 하셨다.

오늘은 꼭 모시고 병원을 가야겠다 싶어 지난겨울 신후가 첫 월급으로 사 온 할머니의 패딩을 꺼냈다.

매일 봄노래가 흘러나오는 요즘 날씨에 입기에는 다소 두껍기는 하지만 그래도 감기에 걸리는 것보다는 낫지.

안 간다고 버티는 할머니에게 억지로 패딩을 입혀 병원으로 향했다.

***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간단한 엑스레이만으로 결과가 나왔다.

결과는 역시나 폐렴.

“거봐. 진작 오자니까. 폐렴이 뭐야, 폐렴이.”

“미안타.”

속상해하는 초연의 앞에서 외할머니는 시험을 망친 어린아이처럼 주눅 들었다.

그 모습에 초연은 괜스레 미안해졌다.

여태껏 그녀를 키우며 싫은 소리 한 번, 목청 한 번 안 높인 할머니였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워주셨는데 그깟 폐렴이 뭐라고 할머니에게 투정을 부렸을까.

속상하다는 마음으로 포장하기에는 제 미숙함이 부끄러웠다.

“나한테 미안할 게 뭐가 있어. 대신 앞으로는 내가 하자는 대로 해야 해?”

“오야.”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초연은 핸드폰으로 폐렴에 좋은 음식을 찾았다.

면역력이 약해 낫는 게 더디다는 소리에 늦었지만 좋은 건 다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모두 마음일 뿐.

이것저것 폐렴과 면역력에 좋다는 것들을 장바구니에 담았지만 모두 결제하기에는 주저됐다.

“됐다. 약만 먹음 된다.”

“내가 알아서 할게.”

마땅한 일자리가 없는 시골 마을이다 보니 그녀가 일할 수 있는 곳도 녹록지 않았다.

할머니에게 한복 만드는 걸 배워 인터넷으로 판매를 해볼까 했지만, 요즘은 인터넷 한복 사업도 대규모 자금이 투입되어 맨몸으로 뛰어들기는 위험이 컸다.

해서 조금 있던 보증금도 야금야금 이제 거의 다 쓴 상황이었다.

다음 달에는 서울까지는 아니더라도 부산 시내에서라도 일자리를 잡아야겠다, 마음먹으며 결제 버튼을 눌렀다.

그때였다.

버스 정류장의 가림판 너머 익숙한 단어들이 그녀의 주의를 끌었다.

“아까 한복집 할머니랑 손녀딸 지나가는 거 봤어?”

그녀와 대판 싸웠던 방앗간집 여사장의 목소리였다.

“자식 앞세우고 힘들게 키우더니 늙어서 효도 받으시네.”

“효도는 무슨. 어린 게 발랑 까져서는.”

자신을 향한 악의적인 목소리에 초연은 기가 찼다.

아마 수금 이후 약이 바짝 올라 동네 사람들을 붙잡고 제 욕을 하고 다니는 것이 뻔했다.

혼자였다면 자리를 피해버리거나 한마디 해주었겠지만, 분란을 싫어하는 할머니였기에 초연은 못 들은 척 꾹 참았다.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할까.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집에 기둥서방 있는 거 몰라?”

기둥서방이라는 소리에 초연이 움찔했다.

“그 키 크고 잘생긴 총각? 할머니가 하숙 친 거라고 하시던데?”

옆집 숟가락 개수까지 알만한 시골 동네.

읍내라고 해봤자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신후가 등장한 후, 마을 사람들 모두 신후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건 초연 역시 알고 있었다.

옆집 미자 할머니도 찾아와서는 꼬치꼬치 캐물었고, 할머니와 종종 시장을 나서면 가는 가게마다 그 총각은 누구냐고 묻던 걸 초연 역시 모르지 않는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신후를 하숙생이라고 딱 잡아뗐다.

좁은 동네. 혹시 다 큰 손녀와 외간 남자가 한집에 사는 걸 보고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둘러댄다는 걸 그녀 역시 알았다.

해서 그녀 역시 신후와 가까이 지내는 모습은 마을 가까운 곳에서 보이지 않았다.

반경 5km 내에서는 손을 잡아본 적도, 마주 보고 웃은 적도 없다.

하지만 심심한 동네에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사람들은 놓치지 않았다.

“하숙은 무슨. 딱 봐도 초연이 그 기집애랑 살림 차린 거지. 내 동생이 부산 볼일 있어 갔다가 둘이 모텔에서 나오는 것도 봤대.”

거짓말이었다.

신후와는 부산 쇼핑을 하다가 손잡은 게 다였다.

그게 눈덩이처럼 부풀어져 모텔 출입이 돼버린 것이다. 억울했다.

“그래? 젊은 남녀가 그럴 수 있지 뭐. 그러면 초연이 올해 결혼하려나.”

“결혼은 무슨. 쪽팔려서 같이 산다는 것도 숨기는 판에.”

“왜 쪽팔려? 멀쩡해 보이던데. 나 여태껏 살면서 그렇게 잘생긴 사람 첨 봤잖아. 처음에는 여기 무슨 영화 촬영 왔는 줄 알았다니까. 그런 남편이랑 살면 하루만 살아도 소원이 없겠다. 호호호.”

“영화배우는 무슨. 영화배우 다 죽었나. 허우대만 멀쩡하면 뭐하나. 보니까 동네 양아치들이랑도 아는 사이에 막노동이나 다니는 거 같던데. 초연이년 서울서 대학 나왔다고 자랑하더니 그런 남자 데리고 온 게 부끄러우니 딱 잡아떼는 거지.”

“에이, 설마. 할머니랑 같이 사는데 그러겠어. 그 집 할머니가 그런 거 싫어하실 텐데.”

“그 애미에 그 자식이지. 그 집 딸도 고등학교 졸업 전에 초연이 임신해서 후다닥 결혼시킨 거잖아. 집안 내력을 누가 말리나.”

초연의 아랫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신과 신후 때문에 괜히 할머니까지 욕을 먹게 만드는 것 같아 속이 상했다.

초연이 당장 나가서 한마디 하려 일어났다.

하지만 자신의 손을 꾹 잡는 할머니의 손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할머니 저 사람들 거짓말하는 거야.’

‘내 니 마음 안다. 근데 그냥 내비 둬. 괜히 끼었다가는 니만 손해다.’

눈빛이 오갔고, 그 사이 버스가 도착했다.

“가자, 연아.”

초연은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버스에 올라타야만 했다.

텅 빈 시골 버스. 창가에 앉은 할머니가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제가 10년은 늙게 만들어버린 것 같아 죄송했다.

초연이 할머니의 팔짱을 끼며 애교를 부렸다.

“할머니 이상한 소리 듣게 해서 미안. 근데 진짜 모텔 다니고 그런 적 없어.”

물론 찔리는 구석은 있었지만 적어도 길거리 다니다가 남의 손가락질 받을 짓을 하고 다니지는 않았다.

자신의 부모님 때문에 자신을 키우면서 할머니가 얼마나 마음고생 했는지 알기에 적어도 이 남자 저 남자 만나고 다닌다는 소리는 듣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할머니도 앞으로 그런 사람 만나면 당당하게 쏘아붙여 주지, 당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내는 괘안타. 다들 남이캉 니캉 잘 어울리는 거 알아서 하는 소리 아이가.”

“우리 사귀는지 알았어?”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에 초연이 당황했다.

“이 할미는 뭐 연애도 안 해본 줄 아나. 그래 둘이 매일 눈 맞추는데 누가 모를 끼가.”

한집에 살면서 둘이 사귀는 걸 말씀드리면 행여 걱정하실까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말하지 않아도 할머니는 알고 계셨다.

미안함과 민망함이 몰려왔다.

“미안. 앞으로 조심할게.”

“조심할 거 읎다. 남녀가 사귀는 게 잘못된 것도 아이고. 다만 이 할미가 보기에 주남이 정도믄 괜찮으이 니도 마음 있으면 결혼하고 마음 편히 살기라.”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하려 건네는 말이지만, 그 말 속에 자신을 향한 염려가 있음을 초연은 모르지 않았다.

***

“할머니는?”

퇴근 후 집에 돌아온 신후가 할머니부터 찾았다.

매일 저녁 그가 오는 시간에 맞춰 식사 준비를 마치고 셋이 함께 식사하는 시간이 이젠 그에게 너무 당연한 일상이었다.

혼자 자신의 방에서 미래에 대해 이것저것 끼적이던 초연은 신후의 목소리에 쪼르르 거실로 나갔다.

초연은 벽시계를 힐끗 확인했다. 딴 생각하느라 저녁 준비도 못 했다.

“옆집 미자 할머니 댁에. 밥은?”

신후가 그녀에게 검은 봉지를 건넸다. 삼겹살과 상추가 들어있었다.

“이게 뭐야?”

“삼겹살. 할머니 좀 마르신 거 같아서 같이 먹을까 해서 사 왔지.”

“월급날이야?”

신후의 한껏 의기양양한 표정에 그제야 초연은 오늘이 신후의 월급날임을 깨달았다.

지난가을부터 신후는 일을 다녔다.

그녀의 친구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인력 사무소를 통해 공사판, 도배, 전기공사, 미장. 가리지 않고 일이 있는 곳이면 따라다녔다.

초연은 친구를 통해 신후의 머리 회전이 빨라 일을 잘 익히고, 말귀를 잘 알아먹는다고 공사장 소장이 사무직 정직원이 되라고 권유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좋은 기회인데 신후가 단번에 거절했다며, 도대체 어떤 인간이냐며 묻는 친구에게 초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 역시 신후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뉴스를 보거나 세계 경제나 최신 이슈에 대해 말할 때마다 얼핏 보이는 통찰력에 원래 몸은 쓰는 직업은 아니었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평상시라면 수고했다고 우쭈쭈라도 해줄 테지만, 오늘 초연은 그럴만한 기분이 아니었다.

“밥 차려줄게. 기다려.”

초연은 후다닥 주방으로 몸을 피했다.

밑반찬 몇 개를 꺼내 밥상에 올리고, 된장찌개를 데우는데 신후가 다가와 뒤에서 그녀를 안았다.

목덜미에 닿는 그의 입술에 초연이 화들짝 놀랐다.

“어머, 뭐 하는 거야?”

“할머니 옆집 가셨다며.”

눈치도 없이 신후의 손이 그녀의 상의 속을 파고들었다.

커다란 손으로 아랫배를 뭉근하게 쓸고 가슴을 한 움큼 크게 쥐고 주물렀다.

마치 그녀의 몸이 제 것인 것처럼.

초연이 어깨를 털며 그를 밀어냈다.

“하지 마.”

“네 젖꼭지는 매일 꾸준히 만져줘야 나온다니까?”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며 신후가 브래지어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어 유두 자리를 긁었다.

어느새 그의 손길에 익숙해진 몸이 찌르르하고 울렸다. 아랫배가 조여들며 왈칵 젖었다.

몸과 다르게 머리로는 그러고 싶은 기분이 절대 들지 않았다.

“하지 말라니까?”

초연이 좀 더 강하게 몸을 틀었다.

제가 듣기에도 꽤 날카로운 목소리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을 제 것처럼 만지는데 정작 자신은 그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이름도 모르고, 정체도 몰랐다.

자신이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를 만큼 무모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름도 모르고 정체도 모르는 사람과 사귀는 중이었다.

신후가 그녀를 돌려세웠다.

싱크대 양쪽을 손으로 잡고 허리를 낮춰 눈을 맞췄다.

어느새 그의 눈에도 장난기가 쏙 사라져 진지했다.

“무슨 일인데?”

진지한 표정의 그는 그녀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어떤 기운이 느껴졌다.

얼굴을 보고서는 아까처럼 막 대할 용기는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오늘 있었던 일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제 사귄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꼬치꼬치 캐묻고 결혼 계획을 세우자는 게 과연 말이나 된단 말인가?

만약 결혼 생각이 없으면 이 집을 떠나달라고 했다가 정말 그가 떠나버리기라도 하면.

몇 시간 동안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들이었다.

그녀가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있자, 그 역시 표정 변화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좋아. 생각 정리되면 말해.”

네가 대답을 안 하면 절대 팔을 풀어주지 않겠다는 듯한 고집이 느껴졌다.

결국, 불편한 침묵과 그의 집요한 시선에 초연이 불퉁한 목소리를 냈다.

“모르겠어.”

“뭐가?”

“난 오빠에 대해 아는 게 없잖아.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이름도, 학교도, 가족 이야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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