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초연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얼어붙은 사이, 신후가 남자에게서 종이를 빼앗았다.
신후의 날카로운 눈이 결과지를 빠르게 훑어내렸다.
그는 AB형이기 때문에 그의 자식으로는 절대 O형이 나올 수 없다.
그런데 솔이의 혈액형이 O형이었다.
검사지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그의 눈빛이 한없이 흔들렸다.
“말도 안 돼…….”
초연은 남자와 은밀하게 눈빛을 교환했다.
아까 규림이에게서 신후가 같은 병을 앓고 있다는 정보를 들은 뒤 초연은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걸 짐작했다.
꿈에서 본 일 하나에도 집요하게 파고드는 신후가 이런 일을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생각한 방법이 혈액형 검사.
실은 재윤을 통해 가짜 혈액형이 적힌 검사지를 만들어 신후가 볼 수 있는 곳에 놔둘 생각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신후가 먼저 피검사를 의뢰했다.
그래서 재윤이 급하게 가짜 서류를 만들어 와서 중간에 서류를 바꿔치기를 한 뒤,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 배달한 것이다.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남자는 그녀에게 눈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혹시 눈치 빠른 신후가 알아채지는 않을까, 초연은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애써 감추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혼란스러운 신후의 표정은 그가 이 검사를 믿는다는 방증이었다.
그제야 한숨 돌린 초연이 표정을 정리하고 그의 손에서 검사지를 빼앗았다.
“규림 씨에게 들었어요. 민 이사님이 솔이와 같은 병이라고. 하지만 희귀한 병이라고 이 병이 반드시 유전병이 아니라는 사실은 민 이사님이 가장 잘 아시잖아요.”
혼란스럽던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차분한 초연의 반박에 그의 눈빛이 당장이라도 그녀를 어찌할 것처럼 매섭게 변했다.
“하나는 우연일 수 있지. 하지만 그 수많은 우연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걸 우연으로 치부하는 게 난 더 수상한데.”
“그런 식의 착각. 상대방에게 실례라는 생각 안 하세요?”
“실례?”
무척이나 재밌는 단어라는 듯, 그의 매혹적으로 휘어지는 그의 입매가 초연의 시선을 끌었다.
초연은 아름다운 그의 입매를 보다가 시선을 올려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입과는 달리 웃음기라고는 전혀 없는 차가운 눈이었다.
피까지 식혀버리는 듯한 시선에 초연은 온몸이 으슬으슬해지는 기분이었다.
“네. 내 행동을 당신 뜻대로 해석하는 것, 당신이 꿈에서 본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나에게 강요하는 것. 모두 상대방에게는 굉장히 실례되는 행동이에요.”
“그러면 어젯밤 우리에게 있던 일은. 그것도 실례인가?”
신후가 비꼬는 듯한 시선으로 천천히 그녀의 몸을 훑었다.
마치 옷 속에 가려진, 어젯밤 그가 만지고 빨았던 맨살을 기억이나 하는 것 같은 노골적인 시선에 속옷 아래 유두가 꼿꼿하게 섰다.
초연은 더욱 단단한 얼굴로 턱을 치켜들었다.
“성인 남녀가 한순간 불타오르는 건 쉬운 일이죠. 그걸 가지고 과한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성인답지 못해요.”
자신을 찔러대는 것 같은 신후의 눈빛에 초연은 온몸이 따끔거렸지만 괜찮았다.
이제 정말 자신에게 오만 정이 떨어져 보기 싫을 테지.
몸을 돌려 나가려는데 신후가 그녀의 팔을 잡아 세웠다.
“그래요? 좋아요. 솔이 일은 내가 착각이라고 칩시다.”
“?”
“대신 나와 거래를 합시다.”
초연이 무슨 말인가 싶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단단히 다물린 입과 굳은 입술로는 도저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다가 문득, 무언가 떠올랐다.
“일 말인가요? 그거라면 이미 안 한다고…….”
“아니. 당신의 시간을 원한다고.”
혹시 자신의 몸을 원한다는 건가 싶어 초연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어졌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했잖습니까. 내 평생 당신만큼 날 자극하는 여자는 없었다고.”
신후가 피식 웃으며 초연을 바라보았다.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며 엄지로 그녀의 손목 안쪽 여린 살을 여러 번 바깥에서 안쪽으로 쓸었다.
어젯밤 그녀의 예민한 살점들을 여러 번 비벼 깨우던 손짓이었다.
“이봐요, 민 이사님!”
초연이 수치심에 그의 손에서 팔을 빼려 하자 신후가 팔을 확 잡아당겼다.
덕분에 그녀의 몸이 그에게 거의 밀착되었다.
가까워진 탓에 두 사람의 키가 맞지 않았다. 신후가 그녀의 턱을 단단히 잡아 치켜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뜨겁게 얽혔다.
“이거 놔요!”
“대신 솔이 병은 내가 책임지지.”
도리도리 그의 손에서 턱을 빼려던 초연이 그의 말에 고갯짓을 멈추고 신후를 올려다보았다.
“당장 서울에 올라가서 특정 응고 혈액 보유자를 세 명 붙여줄 겁니다. 분기마다 수혈은 평생 걱정하지 않을 수 있도록.”
어느새 초연은 그의 품에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사실조차 망각했다.
“그리고 솔이의 치료제는 평생 걱정하지 않도록 대줄 겁니다. 적어도 지금 가진 병 때문에 위험에 빠지는 일은 없도록.”
신후는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쓸었다.
정말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했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초연이 자신과 과거에 어떤 인연이 있든 말든, 현재의 그가 현재의 초연을 원한다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다.
과거의 그가 그녀의 마음을 갖지 못했더라도 지금의 그는 다를 것이다.
지금의 그는 과거의 그보다 똑똑하고 가진 게 많고, 지금의 초연은 과거의 초연보다 약점이 많을 테니.
절대 초연을 놓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정…… 말이에요?”
자신이 아닌, 자신이 줄 수 있는 것들에 흔들리는 초연의 눈빛에 신후는 씁쓸했다.
자신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속이 비틀리면서도, 일단은 이것으로 됐다고 자위했다.
“치료제 무상 제공이 못 믿겠다면 적당한 금액을 일시금으로 지급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 모든 건 문서로 기록할 겁니다.”
“왜…… 그렇게까지…….”
“말했잖습니까. 어젯밤 일이 그저 그런 불장난이었는지, 정말 우리 사이에 뭔가가 있는 건지. 옆에 두고 확인해볼 시간이 필요하다고.”
신후가 그녀의 몸을 노골적으로 훑었다.
살짝 벌어진 블라우스 사이로 그의 시선은 어느새 블라우스와 브래지어를 벗기고 그 안에 탐스러운 가슴을 발라 먹는 중이었다.
잘생긴 외모 탓에 그에게 관심을 표명하는 여자는 많았다.
하지만 문제는 도통 동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어쩌다 몇 번 데이트를 해봤자, 무언가 마음속에서 돌부리처럼 걸리적거렸다.
한데 초연의 앞에서는 그런 게 없었다.
이 여자와 같이 있으면 다른 생각은 나지 않았다.
더불어 이상하게 이 여자의 옆에서는 잃어버린 기억들도 자꾸 떠올랐다.
이 여자가 자신과 관련 있는 여자는 아닐지라도 분명 기억을 찾아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러니 그가 초연을 갖고 싶은 건 당연한 마음이었다.
“사람들이 알면 어찌하려고요. 분명히 당신도 주변 사람들에게 욕먹을 거예요.”
그의 품 안에서 파르르 떨며 초연은 그의 슈트 깃을 꼭 쥐었다.
그녀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과연 내가 그와 함께 지내면서 버틸 수 있을까.
“아, 명분. 일단은 프로젝트 때문에 서울 올라오는 거로 합시다.”
태연하게 대답하는 신후는 그녀가 어떠한 문제를 내도 답을 준비한 사람처럼 여유로웠다.
도통 말이 통하지 않는 신후를 보며 초연은 결국 자신이 질 것 같다는 절망감을 느꼈다.
“민신후 씨…….”
반쯤 기세 꺾인 초연을 보며 신후가 시계를 확인했다.
그리고는 그녀의 흔들리는 눈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다시 한번 말했다.
“시간 많이 줄 수 없습니다. 한 시간 후 난 서울로 떠날 겁니다. 그때 함께 가지 않겠다면 이 조건은 영원히 날아가는 거니 잘 생각하고 대답해요.”
말을 마친 신후가 그녀의 몸을 풀어주었지만, 초연의 손은 그에게 잡혀 있던 상태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허공에 멈춘 손을 힐끗 바라본 신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감돌았다.
뒤돌아 떠나는 신후를 바라보며 초연은 자신이 이미 그가 채운 족쇄를 차고 있음을 깨달았다.
***
사흘 후, 병원 앞.
초연은 솔이를 구급차에 태우는 사이 재윤과 작별 인사를 했다.
“진짜 서울로 가겠다고?”
“그 사람이 솔이 살려준대.”
사흘 전 신후는 초연의 대답을 듣고 미리 정리하겠다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사이 초연은 청도 병원에 남아 솔이가 회복되길 기다리며 간단한 이사 준비를 했다.
오늘은 솔이와 함께 서울로 올라가는 날이었다.
서울에 오래 묵을 생각은 아니지만, 자신과 솔이의 짐과 염색에 필요한 작업 도구까지 챙기니 짐이 꽤 됐다.
이삿짐은 이미 신후가 알려준 주소로 출발한 상태였다.
“가지 마.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재윤 씨. 그러지 마. 이미 재윤 씨한테 너무 많은 신세를 졌어.”
늘 솔이에게 신경을 많이 써줘서 고맙던 재윤이었다.
한데 며칠 전에는 혈액형 서류 위조 건으로 그에게 못 할 짓도 시켰다.
친분을 이용해 재윤에게 위법행위를 부탁한 거 같아 마음이 내내 불편하고 미안했다.
“내가 서울 가서 방법을 더 찾아볼게.”
“알잖아……. 찾아도 내 형편에 치료비며, 수혈 비용이며……. 감당할 수 없어.”
“같이 지내다가 그 사람이 솔이가 자기 자식이라는 걸 알면.”
“그전에 일을 처리하고 내려올 거야.”
사실 초연은 재윤에게 모든 걸 말하지는 못했다.
그가 자신을 섹스 파트너로 원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신후가 자신을 처음 찾았던 핑계를 댔다.
〈MJ 인터내셔널〉과의 프로젝트를 걸고 솔이의 치료를 약속받았다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안에 다른 계약이 또 있는 게 문제였지만.
굳이 개인적인 일을 초연은 재윤에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복잡한 표정의 초연을 보며 재윤은 불안해졌다.
이대로 초연이 간다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
조금만, 조금만. 완벽한 타이밍을 찾았지만 어쩌면 영영 완벽한 타이밍 같은 건 없을지 모른다.
“초연 씨 나랑 결혼할래?”
“재, 재윤 씨…….”
생각지도 못한 재윤의 고백에 초연이 놀라 눈만 깜박거리는 사이.
재윤의 질문에 대답을 한 건 다른 사람이었다.
“대단한 자신감이군. 이 사람이 솔이 목숨보다 당신을 택할 거라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온 거지?”
어디에선가 나타난 신후가 초연의 팔을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민 이사님!”
“내가 분명히 말하지 않았습니까. 사내새끼들 속은 똑같다고.”
초연을 품에 안은 신후가 잔뜩 성난 표정으로 재윤을 바라보았다.
“그런 게 아니라…….”
“닥쳐요. 이 자리에서 이 인간 감쌀 생각이면 내 차에 탈 생각 말고.”
그 말인즉슨, 앞으로 솔이를 살릴 기회 같은 건 생각지도 말라는 경고였다.
초연은 말없이 그가 이끄는 대로 그의 차 옆자리에 올랐다.
차마 신후의 눈치가 무서워 재윤과는 눈인사도 하지 못했다.
“물론 계약이지만 나랑 있을 때는 나에게 최선을 다해야 할 겁니다. 날 밀어내는 건 괜찮은데 다른 놈을 머리에 담고 나랑 있는 건 기분 더럽거든.”
어느새 고급 세단이 병원을 빠져나갔다.
초연은 사이드미러로 멀어지는 청도를 바라보았다.
청도에 처음 왔을 때처럼, 앞으로의 자신의 앞날이 그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