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차가 막 마당을 나서려는데 규림이 차 앞을 막아섰다.
“빨리 타.”
신후가 별말 없이 규림을 차에 태웠다.
한시가 바쁜데 규림까지 태우기 위해 멈춰선 신후 때문에 초연은 애가 탔다.
하지만 괜히 신후의 운전에 방해가 될까 솔이를 껴안고 작게 ‘빨리, 빨리.’만을 되뇌었다.
단번에 보조석에 올라탄 규림이 뒷좌석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제가 혈우병 D형에게 수혈할 수 있는 특정 응고 혈액 보유자예요. 서울까지 갈 필요 없이 근처 수혈 가능한 병원으로 가면 돼요.”
세상에 어떻게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잠시 멍하던 초연이 눈물을 흘리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흐흑.”
“그리고 이 근처 사는 보유자도 한 명 알아요. 전화해서 와달라고 할게요. 그 정도면 서울에서 치료제 내려오는 시간은 벌 수 있을 거예요.”
안도감에 초연은 축 늘어진 솔이의 몸을 껴안고 다시 한번 눈물을 흘렸다.
***
재윤이 미리 말해둔 덕에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솔이는 규림의 피를 바로 수혈받을 수 있었다.
원래 일반 사람들은 혈액형에 따라 수혈받을 수 있는 혈액형, 없는 혈액형이 있다.
하지만 솔이처럼 혈우병 D형의 경우는 거의 응고인자가 없기에 어떠한 혈액형의 피도 수혈받을 수 있다.
다행히 규림과 규림 지인의 수혈로 급한 불은 껐다.
하지만 이미 출혈이 시작된 상황이라 두 사람의 피만으로는 모자랐다.
솔이 같은 혈우병 D형의 경우 미리 예방 목적으로 수혈받아 혈액 내 응고인자를 충분히 키워두지 않은 상황이라면 사고 후 급하게 수혈해봤자 소용이 없다.
급하게 체내 응고인자 수치를 정상인 만큼 만들려면 엄청난 양의 특정 응고인자 혈액을 때려 박아야 하는데 그만큼의 수혈을 받는 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반드시 치료제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솔이가 수혈받는 동안, 수혈실 밖에서 재윤은 자신의 대학 동기인 담당 의사를 붙잡고 물었다.
“어떻게. 치료제 구했어?”
“지금 이 근처 병원에는 보유분이 없고, 알아보니까 서울 〈K 병원〉에 있다는데 어려울 것 같아.”
보통 치료제가 급할 경우 서울에서 지방 간 구급차를 이용한다.
하지만 항상 구급차가 즉시 준비되는 건 아니었다.
병원에서는 기다리면 배차가 될 거라고 말하지만 한 시간 한 시간이 소중한 상황에서 구급차가 구해지길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그동안 초연은 이런 상황을 대비해 많은 시나리오를 생각해두었다.
병원에서 방법이 없다면 자신이 무슨 수를 써서든 방법을 만들 것이다.
“사설 구급차는요? 아니면 제가 택시 섭외해서 보낼 테니 그걸 타고 와주시면 안 될까요?”
“소용없을 겁니다. 지금 하행선 양산 쪽에서 17중 추돌 사고가 나서……. 아마 못 올 겁니다.”
고속도로가 막혔다고 다른 길로 돌아서 오자니 또 시간이 지체된다.
치료제를 제때에 갖고 오지 못한다는 건, 곧 죽음을 의미한다.
이를 말하는 의사의 얼굴도 심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
의사의 말이 초연의 귀에는 솔이가 곧 죽을 거라는 사망 선고처럼 느껴졌다. 다리의 힘이 풀렸다.
주르륵, 무너지는 초연을 붙잡은 신후가 의사에게 물었다.
“이 근처에 헬기 착륙장이 있습니까?”
“이쪽 병원들은 없고 부산대 병원에 있습니다. 거리도 멀고……. 이런 거로 헬기를 띄워주지는 않을 겁니다.”
“청도에는요?”
“급한 마음이신 건 알겠지만 이런 일로 헬기를 띄워주지는…….”
“남산이요! 청도 남산에 헬기장이 있어요.”
초연이 신후를 붙잡고 다급히 말했다.
지금 그녀는 신후의 도움이든 뭐든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솔이를 살릴 수만 있다면 제 목숨이라도 내어주고 싶었다.
한 번 초연을 바라본 신후가 의사의 말은 무시한 채 어디론 가로 전화를 걸었다.
“강 비서. 지금 당장 〈K 병원〉으로 가서 치료제 하나 가지고 청도로 와. 아니. 난 괜찮으니까 할아버지께는 말씀드리지 말고 바로.”
***
신후의 힘은 대단했다.
회사의 헬기를 이용해 그로부터 한 시간 조금 넘어 치료제를 솔이의 몸에 투약할 수 있게 만들었다.
치료제를 맞춘 후, 의사는 이제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며, 솔이는 운이 좋은 아이라며 위로해주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은 아니었다.
체내 출혈이 있을 수도 있기에 초연은 솔이의 얼굴 한 번 볼 새 없이 솔이를 바로 MRI실로 들여보내야 했다.
아직 마음은 불안하지만 제 할 일을 마친 규림에게 초연은 MRI실 앞에서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너무 감사합니다.”
사실 초연은 규림에 대해 좋은 감정은 아니었다.
신후의 집안에서 연결해주려 애쓰는 여자.
그런 여자가 신후의 옆에 서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질투가 났다.
해서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기 힘들어 아까 규림을 보았을 때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않고 자리를 피했다.
그런 규림이에게 솔이의 목숨을 빚졌으니, 초연에게도 규림은 생명의 은인이었다.
다시 규림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초연은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래. 어떻게 마침 특정 응고 보유자분이 옆에 계셨는지. 이게 다 솔이 명줄이 길어서 그래. 앞으로도 문제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좀 앉아서 쉬어.”
전남편의 새로운 약혼녀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는 게 쉬울 리는 없지. 초연의 기분을 눈치챈 재윤이 조금 가벼운 투로 초연을 달랬다.
“민 이사님 덕분이죠.”
자신의 모든 공을 신후에게 돌릴 정도로 신후를 좋아하는 건가.
“네……. 민 이사님이 헬기도 불러주시고, 민 이사님 덕분에 규림 씨도 이곳에 온 거니까. 민 이사님 덕분이 맞네요.”
솔이의 생부인 신후의 공치사를 규림에게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초연은 입이 썼지만 애써 웃으며 대꾸했다.
“그게 아니라 민 이사님도 혈우병 D형인 거 모르셨어요? 민 이사님이 그 병을 앓지 않았다면 저도 〈MJ 인터내셔널〉에 일할 일도 없고, 오늘 이렇게 솔이를 만날 일도 없었겠죠.”
“아…….”
그 역시 솔이와 같은 병을 앓고 있다는 소리에 초연은 심장이 내려앉았다.
혹시나 돌연변이로 생긴 줄 알았는데 역시나 솔의 병은 유전이 되었던 것이었다.
“모르셨어요? 저는 두 분이…….”
초연의 귀에 규림의 말이 더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솔이의 친부일 뿐만 아니라 솔이의 병 역시 그로부터 유전되었다는 사실.
빼도 박도 못하는 그의 자식이라는 증거였다.
초연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
병원 밖 정원에서 신후는 강 비서와 대화를 나눴다.
“이사님한테 큰일 난 줄 알고 죽는 줄 알았습니다.”
“할아버지께는 말씀 안 드렸지?”
“전 안 했지만 아마 곧 아시게 될 겁니다. 병원 측까지는 제가 막을 힘이 없어서요.”
“하긴.”
성식의 정보력을 강 비서가 막을 수는 없었다.
조금 시간을 늦출 수는 있지만 결국 모든 정보는 성식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사실 성식이 제가 다친 줄 알고 부산을 떨까 봐 막은 것이지 끝까지 막을 생각은 아니었다.
어차피 초연의 존재를 알게 될 성식이었다.
“그나저나 그 병이 그렇게 흔한 병입니까? 이사님 말고 그 병 앓는 사람 처음 봅니다.”
“흔하지 않지.”
신후의 시선이 통창 안쪽, MRI 촬영실 앞에서 솔이를 기다리는 재윤과 초연에게 닿았다.
결국, 도움을 준 건 자신인데도 초연은 연신 재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감사의 인사든, 솔이에 대한 상의든. 그 무엇이든 둘 사이에 그가 낄 자리는 없어 보였다.
말을 들을 수 없지만 둘의 애틋한 눈빛이 오가는 꼴을 보고 있으려니 속이 뒤틀렸다.
“그런데 혹시 이사님 아들이거나……. 그런 건 아니죠?”
“왜 아니길 바라는데?”
신후는 몸을 돌려 강 비서를 바라보았다.
마치 절대 그의 자식이 아니길 바라는 듯한 강 비서의 눈빛에 신후의 표정이 매서워졌다.
“아니, 이사님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요.”
“내가 기억을 잃은 동안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나도 모르지.”
혈우병 D형이 반드시 유전으로만 발현되는 것은 아니지만 유전 요인이 전혀 없다고 볼 수 없는 병이다.
물론 자신과 솔이 우연으로 각각 병을 앓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솔이의 이름에 ‘민’자가 들어가고, 자신은 초연에 대해 익숙히 알고, 초연이 자신에 대해 미칠 듯이 경계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모이면 결국 답은 한 가지였다.
“와우…….”
놀란 강 비서의 턱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재벌, 기억 상실, 숨겨둔 자식. 너무 흥미진진해?”
“네.”
남들이라면 모른 척할법한 상황에도 강 비서는 호기심을 숨기지 않고 눈을 빛냈다.
비서로서가 아니라 10년 넘게 가까이 지내온 대학 후배로서 때때로 이렇게 비서에 걸맞지 않은 태도를 보일 때면 신후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어쩌면 그 때문에 강 비서, 아니 찬영을 옆에 두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항상 긴장한 채 유지해야 하는 관계들 속에서 속이 환히 보이는 찬영은 그에게 소중한 후배였다.
“막 화까지 보고 싶으면 회사 잘리지 않게 바로 김 실장 데리고 올라가.”
신후의 명령에 강 비서가 순간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상사이기는 하나, 아직 회사의 우두머리는 따로 있는 상황에서 이렇게 두 윗사람의 지시 사항이 상반될 때 강 비서는 정말 힘이 들었다.
본인들이야 싸우고 내일이면 풀어질 가족이지만 자신은 그저 월급을 받는 직장인 아니던가.
“아니, 이사님 김 실장님은 제가 모시고 온 것도 아닌데. 회장님이 보내신 분을 제가 어떻게…….”
“그러면 이 막장 드라마 오늘부로 조기 종영 할까?”
“아닙니다. 모시고 올라갈게요. 대신 서울 올라오시면 다음 회 꼭 들려주셔야 해요.”
꺼지라는 신후의 턱짓에 강 비서가 한달음에 사라졌다.
신후는 다시 몸을 돌려 홀로 남은 초연을 바라보았다.
초연이 말을 안 해준다면, 그가 직접 확인하면 그뿐이었다.
***
MRI 촬영을 마치고 솔이는 회복실에서 회복 중이었다.
정신은 차렸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에 병원에 며칠 입원하기로 했다.
회복실 밖, 이제야 의자에 앉아 초연은 무릎 가까이 얼굴을 떨어뜨린 채 자신이 아는 모든 신께 감사의 인사와 앞으로 솔이의 건강을 빌었다.
뚜벅뚜벅, 대리석 바닥에 묵직한 구둣발 소리가 울렸다.
초연은 소리만으로도 누구인지 짐작했다.
올 게 왔구나.
“솔이 정신 돌아왔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초연은 천천히 허리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신후의 집요한 검은 눈동자에 초연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네, 다행히……. 고마워요. 신경 써줘서.”
“더 할 말 없습니까?”
마치 네 죄를 알아서 말하라는 지옥의 심판자 같은 모습이었다.
애써 쿵쾅거리는 심장을 누르며 초연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없어…… 요.”
신후의 시선이 억지 미소를 짓느라 파르르 떨리는 초연의 입꼬리에 닿았다.
“이민솔 보호자 분. 부탁하신 피검사 결과지입니다.”
흰 가운을 입은 젊은 남자가 A4 종이 한 장을 들고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무슨 검사요? 검사를 부탁한 적 없는데요.”
초연이 당황한 얼굴로 일어났다.
“제가 부탁했습니다.”
신후가 태연한 표정으로 검사지를 달라는 듯 손을 뻗었다.
“네. 아까 저분이……. 혈액형 검사를 부탁하셨는데요. 가족 아니시던가요?”
환자의 가족이 아니면 환자의 검사를 함부로 신청할 수도, 그 결과를 확인할 수도 없다.
난감해하는 젊은 남자를 앞에 두고 신후가 초연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날 속이는 게 아니라면, 저 종이를 받아서 날 줘야 할 겁니다. 아니라면 진짜 내 마음대로 해석해버릴 테니.”
부탁이 아닌 명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