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그가 규림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역시나 초연은 사라졌다.
어젯밤부터 그를 피하기 위해 그토록 애를 썼던 여자이니 당연히 그러리라 짐작은 했다.
하지만 진짜로 내뺀 초연에게 신후는 이루 설명할 수 없는 배신감과 환멸을 느꼈다.
“초연 씨 어디 갔습니까?”
“으응, 자네가 저 여자랑 얘기하는 사이 뒤쪽으로 가던데. 솔이 찾으러 간 거겠지.”
그동안 그에게 호의 가득했던 이장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그를 두 여자 사이에서 저울질하는 놈으로 보는 듯했다.
지금 자신을 손에 두고 저울질하는 게 누군데.
신후는 끓어오르는 속을 다스리며 초연을 찾았다.
그녀를 찾은 건 안채 솔이의 방이었다.
“이야기하기로 했잖습니까.”
어젯밤 기억으로 신후는 깨달았다.
분명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 속에 초연이 있다.
답답한 점은 초연이 무엇을 숨기는지 그는 확실히 알아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자신이 그토록 애타게 찾던 진실이 초연에 의해 숨겨지고 있다는 사실에, 신후는 초연의 목이라도 졸라 비밀을 털어놓게 만들고 싶었다.
그나마 솔이가 걱정할 거라며 빨리 내려가자는 초연의 말에 휴전을 선언하고 내려온 상황이었다.
근데 자신과 규림을 보자마자 바로 꼬리를 내빼는 초연을 보니 그 속이 더욱 선명해졌다.
어젯밤은 그저 분위기에 취해 자신과 잤을지언정, 정신을 차리고 나서 후회 중이라는 것.
“여길 어디라고……. 나가요!”
그를 발견한 초연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경기를 일으켰다.
과연 우리가 무슨 인연이길래.
악연이었나?
실은 기억나지 않는 시간 속에서도 자신은 자신을 싫어하는 그녀를 일방적으로 쫓아다녔던 건가?
꿈속에 나타난 초연은 그저 풀지 못한 욕정의 희망 사항이었던가?
하지만 그렇다면 그녀의 흉터와 섹스 버릇은 설명할 수 없다.
자신이 초연에게 몹쓸 짓을 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녀의 몸을 그토록 익숙하게 느낄 수 있단 말인가.
혹시 과거에도 초연은 자신을 피하고, 자신은 초연을 쫓는 관계였을까 봐, 신후는 딱 돌기 직전이었다.
“나갈지 말지는 내가 결정해. 이야기마저 해.”
기겁하는 초연을 방 안으로 밀어 넣은 신후가 자신의 등 뒤로 미닫이문을 닫았다.
내리깐 신후의 시선이 저를 향해 치켜뜬 초연의 시선과 부딪혔다.
어제 제 아래서 뜨겁게 느끼던 여자는 존재하지 않았던 거라고 약 올리는 것처럼 원래의 찬바람 쌩쌩 부는 이초연 씨로 돌아가 있었다.
“규림 씨 왔잖아요.”
“왜. 규림을 핑계로 숨어보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신후의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결혼까지 생각하시는 사이가 있는 줄 몰랐어요.”
초연은 지은과의 약속을 떠올렸다.
그때는 지은이 신후의 친모인 줄 알고 다시는 신후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돈도 받았다.
만약 자신의 계모인 지은에게 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면 신후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무서웠다.
“그래서 약혼자가 있다는 핑계로 이제 와 지난 밤 일을 없던 일로 하시겠다?”
신후가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제 몸에 단단히 붙였다.
그리고는 오른손으로 그녀의 뺨 위,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꼽았다.
다정한 손길이었지만 눈빛만은 분명 비아냥이었다.
“아니지. 처음부터 당신은 후회했지. 날 계속 밀어내려 하고.”
어제와는 다른 의미로 단단한 신후의 육체가 그녀를 긴장하게 했다. 저절로 아랫배가 조여들었다.
초연은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거리를 유지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상체를 겨우 팔로 간격을 지킨다 한들, 딱 맞게 붙은 하체의 느낌은 어젯밤 그녀와 그가 벌인 짓을 적나라하게 떠오르게 했다.
“당신은 그저 저를 보고 허상을 좇는 거예요.”
지난번 비를 맞은 날, 초연은 신후가 상처만 기억할 뿐, 그녀의 얼굴은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하지만 어젯밤 그는 분명히 그녀의 얼굴까지 기억하고 그녀와 자신이 과거에 알던 사이가 아니냐며, 왜 모르는 척했냐며 다그쳤다.
신후가 예전 기억의 퍼즐을 찾을 때마다 초연은 반갑기는커녕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지금 신후가 자신에게 보여주는 건 사랑이 아닌 집착이었다.
어쩌면 그의 무의식중 어느 부분이 그에게 자신을 계속 떠올리게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워낙 집요한 성격이니 기억을 잃은 와중에도 자신이라는 흔적 조각을 놓치지 않으려는 거겠지.
하지만 만일 자신이 그의 기억 속의 여자이고, 아닌 척, 모르는 척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때도 신후가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밀어내는 건 괜찮은데 내 진심까지 멋대로 해석하지 마.”
“지난번 차 안에서도. 어제도 당신은 나를 다른 여자로 착각했어요. 다른 여자랑 착각하는 당신을 뭘 보고 믿겠어요?”
게다가 약혼녀라니.
초연이 보기에도 규림은 좋은 집안에서 귀하게 자란 아가씨였다.
이제 와서 한때 신후와 깊은 사이였다고 한들, 〈MJ 인터내셔널〉에서 자신을 반기지 않을 게 뻔했다.
부모도 없고, 겨우 대학 졸업해서 미혼모가 된 여자를 누가 반긴단 말인가.
대학 시절 그녀에게 관심을 보였던 선배가 있었지만 그녀의 집안 사정을 알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관심을 끊었다.
상처를 안 받은 척했지만 안 받을 수는 없었다.
결국 마음을 내주었던 것만큼 상처를 받는 게 인간관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 아예 안 될 것 같은 사람에게는 마음조차 주지 않았어야 했는데.
고아라는 그의 말을 철석같이 믿어버린 게 잘못이었다.
일반 사람들도 꺼리는 조건인 자신을 대기업인 그의 집안에서 쉽게 받아줄 리 없다.
괜히 기대하고 싶지도 않다. 아직도 그런 꿈을 꿀만큼 초연은 소녀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 안 하게 생겼어? 당신은 처음 봤을 때부터 날 보고 놀랐지. 왜지?”
“사고가 났는데 안 놀랄 사람이 있을까요?”
“그러면. 내 음식 취향을 안 건.”
“세상에 삼겹살에 비계 좋아하는 사람이 당신 하나래요? 착각하지 마요.”
설령 7년 전에는 신후가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했다고 하더라도 그건 어린 날의 일탈일 뿐이었다.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려고 떠난 여행에서 만난 자신에게 어쩌다가 이끌린 것이다.
6년이라는 시간은 아주 긴 시간이고, 그 역시 너무나도 변했다.
게다가 아픈 아이를 달고 나타나봤자, 그의 집안에서 반기지 않으리라는 것은 명확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과 솔이가 저 집으로 들어가서 환영받고 행복할 길은 없다.
그냥 지금처럼 잊힌 사람으로 각자의 인생을 사는 게 최선이었다.
“날 계속 피하는 건!”
“난 누구에게나 그래요!”
“안 원장에게는 아니었지.”
“그 사람은 당신처럼 이렇게 막무가내지 않으니까요.”
재윤을 옹호하는 초연의 발언에 신후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그녀의 허리를 움켜쥔 손마디가 하얗게 변했다.
사람을 찢어 죽일 것 같은 신후의 눈빛에 초연은 숨이 턱턱 막혔지만 질 수는 없었다.
그의 시선을 피하는 건 그에게 지는 걸 의미했다.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누구 한 사람 물러서지 않았다. 둘 사이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때 누군가 그들의 긴장된 공기를 터트렸다.
“큰일 났어요! 솔이가, 솔이가!”
하얗게 질린 채 방문을 연 건, 솔이와 같이 있다던 성훈이었다.
흙탕물로 엉망이 된 성훈의 옷차림에 위험을 감지한 초연이 그만 얼어붙었다.
그녀 대신 물은 건 신후였다.
“왜? 무슨 일인데?”
“솔이가……. 솔이가. 아줌마, 찾아 하아. 산에 간다고 올라갔다가 하아하아……. 미끄러졌어요. 하아하아.”
초연은 떨어지지 않는 입을 다그쳐 간신히 질문을 쥐어짰다.
“피, 피는……?”
“머리랑, 다리 다쳤어요 하아하아.”
초연의 머릿속에 붉은 피를 끊임없이 흘리다 하얗게 변해버린 솔이의 모습이 저절로 그려졌다.
눈앞이 아득해져 초연이 휘청했다.
하지만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더 큰일 나는 건 솔이니까.
“앞장서.”
초연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성훈을 뒤따랐다.
자신이 누구보다 진정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솔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성훈의 뒤를 따라 뒷산으로 가는 내내 초연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뒷산에 막 오르기 시작했을 즈음 초연은 이미 솔이를 안고 내려오는 재윤과 마주쳤다.
성훈이 내려오며 재윤을 먼저 만나 일러두어, 재윤이 솔이를 데리고 온 터였다.
그녀의 상상만큼은 아니었지만 재윤의 품에 안긴 솔이는 정신도 못 차린 채 이마와 다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솔아!”
“다행히 골절된 곳은 없어. 정신 차리고 있다가 나 보고 기절한 거고.”
“이리 주시죠.”
휘청이는 재윤에게서 신후가 솔이를 받아들었다.
재윤 역시 이번엔 별말 없이 신후에게 솔이를 건넸다.
솔이를 받아든 신후가 단번에 마당까지 내려와 평상 위에 눕혔다.
“솔아, 솔아? 아가야. 엄마야. 정신 차려봐.”
초연이 솔이를 조심스레 깨우는 동안 사람들이 평상 주변에 빼곡히 모여들었다.
“어떡하냐. 아가가 많이 다쳤네.”
“상처가 크지는 않은 것 같은데 피가 계속 나네. 여보, 지혈할 것 좀 가져와 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걱정했다.
다른 아이들이라면 지혈하면 괜찮아지겠지만, 솔이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초연은 사람들 속에서 다시 재윤을 찾았다.
이 많은 사람 중에 지금 그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솔이의 병에 대해 아는 재윤뿐이었다.
“재윤 씨 어떡해. 구급차 불렀어?”
“구급차 불러 봤자 오는 데 시간 더 걸려. 내 차 타고 서울 병원으로 가자.”
전국적으로 혈우병 D형의 환자는 많지 않기 때문에 지방은 종합병원급이라도 반드시 치료제를 모두 보유하고 있지는 않다.
지난번 다른 지역에서의 사고 이후, 초연은 무슨 일이 있어도 솔이에게 사고가 나면 바로 서울로 가기로 재윤과 말을 맞췄다.
괜히 운을 기대했다가 약이 없어 서울로 다시 이송하는 사이 솔이의 목숨이 위태로워지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재윤이 차를 가지러 간 사이 초연이 솔이를 품에 안았다.
어쩐지 생각보다 더 작고 가벼운 거 같아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초연은 눈물을 꾹 참았다.
지금 울었다가는 솔이에게 정말 나쁜 일이 생길 것 같아서였다.
정신 차리자. 정신 차리자 이초연. 울음을 참느라 얼굴을 빨개지고 작은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반쯤 이성을 잃어가는 초연의 모습에 누구 하나 쉬이 나서 초연에게 뭐라 하지 않았다.
“솔아, 걱정하지 마. 엄마가 살려줄게.”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이마에 흐르는 피를 조심스레 닦으며 초연은 끊임없이 솔이의 귀에 속삭였다.
그건 솔이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지만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이기도 했다.
재윤의 집 쪽으로 가려 솔이를 안고 일어서려는데 신후가 그녀를 막아섰다.
“근처 병원으로 갑시다.”
“안 돼요. 서울 병원으로, 서울 병원으로 가야 해요.”
초연이 피해가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를 막아선 신후는 막무가내였다.
“이초연 씨. 이 정도로 서울 병원까지 갈 필요 없습니다. 병원에서 받아주지도 않을 거고요.”
모르면 그냥 비켜주지. 쓸데없이 시간을 빼앗는 그 때문에 초연은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평소처럼 화가 나오지도 않았다.
그와 말싸움을 하고 싶지도, 할 시간도 없었다.
“싫어요. 서울 병원, 서울 병원으로 가게 해주세요. 제발.”
자식이 생사의 갈림길에 있는 상황에서 나오는 건 애원과 눈물뿐이었다.
이렇게 신후가 막아서는 사이 솔이는 조금씩 더 죽음과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에 초연은 이성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제발요…….”
하얗게 질린 채 덜덜 떠는 초연의 어깨를 신후가 단단히 잡았다.
“여기 병원으로 갑시다. 내가 부산 최고의 의사 붙여줄게요. 그리고 이초연 씨. 정신 차려요. 애 엄마가 이러면 애가 더 불안…….”
“솔인 혈우병이란 말이에요! 그것도 D형! 여기서는 병원 가봤자 솔이 맞을 치료제도 없단 말이에요! 이대로 지혈이 안 되면 애는 죽는다구요!”
가냘픈 몸에서 나온 피맺힌 절규에 신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갑시다.”
그녀의 품에서 솔이를 빼앗아 든 신후가 솔이를 자신의 차 뒷좌석에 태웠다.
베이지색 가죽 카시트가 솔이의 피로 금세 물들었다.
순식간에 초연도 솔이를 따라 차에 오르고 차는 출발했다.
그제야 안심이 된 초연이 솔이를 안고 울기 시작했다.
신후가 알든 말든.
솔이만 살릴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