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깊숙한 각인-19화 (19/84)

〈19〉

식사 후 신후가 씻는 사이 초연은 잘 준비를 했다.

텔레비전 신호도 잡히지 않고 몸도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객실은 열 명은 충분히 잘 수 있을 정도로 컸는데 창가 양옆으로 2층 침대가 각각 하나씩 있었고, 나머지는 군대에서나 볼 수 있는 평상형 자리였다.

초연은 왼쪽 2층 침대의 아래쪽 자리를 차지했다.

석유 난로를 가져다가 2층 침대 가운데에 놓았지만, 산중 추위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올렸다.

딸깍, 신후가 샤워실을 나서는 소리에 초연은 얼른 눈을 감았다.

왠지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 그와 마주쳤다가는 민망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이불을 들치는 신후의 손길에 초연이 놀라 눈을 떴다.

“같이 자게요?”

아직 젖은 머리로 저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에 초연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슈트만 입고 있을 때는 거리감이 느껴지더니 헝클어진 머리에 수건만 대충 두른 그는 6년 전 그녀의 이불로 거리낌 없이 드나들던 그 시절 그와 별반 다를 것 없었다.

익숙한 모습에 저도 모르게 아래가 조였다.

초연은 더욱 단단히 이불을 틀어쥐고 목 위까지 바짝 당겼다.

“이불 이거 하나밖에 없던데. 나는? 설마 양보해주려고?”

기가 막힌다는 듯한 신후가 물었다.

초연은 그제야 자신이 봄 산장 대청소 때 낡았다며 모든 이불을 갖다 버렸던 사실을 떠올렸다.

원래는 봄 대청소 후 이불 쇼핑을 하려 했는데 산지기 분이 백내장 문제로 부산에 가버리시는 바람에 계획이 무산됐다.

그래서 산장에는 산지기 분이 쓰던 것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초연은 괜히 산지기 분을 부추겨 이불을 버리는 데 앞장선 지난날이 후회됐다.

“알았어요. 양보할게요.”

“됐습니다. 내일 아침에 언 송장 이고 내려가긴 싫으니까.”

초연이 이불을 거둬 그에게 건네주려는데 신후가 막고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커다란 덩치의 그가 침대에 오르자 삐걱거리며 낡은 침대가 쇳소리를 냈다.

오소소, 순식간에 그녀의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순식간에 가뜩이나 좁은 싱글 침대가 더 좁게 느껴졌다.

초연은 벽 쪽으로 몸을 돌렸다.

최대한 그와 부딪히지 않기 위함이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그의 존재는 그리 쉽게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벌써 그의 존재가 이렇게 느껴지는데 어떻게 잠을 잘 수 있을지.

앞이 캄캄했다.

“내가 덮칠까 걱정되면 재밌는 이야기 해봐요, 천일야화처럼. 혹시 압니까, 내가 이초연 씨 말솜씨에 넘어가 다른 생각을 잊게 될지.”

“그런 거 잘 몰라요.”

“그건 덮치라는 신호인가.”

신후의 중얼거림에 초연이 발끈해 몸을 일으켰다.

정말 잠깐이라도 함께 잘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게 우스웠다.

이럴 바엔 이불 없이 혼자 자는 게 낫겠다 싶었다.

하지만 신후가 한발 빨랐다.

통나무 같은 팔이 그녀의 윗 가슴을 가로질러 얹히더니 그대로 침대에 눕혔다.

“당신 이름 한자가 뭡니까. 빗속에서 초연이라는 단어를 수백 번씩 부르다 보니까 궁금해지던데.”

신후는 오늘 밤 초연을 어쩔 생각 같은 건 없었다.

아무리 자신이 오래간만에 끓어오르는 성욕에 자다가 몽정을 하더라도, 다치고 도망갈 구석도 없는 상황에 처한 여자를 어찌할 만큼 미친놈은 아니었다.

다만 이불이 이것밖에 없으니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빗속에서 수백 번 그녀의 이름을 부르다 보니 기분이 이상해 궁금하던 차였다.

원래 알던 이름인 것처럼 익숙했다.

“흔히들 쓰는 초연이라는 단어와 비슷합니까? 아니. 이름이니까 그거랑은 한자가 다른가?”

하지만 신후의 질문에 초연은 놀랐다.

어떻게 사람이란 기억을 잃어도 똑같은 질문을 할 수 있는 것일까.

7년 전과 같은 질문을 하는 그를 보며 마음이 이상해졌다.

떨떠름했지만 그를 의식하느라 미치는 것보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뛰어날 초, 그럴 연. 이름에 자주 쓰는 한자가 아니라 국어사전에 나오는 ‘초연’에서 따온 한자예요. 할머니가 제가 현실에서 벗어나 의젓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으셨다고 들으셨어요.”

“이름이 특이하네. 현실에서 벗어나 의젓하게 살기를 바란다, 라니.”

분명 어제의 초연이라면 이런 말을 신후와 하지 않았겠지만, 다사다난했던 하루를 같이 보낸 신후에게 어느새 초연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열리고 있었다.

“어릴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할머니는 혼자 남은 제가 여기저기 치일 걸 걱정하신 것 같아요. 옛날 분이라 이름에 쓰는 한자 같은 것도 모르고, 작명소에 갈 형편도 안되고……. 본인이 아는 가장 예쁜 단어, 마음에 드는 뜻을 찾아 이름으로 골라주셨어요.”

사실 초연이라는 단어에는 그 밖에 다른 의미도 있었다.

그와 자신의 이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날 저녁, 신후가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름 너랑 안 어울려.’

‘안 어울리긴 뭐가 안 어울려? 할머니가 얼마나 고심 끝에 지어주신 이름인데? 너 우리 외할머니 무시하는 거야?’

‘그래? 미안하긴 한데, 안 어울리긴 안 어울려. 아니. 앞으로는 어울리지 마.’

얼버무리며 집을 나서는 그의 등 뒤로 아직 켜져 있는 컴퓨터와 국어사전 창이 보였다.

초연은 그날 밤 자신의 이름 단어를 검색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뜻으로는 도통 어울리지 말라고 할만한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익숙히 알고 있는 단어의 의미 이외에 아래에 적혀있던 것은.

‘얼굴에 근심스러운 빛이 있다.’

‘기(意氣)가 떨어져서 기운이 없다.’

나쁜 의미를 보고 그제야 자신에게 어울리지 말라고 말하던 그의 마음을 느꼈다.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던 그녀의 인생과 이름에 누군가 그녀보다 더 속상해하고, 화를 내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어떻게 그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이름은 그녀의 삶을 예측하는 단어 같았다.

솔이를 낳고 보니 아빠도 없이 태어나게 한 게 미안했다.

해서 솔이는 무조건 최고의 삶을 살라는 의미에서 얄밉도록 잘난 신후의 성을 이름에 넣었는데 병까지 앓는 걸 보니 안되는 건 안 되는 건가 보다.

“왜요.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니까 불쌍해 보여요?”

신후가 또다시 자신을 안타깝다는 듯이 보는 게 싫어 초연이 짐짓 턱을 치켜들었다.

“나도 부모님 두 분 다 돌아가셨는데. 불쌍하게 봐줍니까?”

두 분 다 돌아가셨다는 말에 초연은 혼란스러웠다.

얼마 전에도 신후의 부친이었던 고 민도재 회장의 부인이라며, 여성지에 실린 지은의 인터뷰를 얼핏 본 적이 있다.

놀라 잡지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얼른 덮었지만, 분명 자신을 찾아왔던 그 얼굴이 맞았다.

그사이 돌아가시기라도 한 건가?

당혹스러움을 감추려 말을 얼버무렸다.

“민 이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다니 우습네요. 세상 누구보다 갖고 계신 게 많으신 분이.”

“거 봐. 세상에 부모가 없는데 불쌍하다는 취급도 못 받고. 불쌍한 거 맞다니까.”

신후가 스스로 팔베개를 하며 바로 누웠다.

농담인 듯싶었지만 그의 눈빛에 어린 공허함은 숨길 수 없었다.

“근데 언제……. 돌아가셨는지 물어봐도 돼요?”

“친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항상 휠체어 생활을 하셔서 딱히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은 없습니다.”

초연은 그제야 자신을 봤던 사람이 신후의 친모가 아니라 새엄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버님은 내가 성인이 된 다음에 돌아가시긴 했는데……. 별다른 아쉬움이 없긴 마찬가지입니다. 집에 들락거리던 여자랑 바람나서 어머니 돌아가신 지 1년도 안 되어서 배다른 동생이랍시고 집에 데리고 들어왔거든.”

7년 전 신후는 자신을 고아라고 소개했다.

집도 절도 연고가 없는 까닭에 군대를 갔다 와서 어디에 정착할지 여행 중이라고 했다.

모든 게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적어도 모두 거짓은 아니었다.

“몰랐어요.”

그를 미워하게 했던 모든 거짓말이 실은 모두 거짓말이 아니라는 사실에 혼란스러워졌다.

자신 역시 부모님이 없다는 사실만으로 움츠러들어 친구들에게도 가정사를 꺼내지 않았던 시기가 있기에. 그를 미워했던 게 미안해졌다.

“집안일이야 언론 철저히 단속시키니까 일반 사람들이 알 리가 없지.”

어쩌면 당신도.

“힘들었겠네요.”

“인정해주는 겁니까?”

신후가 씽긋 웃었다.

그 미소에 가슴이 저릿했다.

지은의 말처럼 그녀를 속이려고 이름도 속이고 집안도 숨긴 게 아니었다.

그저 방황하던 시기 자신의 이름 석 자, 집안을 밝히기 싫었던 것이다.

분명 남들이라면 다들 자신의 상처를 봐 달라고 얼굴에 고통이 가득할 상황이었다.

한데 이런 상황에 웃는 사람이라니.

어쩌면 그 당시 자신을 보고 실없이 웃던 그의 마음도 그랬을까?

겉으로는 만사태평 웃고 있지만, 가슴 속에는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아픔을 갖고 있는 그런 거 말이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마음이 저릿하고 눈가가 시큰한데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의 앞에서 눈물이라도 흘릴까 초연은 몸을 돌려 누웠다.

“인정은 무슨. 괜히 사람 동정심 자극하려고 하지 말아요.”

“동정심이 아니라 우리가 운명이라는 소리를 하는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자요.”

“왜 이렇게 사람을 못 믿지?”

순식간에 그녀를 바로 눕힌 신후가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사람이 아니라 민신후 씨를 못 믿는 거죠. 처음 만나자마자 운명이다, 들이대는 바람둥이를 누가 믿겠어요.”

“누군가에게 이러는 거. 처음이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똑바로 저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예전에 기억 잃은 적 있다면서요. 그때도요?”

쿵쿵 뛰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그가 들을까 걱정됐다.

“그런 적 없었을 겁니다.”

“혹시 당신도 기억 못 하는 거 아닐까요? 그때 그런 행동을 하고 다녔을 수도 있잖아요. 정말 지금과 같은 상황이 없었을까요?”

“그랬다면 기억을 못 할 리 없지. 그런 여자가 있었다면 죽어서라도 찾아낼 거거든 난.”

기억도 없는 시간의 일을 말하면서도 신후는 무척이나 당당했다.

그가 말하는 게 모두 진실로 느껴질 만큼.

정말,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기에 기억을 잃은 지금도 자신을 찾아낸 것일까.

자신의 집안에서 도피하던 것처럼 자신과 솔이에게서 도망친 게 아니라 정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그것도 모르고 자신이 그를 미워하는 것일까?

혼란스러움으로 초연의 눈동자가 한없이 떨렸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에 신후가 점점 가까워졌다.

“민신후 씨! 생각할 시간을 좀…….”

초연이 다급히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단단한 가슴은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손끝에 닿는 매끄럽고 단단한 맨살에 그녀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예전보다 더 넓어지고 단단해진 가슴이었다.

“안 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나한테 흔들리고 있다는 소리거든.”

초연이 마른 침을 삼키는데 신후가 그녀의 붉고 도톰한 입술을 덮쳤다.

부드럽게 입술을 열고 들어오는 그의 능숙한 움직임에 초연은 그만 놀라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등을 천천히 쓸며 신후가 귓가에 속삭였다.

“그냥 당신 마음을 놓아봐요. 어디로 가는지.”

귓바퀴를 혀끝으로 더듬으며 속삭이는 목소리가 아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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