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신후는 커다란 나무뿌리와 암석이 지붕처럼 간신히 버티고 있는 작은 공간에서 반쯤 정신을 잃은 초연을 발견했다.
“이초연 씨!”
흙으로 잔뜩 엉망이 된 옷이며 찢어진 셔츠가 비탈길에서 구른 듯싶었다.
신후는 얼른 초연을 흔들어 깨웠다.
“젠장. 정신 좀 차려봐요, 이초연 씨.”
정신없던 초연이 그가 세 번쯤 몸을 흔들었을 때 힘겹게 눈을 떴다.
창백한 얼굴을 한 채, 초점도 잡히지 않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초연이 가늘게 떨리는 입술을 뗐다.
“찬영 오빠?”
신후가 아니라고 대답할 사이도 없이 초연이 왈칵 눈물을 흘리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찬영. 솔이 친부의 이름인가.
그 눈빛이 너무 애달파서 보는 순간 직감했다.
동시에 상대방 남자를 향한 질투가 그의 심장을 찔렀다.
얼마나 사랑했으면 정신을 잃은 와중에 찾는 이름이란 말인가.
신후가 가만히 있는 사이, 슬슬 정신을 차린 초연이 신후를 밀어내며 물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혹시 그가 자신의 헛소리를 듣고 괜히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을까. 초연은 조마조마했다.
“당신 성질머리라면 비 온다고 지름길 이용할 거라고 본능이 말하더군.”
무심히 그녀를 일으키는 신후의 얼굴에는 어떤 흔적도 없었다.
한때는 스스로 찬영이라고 불렀던 기억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그에게 의지해 일어나던 초연은 발목의 시큰한 통증에 얼굴을 찌푸렸다.
“아아. 아까 미끄러질 때 삐끗한 거 같아요.”
그의 팔뚝을 잡은 초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업혀요.”
신후가 망설임 없이 등을 내주었다.
“부축만 해줘도 돼요.”
“그냥 업혀요. 지금 길도 거지 같은데 당신 부축하느라 어기적거리다가 나까지 넘어지고 싶진 않으니까.”
초연은 망설이다가 신후의 등에 조심스럽게 업혔다.
초연을 한 번 추슬러 단단하게 잡은 신후가 산 위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집으로 내려가는 길 저쪽이에요.”
초연이 뒤쪽, 아래로 향하는 방향을 가리켰다.
“대피소가 근처에 있다던데 그리로 갑시다.”
“솔이 걱정할 텐데 집으로 가요.”
집에서 자신을 걱정하고 있을 솔이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또래에 비해 똑똑하긴 했지만, 그만큼 감수성도 예민한 솔이는 외로움을 많이 탔다.
특히 작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는 언제 엄마가 자신의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종종 과할 정도로 걱정을 하곤 했다.
얼른 가서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지금 당신 데리고 내려가다가 넘어지면 이 비에 둘 다 저체온증으로 죽는다고.”
그의 말이 맞았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이 비에 자신까지 업고 하산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저 위로 조금만 가면 돼요.”
초연은 위로 향하는 길 어디쯤을 손으로 가리켰다.
***
대피소로 쓰는 산장은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혼자 다쳤을 때는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신후의 등에 업혀 오니 금방이었다.
말이 대피소였지, 실은 산지기 한 명이 먹고 살고 하는 집이었다.
그러다가 주말이면 등산객들을 상대로 차나 라면도 팔고, 비나 폭설이 오면 잠자리도 제공하는 곳이었다.
다행히 전기도 들어오고 석유 난로도 있었다.
초연을 의자에 앉히고 석유 난로를 켠 신후가 산장 안을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괜찮네요. 주인은 없나?”
“백내장 수술 때문에 부산 따님 집에 가셨어요.”
초연은 의자를 옆 카운터 위에 손을 뻗어 유선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먹통이었다.
신후에게 눈빛을 보냈지만, 그 역시 전화가 안 터진다는 대답이 돌아왔을 뿐이었다.
그녀의 핸드폰은 아까 미끄러지면서 잃어버렸다.
결국, 오늘 밤 솔이에게 전화할 방법은 없다.
재윤도 있고, 이장님도 있으니 괜찮겠지.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사이 수건 몇 장을 구해온 신후가 그녀에게 건넸다.
“몰골이 말이 아니니 좀 씻어야 할 것 같은데. 여기 씻을 곳 있습니까?”
초연은 그제야 자신의 차림을 확인했다.
진흙에 굴러 엉망이었다.
그의 차림새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저쪽에 샤워장이 있긴 한데, 전기도 나오지 않는데 따뜻한 물이 나올지는 모르겠어요.”
샤워장 쪽을 확인한 신후가 다행히 LPG 가스를 쓰는 곳이라 뜨거운 물이 나온다고 했다.
그의 말에 초연이 한시름 놓았다.
“씻고 먹겠습니까? 아니면 먹고 씻겠습니까?”
이미 집 안을 빠삭하게 뒤진 신후가 싱크대 선반장에서 라면 두 개와 즉석밥까지 찾아 흔들었다.
정말 어디에 떨어져도 죽을 사람은 아니구나 싶었다.
“씻고 먹을래요.”
“근데 혼자 씻을 수 있겠습니까? 도와줘요?”
“아니요!”
자신을 훑는 시선에 초연이 수건으로 몸을 가렸다.
어이없다는 눈빛에 그제야 그가 흑심이 아니라 자신의 다리 때문에 호의를 베풀려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민 반응을 한 자신의 모습이 우스워 초연은 얼른 수건을 챙겨 샤워실로 향했다.
다행히 신후가 샤워실 안쪽에 플라스틱 의자 하나를 갖다 주었다.
신후의 배려에 초연은 의자에 앉아 편히 샤워를 마칠 수 있었다.
샤워하고 난 후, 초연은 갈아입을 옷이 없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난감해하는 사이,
“문 앞에 옷 둘 테니 입고 나와요.”
신후가 말했다.
그리고 그가 문 앞에 두었다던 옷을 발견한 초연의 얼굴이 황당하게 변했다.
***
“이게 신후 씨가 말했던 ‘옷’인가요?”
얇은 시폰 소재의 하늘하늘한 꽃무늬 커튼을 몸에 둘둘 만 초연이 어이없다는 듯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대충 두르기는 했는데 한쪽 어깨는 드러나고, 몸에 맞게 두르느라 몸의 곡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민망함에 괜히 화살이 그에게 향한 것이다.
“원래 그리스 로마 때는 다들 천 하나 둘둘 말아 입고 그러지 않았나. 초연 씨 모습도 여신처럼 예쁘네요.”
무표정한 얼굴로 내뱉는 말은 어디까지 농담이고, 어디까지 진심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몇 시간 동안 긴장했던 마음을 녹이는 데는 유머가 즉효였다.
“역시 예쁘다는 말은 백발백중이네.”
“어이없어서 웃은 거예요.”
초연이 새침하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둘은 머리를 맞댄 채, 신후가 끓인 라면과 즉석밥으로 허기를 채웠다.
아까 오전에 신후와 한바탕 했던 게 아주 오래된 일처럼 아득했다.
반면 예전 시골집에서 신후와 같이 머리를 맞대고 라면을 나누어 먹던 기억은 다시 새록새록 떠올랐다.
“찬영이라는 사람이……. 솔이 친부입니까?”
놀란 초연이 라면을 먹다 말고 그를 쳐다보았다.
못들은 게 아니라 못 들은 척했던 거구나.
하긴, 그렇게 가까이에서 말했는데 못 들었을 리가 없지.
초연이 옅게 한숨을 쉬었다.
“얘기하기 싫어도.”
얘기하기 싫으면 얘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나름의 배려를 기대했건만, 그의 뒷말은 예측을 빗나갔다.
“해주면 안 됩니까?”
“그런 사적인 질문은 선을 넘는다는 생각 안 드세요?”
“어차피 당신 선 넘으려고 별짓을 다 하는 상황인데 이쯤이야, 뭐.”
초연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라면을 먹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묻고 싶은 겁니다. 그 남자, 못 잊은 겁니까?”
심각한 신후의 질문에 초연도 젓가락을 내려놓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아니에요.”
“그 사람이 다시 초연 씨와 솔이 앞에 나타난다면, 따라갈 의사가 있는 겁니까?”
“없어요, 그런 거.”
“다행이군요.”
당사자인 그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게 우스웠다.
피식 웃는 초연을 보며 신후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뭐가 웃깁니까. 아직 미련이 남은 겁니까?”
“아니요. 솔이를 임신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줄행랑쳤던 인간. 그런 인간에게 제가 미련을 가질 일이 뭐가 있겠어요.”
이장님도 솔이의 친부에 대해서는 모른다기에 초연이 다른 지역에서 만났다가 불의의 사고로 죽은 건 아닐까, 생각했다.
한창 사랑했을 때 남편이 죽고 그 애틋함이 얼마나 가슴에 사무칠까.
아까 자신을 보고 찬영이라는 이름을 부르던 초연의 눈빛에 질투로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임신 소식에 도망간 인간이라니.
상상했던 솔이 친부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쩌다가 그런 인간에게 빠졌습니까? 지금의 이초연 씨는 전혀 그런 타입에게 빠질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그때는 저도 어렸을 때라 사람 볼 줄을 몰랐던 거죠. 아니면 그때의 경험으로 이만큼 성장한 걸 수도 있고요.”
심연처럼 깊은 눈은 상대 남자에 대한 강한 적개심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자신이 질투하던 솔이의 친부에 대한 초연의 마음이 미련이 아니라 분노라는 사실에 만족스러우면서도 아까 ‘찬영’이라는 이름을 부르던 눈빛이 계속 뇌리에 남아있었다.
아니라고는 하지만 강한 미련이었고, 그리움이었다.
그런 개차반 같은 짓을 하고도 아직 초연의 사랑을 받는 인간이란.
“어떻게. 복수라도 해주길 바랍니까? 말해봐요. 당신이 바라는 대로 해줄 테니.”
“그 사람이 영원히 우리를 몰랐으면 좋겠어요. 솔이의 존재도 내 존재도 모른 채 그냥 그렇게 평생을 살다 죽었으면 좋겠어요.”
“최고의 복수는 상대방을 잊은 채 잘 사는 거라는데. 그런 건가 보군요.”
차마 그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복수하지도 못할 정도로 아낀다는 건가.
하지만 굳이 그 사실을 초연에게 되짚어 사실을 바로잡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자신이 하는 말대로 평생 저주하고, 미워하면서 살길.
“네. 영원히 그 사람이 우리를 모른 채 살았으면 좋겠어요.”
“걱정하지 마요. 아마 죽는 그 순간, 그 사람도 분명 자신의 인생을 후회하게 될 겁니다.”
확신에 찬 신후의 목소리에 초연은 말없이 라면 그릇만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