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깊숙한 각인-17화 (17/84)

〈17〉

염색 수업이 모두 끝난 것은 오후 다섯 시 무렵이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숙소에서 저녁 식사 전 휴식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곧 한두 방울씩 내리는 빗줄기에 사람들이 하나둘 마당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염색 후 빨랫줄에 걸어두었던 천들을 걷기 위함이었다.

“근데 이 원장님은 어디 가시고 안 보이신데요?”

“아마 내일 등산 코스 확인하러 갔을 겁니다.”

누군가의 질문에 대답을 한 건 재윤이었다.

신후는 내일 트래킹 코스를 한다던 뒷산을 바라보았다.

초연의 집과 연결된 부분은 완만하고 야트막해 보였지만, 산 정상을 보자면 그리 만만한 산은 아니었다.

“이 비가 오는데 무슨.”

못마땅해하는 신후를 보며 재윤이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말했다.

“신경 쓰실 거 없습니다. 외지인이 보기에는 위험해 보이지만 그 사람한테는 뒷산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산책 다니는 곳인데 알아서 잘 돌아올 겁니다.”

“아까 보니까 옷도 얇게 입으셨던데 우산이라도 가지고 마중 나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산 중간에 대피소 겸 산장이 있으니 비가 거세지면 그곳에서 비를 피하고 올 겁니다. 다들 걱정하지 마시고 들어가서 식사하세요.”

재윤이 참가자들을 안심시키는 사이 신후가 신발을 신고 우산과 우비를 챙겼다.

그 모양을 본 재윤이 신후를 막아섰다.

“어디 갑니까?”

“당신은 가만히 기다려요. 난 그 여자 찾으러 갈 테니.”

“걱정하시는 마음은 알겠는데 초연 씨 이곳 지리에 밝습니다. 이 정도 비에 집 못 찾아올 사람도 아니고. 괜히 나섰다가 초행길에 오히려 그쪽이 길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여기 가만히 있으라고. 난 그 여자 괜찮은지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으니까.”

신후가 재윤을 밀어내고 걷기 시작했다.

“정말 제멋대로인 남자군.”

어찌 되었건 초연이 신후와 둘만 있는 건 재윤으로서도 반갑지 않은 장면이었다.

재윤도 우산을 들고 그의 뒤를 따랐다.

익숙지 않은 우중 산길에도 신후의 걸음은 빨랐다.

오히려 산길에 익숙한 재윤이 그를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재윤이 뒤따라 오는 것을 알면서도 걸음을 늦추지 않던 신후가 멈춰 선 것은 양 갈래 길 앞에서였다.

뒤돌아서 재윤을 보는 눈빛은 어느 쪽이냐고, 빨리 정보를 말하라는 의미였다.

지시하는 듯한 신후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초연을 찾는 게 급한 일이었다.

재윤은 마지못해 오른쪽 길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쪽이 초연 씨 다니던 길입니다.”

“저쪽으로 움직일 확률은?”

다른 쪽 길을 고갯짓으로 가리키는 신후의 눈빛이 침착했지만 날카로웠다.

오른쪽 길은 경사도 완만하고 사람들도 많이 들락날락한 까닭에 길이 꽤 단단하게 다져진 상태였다.

반면 반대쪽은 경사가 심해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은 탓에 길도 좁고 엉망이었다.

초연이 바보가 아닌 이상 비가 오는데 험한 길을 선택할 이유는 없었다.

“아마 길이 험해서 저쪽은 이용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럼 당신이 이쪽으로 가요. 내가 저쪽 길로 갈 테니.”

신후가 왼쪽 길을 선택해 걸으려는 걸 재윤이 막아섰다.

“그쪽 길로 안 움직였을 거라니까요.”

“아마라며. 그 말은 당신도 확신 못 한다는 말 아닌가? 확률이 0도 아닌데 포기해? 내가 당신이랑 손 붙잡고 비 오는 날 산책하려고 데리고 온 줄 알아? 잔말 말고 샅샅이 찾기나 해.”

고압적인 신후의 태도에 재윤은 기가 막혔다.

어떻게 이런 인간이 솔의 친부일 수 있는지.

마음 같아서는 될 대로 되라고 무시하고 싶었지만, 외지인을 이 빗길에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신후 걱정을 하는 것보다 각기 다른 두 길을 각각 살펴보는 게 초연을 위해서도 맞는 일이었다.

“찾으면 전화 드릴 테니 핸드폰 번호 좀……. 안 터지네.”

“찾다가 없으면 알아서 내려갈 테니 남 걱정 말고 각자도생합시다.”

먹통이 된 핸드폰을 부여잡은 재윤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이미 신후는 왼쪽 길로 저만치 진입한 상태였다.

***

같은 시각.

〈MJ 인터내셔널〉은 민 회장의 등장으로 한바탕 소란스러워졌다.

동생인 정 상무를 만나러 회사에 들렀던 지은의 귀에도 민 회장의 행차 소식이 들어온 건 순식간이었다.

민 회장이 임원들과의 미팅을 마치고 디자인 팀의 팀장인 규림을 불렀다는 소식에 지은도 모른 척, 회장실로 향했다.

어차피 회사 일이야 신후에게 보고 받았을 테고, 민 회장이 회사를 방문하고 임원들을 만나 미팅을 한 것 역시 규림을 만나기 위한 연막작전임을 모를 지은이 아니었다.

규림이 민 회장과 무슨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는지 지은은 알아야 했다.

해서 뻔뻔한 얼굴로 아버님이 회사까지 오셨는데 제가 어찌 인사를 안 드리고 그냥 가겠느냐며, 민 회장의 옆에 꼭 붙어 민 회장과 규림이 이야기 나누는 걸 지켜보았다.

“신후가 청도에 내려갔다고.”

“네. 민 이사님께서 이범규 염색장 쪽 사람들과 다시 접촉하러 내려갔다고 들었습니다.”

“그 패션쇼는 전통 한복 명인과 작업하기로 방향 튼 거 아니더냐? 그쪽 관계자들도 그렇게 받아들였다면서.”

조금 전 정 상무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던 지은이 얼른 끼어들었다.

“그러게요. 정 상무가 다 처리한 일을 왜 다시 뒤집나 모르겠어요. 민 이사가 저희 정 상무 견제하는 거 알긴 하지만 이게 다 회사에는 손해인 건데……. 아시잖아요, 아버님도. 이렇게 프로젝트 한 번 뒤집으면 비용도 많이 들고, 객관적이지도 않아 나중에 문제 될 수 있다는 점을요.”

지은은 교묘히 신후가 제멋대로 일 처리를 하고 있음을 어필했다.

결혼 후 지은은 회사에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을 불러들였다.

물론 자신이 낳은 지후도 있지만, 핏덩이였던 지후가 커서 〈MJ 인터내셔널〉을 언제 차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회사에 신후의 세력이 커가게만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데 생각보다 동생인 정 상무의 업무 처리가 영 지은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렇게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신후의 행동을 미리미리 민 회장에게 보고하면 좋으련만 멍청하게 그냥 일을 뺏긴 채 지켜만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여튼 제 손이 닿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다.

“어허, 사업하는 사람이 그만한 것도 모르고 할까. 네 보기엔 신후가 그 생각도 못 하고 일을 벌였다, 그 말인 게냐.”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말을 하지 말아야지. 대기업 안주인이나 된 사람이 입이 그렇게 싸서야 남들이 보고 뭐라 할지 걱정이구나.”

오히려 민 회장은 지은을 꾸짖었다.

제가 신후의 생모라도 이런 반응을 보였을까.

벌써 이 집에 들어온 지 20년이 넘었다.

신후의 생모가 민씨 집에서 산 세월보다 자신이 이 집에서 산 세월이 더 긴 데 아직도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사실이 서러웠다.

게다가 자신은 신후의 생명줄 아니던가.

어떻게 생명의 은인인 자신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는지.

만일 규림만 없어도 민 회장이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막 대하지는 못했을 텐데.

규림의 등장 이후 더 차가워진 민 회장의 태도에 눈엣가시 같은 규림을 바라보는 지은의 시선이 곱지 못했다.

“규림아, 네가 청도로 내려가 보거라.”

“어머, 아버님! 어떻게 결혼도 안 한 아가씨한테……. 그러다가 회사에 소문 이상하게 나면 어쩌시려고요.”

“허허. 내가 무슨 개인적인 욕심으로 보내는 게냐? 이게 다 출장 아니야, 출장. 어차피 규림이가 디자인 팀 팀장이니 이 일도 규림이가 주축이 되어서 진행할 일 아니냐. 안 그러냐, 규림아.”

“네.”

“그러니 이 기회에 내려가서 너도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하고, 그 패션쇼 주최 측에서도 곧 온다는데 그 사람들을 어떻게 확 잡을지 신후랑 시찰 코스도 좀 짜고.”

말은 업무라지만 실은 청도에 내려가 둘이 데이트를 즐기다 오라는 명이었다.

여우 같은 영감탱이.

“오늘 저녁은 비가 많이 온다니 움직일 필요 없고, 내일 아침 비 그치면 가도록 해라. 가서 며칠 있다 와도 좋고.”

“네.”

지은은 얼굴만 붉힌 채 네네 대답하는 규림을 말없이 노려보았다.

순진한 얼굴로 노인네를 삶아 먹는 규림이 지은의 눈에는 새끼 여우처럼 보였다.

***

재윤은 초연의 이동 코스에 따라 트래킹 코스의 끝까지 올라갔다 내려왔다.

코스의 끝까지 갔는데도 없었으니 분명 신후와 만났으리라 생각해서였다.

“초연 씨 혹시 내려왔습니까?”

“아니요.”

“그러면 민 이사님은요?”

“그분도 아직 안 내려오셨어요.”

아직 둘 다 소식이 없다는 소리에 재윤은 아차 싶었다.

재윤이 다시 올라갈 채비를 하는데 이장이 그를 막아섰다.

“아서. 비가 이렇게 오는데. 찾아서 산장에 갔겠지 설마 둘 다 다쳐 못 내려올까.”

번쩍. 어두웠던 하늘이 대낮처럼 밝아지고 뒤늦게 요란한 천둥이 하늘을 흔들었다.

한층 거세진 빗줄기에 재윤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

그 시각 신후는 목이 터져라, 초연을 부르며 샛길 구석구석을 뒤졌다.

“이초연 씨.”

“초연아!”

“이초연!”

수천 번을 부른 것 같은데도 대답은 없었다.

거세진 빗줄기에 시야가 흐릿했고, 빗소리에 목소리가 묻혔지만 정작 걱정되는 건 다른 문제였다.

만약 재윤이 못 찾았다면 이 빗줄기에 저체온증으로 죽었을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빌어먹은 성격은 저를 이겨 먹으려는 것도 모자라 날씨마저 이겨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이라도 한 건가.

초연이 이 날씨에 산까지 오른 게 제 탓인 거 같아 속이 쓰렸다.

속으로 씨발을 천 번쯤 외친 후, 신후는 오른쪽 아래로 향하는 비탈길에서 흰 발이 삐죽 나와 있는 걸 발견했다.

진흙으로 엉망이었지만 분명 초연의 운동화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이초연!”

신후가 반은 달리듯, 반은 미끄러지듯 경사를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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