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깊숙한 각인-16화 (16/84)

〈16〉

그때 마당 다른 쪽에서 참가자들을 챙기던 재윤이 그들 쪽으로 다가오며 이장의 말을 끊었다.

“아이고, 우리 이장님. 벌써 취하셨네요.”

“이잉? 내가? 아닌데?”

“그럼 한숨 주무시고 마시세요. 이러면 늦게까지 못 드세요.”

“으응, 그럴까?”

재윤이 흔들흔들 눈을 감은 채 몸을 느릿하게 흔들고 있는 이장의 어깨를 붙잡았다.

힐끗 신후를 바라보는 시선이 썩 곱지는 않았다.

병원에서부터 그랬다.

자기 여자도 아니면서 마치 제 여자라도 되듯 초연을 보호하고 있는 꼴이 같잖았다.

“죄송합니다. 워낙 사람이 없는 동네라 새로운 사람들이 오면 이장님이 무척 신나서 이런 일이 종종 벌어집니다.”

엉거주춤 일어나는 이장의 겨드랑이 사이로 제 목을 밀어 넣은 채 일으켜 세우며 재윤이 그에게 사과했다.

“안 선생님은 참 재밌는 분이군요.”

“?”

“이 대표 일도 본인 일처럼 먼저 사과하시더니 이장님 일도 본인이 자식이 된 것처럼 사과하시네요.”

덕분에 잠시나마 초연을 그의 부인이라고 생각했던 게 짜증 났다.

두 남자의 시선에 불꽃이 튀었다.

“이 동네가 워낙 한 가족 같은 동네라 서로 네 일, 내 일이 없어 그렇습니다. 물론 외지인이 보기에는 이상해 보일지 모르겠지만요.”

고개를 까딱한 재윤이 이장을 데리고 대문을 나서는 모습을 신후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네 일 내 일이라.

초연의 일이 자기 일이라는 의미인가.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동네였다.

***

다음날 수업이 일찍부터 시작됐다.

첫날은 대략의 분위기와 설명을 하느라 하루를 보내고, 마지막 날은 트래킹을 하며 여행의 묘미를 즐기니 2박 3일 코스라고 해도 실제 염색을 체험하는 건 하루였다.

아침 식사 후 초연은 이십여 명의 참가자 앞에서 염색 수업을 시작했다.

“사진처럼 천연 염색은 우리 주변의 자연 재료를 염료로 사용하는 염색 기법입니다.”

이미 만들어놓았던 사진 자료와 PPT뿐만 아니라 테이블 가득 염료를 늘여놓고 사람들에게 직접 만져보고 냄새도 맡아보게 했다.

“쪽이나 감, 치자, 황토로 염색하는 건 많이들 아시죠? 그것들 이외에도 여기 보시는 다양한 나무나 꽃, 열매, 숯, 먹물 등을 이용해서도 염색을 합니다.”

초연이 설명하는 사이 사람들이 초연의 테이블 부근으로 몰려들었다.

신후 역시 그녀의 옆에 딱 붙어섰다.

초연이 그의 반대쪽으로 한걸음 옮기면 그 역시 그녀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둘의 미묘한 신경전을 눈치챈 사람들이 신후가 초연에게 가는 길을 슬그머니 터주었다.

저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할지 신경도 안 쓰는 신후가 기가 막혔다.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눈빛을 보냈지만, 여유로운 눈빛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투였다.

거짓말. 초연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근데 지난번에 내가 텔레비전에서 보고 포도즙에 옷을 담갔는데 처음엔 이쁘더니 계속 물이 빠져서요. 천연 염색을 하면 원래 그런 건가요?”

누군가의 질문에 초연이 정신을 차리고 답변에 집중했다.

“그냥 천연 염료에 담그기만 하면 물이 잘 빠지고요. 그 물들이 천에 찰싹 달라붙게 풀 역할을 하는 걸 백반이나 철, 동 같은 매염제라고 해요. 그걸 함께 섞어서 염색을 해주면 물이 잘 빠지지 않아요.”

하필 질문을 던진 사람이 신후의 옆자리라서 신후가 하는 행동이 너무 잘 보였다.

어젯밤 그녀를 눕혔던 테이블에 걸터앉아 길고 우아한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를 천천히 훑었다.

마치 자신이 어젯밤 저기에 무슨 흔적이라도 남긴 건 아닐까 걱정이 될 만큼. 신후는 테이블을 음미했다.

자신을 이토록 곤란하게 하는 이유가 뭔지, 아니면 자신을 괴롭히는 것 자체에 즐거움을 얻는 변태 같은 습성이 있는 건 아닌지 화가 날 지경이었다.

결국, 초연은 없던 쉬는 시간을 만들어 그를 피해야만 했다.

***

쉬고 돌아온 초연은 아예 지정 좌석을 정해주었다.

어차피 염색 수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해야 하니 괜찮은 방법이었다.

같은 염료를 쓰는 사람들을 한 테이블에 모으고, 신후가 선택한 쪽 색을 선택한 팀은 맨 뒤쪽으로 보내버렸다.

“어젯밤 만드실 것들 잘 생각해보셨어요?”

“네!”

진짜 염색을 한다는 기쁨에 참가자들의 얼굴에 기대가 가득했다.

“이쪽에 면, 실크, 모시, 노방 무지 원단들 있으니 만드실 것, 분량 계산하신 분들은 이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원단 잘라 가시고, 분량 계산이 어려우신 분들은 저에게 말씀해주세요.”

“저희 친정엄마가 이번에 칠순이셔서 한복 한 벌을 맞춰드리고 싶은데 원단이 얼마나 필요할까요?”

누군가의 질문에 초연이 가득 쌓아있는 원단 중에 두 필을 골라 테이블 위에 펼쳤다.

“이쪽이 보통 화섬이라고 부르는 화학 섬유 원단이고, 이쪽이 흔히들 본견이라고 알고 계시는 실크 원단이에요. 어느 쪽으로 만드실지 생각해보셨어요?”

“제일 고급으로 만들어드리고 싶어요.”

아주 얇아 초연의 손바닥이 비칠만한 원단부터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도톰한 원단까지 테이블 위에 펼쳐졌다.

“그럼 실크로 하면 좋겠네요. 근데 실크도 종류가 많이 있어요. 여름용 원단인 노방 원단도 있고, ‘사’도 있고, 겨울 원단인 ‘단’ 종류도 있고요. 칠순 잔치가 언제시죠?”

“9월이요.”

“9월이라면 여기 사 종류가 좋겠네요. 얇아 보이지만 안에 안감을 두 겹 정도 넣으면 너무 얇아 비칠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거예요.”

친정엄마의 칠순 잔치용 한복을 고르기 위한 설명이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한 설명이기도 했다.

한복집 손녀로 초연은 사람들이 한복에 대해 많이 알고 입어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해서 다른 옷들을 설명할 때보다 더욱 자세히 설명했고, 사람들도 노트를 꺼내 들고 열심히 설명을 받아 적었다.

“근데 한복 원단들은 다른 원단들보다 폭이 좁네요.”

“네. 그래서 한복 원단은 일반 서양 원단보다 좀 더 넉넉하게 잡으셔야 해요. 참, 어머님 키나 체격이 어떠세요?”

“저랑 비슷해요.”

“그러면 기본량 정도면 될 것 같네요. 혹시 여자 한복 만드는 데 얼마만큼의 원단이 필요한지 아시는 분 있을까요? 참고로 한복을 지을 때 쓰는 단위는 ‘마’이고 한 마는 90cm입니다. 맞추시는 분께는 상품을 드릴 거예요.”

알쏭달쏭, 엉거주춤한 사람들 사이에 대답을 한 건 팔짱을 낀 채 무덤덤한 얼굴의 신후였다.

“열한 마.”

순간 초연은 말을 잃었다.

예전 외할머니와 같이 살 때 치마 재단은 신후의 몫이었다.

워낙 여려 겹의 천을 차곡차곡 쌓아 한꺼번에 가위질하려니 힘센 남자가 가위질을 하는 게 나았기 때문이다.

한데 그걸 어떻게 기억하는 걸까.

“……맞았습니다.”

마지 못해 박수를 쳐달라는 시늉을 하는 초연을 따라 사람들이 신후에게 박수를 쳐주었다.

“역시 패션 회사를 운영하는 분이라 잘 아시네요.”

“저희 회사에서는 한복 라인이 없습니다만.”

“그러면 누가 알려줬데?”

신후의 옆자리에 앉은 중년의 남자가 능글맞은 표정으로 물었다.

누구든 주변에 미혼 남녀가 있으면 짝짓기하기를 좋아하는, 딱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예전에 누가 알려줬습니다.”

신후의 대답에 사람들의 시선이 초연에게 쏠렸다.

이 선생이 아니면 누가 알려줬겠냐는 시선들이었다.

그럼 그렇지.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 맞지? 묻는 것 같은 시선들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

결국, 참다 참다 염색 수업을 마치고 초연은 그를 뒷마당에 불러내 따졌다.

“사람들이 오해할 말씀은 하지 마시죠.”

“당신이라고 말한 적 없는데.”

무표정한 신후의 대답에 초연은 아차 싶었다.

그가 자신을 놀려먹으려고 한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에게 배웠거나, 아니면 어렴풋이 기억만 하는 것일 뿐. 그게 자신과 관련되어 있다는 건 모르는 게 분명했다.

“네. 그렇네요. ‘예전의 누가’라고 하셨지. 저라고 하신 적은 없네요.”

자신이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것이었다.

가늘게 뜨는 그의 시선에 괜히 그의 의심만 불러일으킨 것 같아 불안했다.

초연이 서둘러 몸을 돌리려는데 그가 초연의 팔을 잡았다.

“예전에 오토바이 사고로 기억을 잃은 적이 있습니다.”

“!”

“그래서 한 2년 정도 기억이 없습니다. 근데 드문드문 그때 기억이 나긴 합니다. 아마 그때 얻은 정보겠죠.”

초연은 신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조차 밝히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자신을 숨기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몇 번 보지도 않은 자신에게 기억 상실 얘기를 꺼낸 것이다.

초연이 알기에 신후는 자신의 약점은 절대 드러내지 않을 사람이기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기억이…… 나요?”

자신을 어렴풋이라도 기억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의 본능이 자신을 기억하는 것인가.

“드문드문. 얼핏. 희미하게?”

어깨를 으쓱하며 하는 대답에는 심장은 터질 것같이 뛰었다. 당장이라도 그가 모든 기억을 기억해 낼 것 같은 느낌.

초연은 얼른 그에게 흔들린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서요. 그런 말씀을 왜 제게 하시는지 도통 이해가 안 가네요.”

“몸만 맞춰볼 수는 없으니까. 뭐 몸부터 맞춰보고 나머지는 차근차근 알아보자고 하시면 그것도 상관없긴 합니다만.”

어차피 초연과의 미래를 생각하는 판에 자기 일을 숨길 필요는 없었다.

이상했다. 초연에게는 그 무엇도 숨기고 싶지 않았다.

아직 잘 알지는 못하지만, 자신의 비밀을 팔아먹을 여자는 아니라는 확신은 섰다.

아니면 자신의 약점을 언론에 팔아버린다면 그걸 빌미로 여자의 발목을 잡아도 되고.

복잡한 표정의 초연을 바라보며 신후는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때 재윤이 안채를 돌아오며 초연을 불렀다.

“초연 씨 사람들이 찾는데.”

재윤의 등장에 신후의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시도 때도 없이 초연과 관련된 일에 나타나는 재윤이 계속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네, 갈게요.”

특히 재윤을 어떠한 방어막 없이 대하는 초연의 태도 역시.

재윤 쪽으로 향하는 초연의 옆에 신후가 바짝 붙었다.

“안 원장과 거리 지켜요.”

“그건 민 이사님이 상관하실 일이 아니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신후가 귓속말을 하기 위해 초연의 어깨를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재윤은 들리지 않을 거리였다.

“아니면 내 주머니 속에 있는 당신 팬티로 당신 소유권을 좀 주장해볼 생각이거든.”

“미친.”

초연의 단아한 얼굴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온통 붉어진 얼굴로 초연이 손을 내밀었다.

“내놔요.”

“여기서? 주인이 달라면 줘야지.”

신후가 눈썹을 밀어 올리며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초연이 허겁지겁 그를 저지했다.

“됐어요.”

“선물로 준다면 땡큐.”

모멸감에 저만치 달아나는 초연의 모습을 보니 적어도 앞으로 안 선생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싶었다.

느른하게 걸렸던 미소가 초연이 시야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그의 입가에서도 사라졌다.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에 제일 놀란 건 실은 그였다.

혹시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 속에 한복과 관련이 된 일이 있는 건가.

그래서 초연에게 강한 끌림을 느끼는 건가.

기억 상실의 환자에게 강한 자극이나, 기억을 잃었을 때의 물건, 추억을 이야기함으로 충격을 줘서 다시 기억을 찾았다는 연구를 본 적이 있다.

기억을 잃은 2년간 어떤 생활을 했는지 알 수 없으니 그동안 적절한 자극도 줄 수 없어 답답했다.

어찌 되었든 초연의 옆에 있는 게 그의 기억 찾기에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일거양득. 사업가로서도 흡족한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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