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깊숙한 각인-15화 (15/84)

〈15〉

그의 커다란 손에 입을 막힌 채 초연은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유난히 빛나는 까만 눈동자가 마치 밀림의 밤, 숲속에 숨어 먹이를 낚아채길 기다리는 맹수의 눈빛 같다.

사실 어찌 보면 그녀가 이미 붙잡힌 먹이였다.

그의 단단하고 뜨거운 몸에 눌린 자신이 죽음을 앞둔 힘없는 동물처럼 느껴졌다.

죽기 직전의 동물처럼, 그의 몸 아래에서 초연은 강한 그의 힘을 느끼고 있었다.

맞닿은 그의 뜨거운 열기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대로라면 자신의 미친 듯이 뛰는 심장 박동을 그가 알아챌까 초연은 두려웠다.

냥! 노란 고양이 한 마리가 휙 지나갔네.

“갔군.”

신후가 안도하며 몸을 일으키는 사이, 초연이 그를 밀쳐내고 후다닥 곳간채를 빠져나갔다.

잡을 사이도 없이 빠른 움직임이었지만, 신후는 잡을 생각도 없었다.

그저 키스 정도만 해볼 생각이었다.

이 끌림과 욕망이 저 혼자만의 착각인지.

하지만 실체는 꿈보다 좋았다.

멀쩡한 정신으로 하는 키스에 반쯤 사정할 만큼.

만약 고양이가 없었다면 분명 이성을 잃고 그녀를 가졌을 것이다.

물론 따귀 좀 맞았을 테지만.

대신 신후는 제 손에 남은 전리품을 코끝에 바짝 대었다.

진하게 남은 초연의 체취에 다시금 성기가 벌떡 서며 꿀럭, 액을 토해냈다.

“잘 맞네.”

초연이 도망간 쪽을 바라보며 입술에 묻은 립스틱을 엄지로 쓰는 그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

곳간채를 나선 초연은 그대로 안채 뒤쪽 뒷마당 쪽으로 달음박질쳤다.

담벼락 대신 낮은 산으로 바로 이어지는 뒷마당에는 염료들을 삭히는 장독대들만 있을 뿐 좀처럼 사람들의 출입이 없는 곳이었다.

“하아하아.”

장독대 단에 몸을 옹송그리고 앉은 초연이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 충격에 온몸이 덜덜 떨렸다.

그에게 이렇게 속절없이 무너질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앞으로 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초연은 2박 3일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때 안채를 돌아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혹시 또 신후일까 잔뜩 긴장하던 초연은 재윤의 얼굴을 확인하고야 안도했다.

“재윤 씨.”

“괜찮아?”

평상시와는 어딘가 다른 재윤의 표정에 초연은 그가 조금 전 자신과 신후를 봤음을 직감했다.

“봤어?”

재윤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초연의 앞으로 갔다.

앉아 있던 초연이 그를 바라보느라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그 바람에 초연의 상기된 얼굴이 달빛에 훤히 드러났다.

“안 보이길래 찾으러 갔다가 초연 씨 나오고 그 사람 나오는 거 봤어.”

“으응.”

재윤이 보기에 처음 봤을 때부터 신후와 초연은 이상했다.

접촉사고라기엔 너무도 초연이 당황했다.

아니, 당황 정도가 아니라 혼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저녁에 집에서 마주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항상 사람들에게 친절하던 초연이 초면에 그토록 적대감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병원.

분명 병원에서 둘은 서로를 찔러대는 것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재윤의 눈에는 두 사람 이외에 다른 사람은 안 보이는 사람들처럼, 마치 둘만의 세상에 빠진 사람들처럼 보였다.

너무도 이상했지만, 초연은 말을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역시 다시 볼 사람이 아니기에 더는 묻지 않았다.

민신후라는 남자가 다시 청도로 내려와 초연의 프로그램에 난입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이건 명백한 관심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이토록 과감할 수 있나? 의아했다.

“민신후 이사. 원래 아는 사람인 거지?”

그의 질문에 초연이 눈을 내리깔았다.

적어도 자신에게 무슨 말은 해줄 줄 알았는데 초연은 대충 얼버무릴 뿐. 더는 설명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혹시 솔이 아빠?”

스물다섯 살 겨울, 초연이 부푼 배를 안고 이 마을에 들어온 다음부터 지금까지 6년.

6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동네 있으면서 초연이 남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혹시 자신에게 호기심을 보이는 남자가 있으면 단칼에 잘라내던 초연이었다.

그런 초연이 민신후라는 남자에게는 어딘가 무르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민신후라는 남자는 이상할 정도로 초연에게 집착하고.

게다가 솔이.

솔이와 민신후라는 남자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비록 병을 앓고 있고, 생일 또한 12월생이었지만 솔이는 또래에 비해 컸다.

운동도 하지 않고, 입도 짧은데 큰 걸 보면 유전적으로 부모가 큰 게 분명했다.

초연이 168cm 정도로 크긴 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큰 축에 속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잘생긴 얼굴과 쌍꺼풀 없이 큰 눈. 어린아이임에도 선명한 이목구비.

수많은 아이를 봐온 입장에서 솔이와 민신후는 참으로 닮았다.

행여 무슨 일이 있어서 헤어졌다가 다시 솔이와 초연을 찾으러 온 것일까.

“혹시 재결합하려고 온 거야?”

“아니. 그 사람은 기억 못 해.”

초연이 기겁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널……. 아니다. 그래서 그 사람한테 얘기할 거야? 솔이 내년에 학교도 들어가야 하잖아. 어쩌면 솔이 병에 그 사람이 도움이 돼줄 수도 있고.”

솔이의 병은 돈이 많이 드는 병이었다. 행여 초연이 신후의 돈에 솔깃하지 않을까 재윤은 걱정됐다.

사실 재윤은 초연을 좋아했다.

처음엔 아빠도 없이 태어나 희귀한 병을 앓고 있는 솔이가 걱정돼서, 그다음은 솔이를 키우면서 염색일도 열심히 배우는 초연이 대단해 보여서.

아니다. 실은 처음부터 좋았다.

아름답고 처연한 모습이 왠지 모르게 그의 시선을 끌었다.

처음엔 미혼모라는 사실에 스스로의 마음을 눌렀지만 이젠 그도 초연과 함께하는 미래까지 진지하게 생각했다.

아직은 솔이가 너무 어리니 시간을 두었다가 솔이가 좀 더 크고, 자신과 초연의 관계를 이해할 때 즈음에 고백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물론 부모님의 반대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잘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솔의 친부라니.

재윤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마음이 초조했다.

“그런 사이 아니야. 미안하지만 재윤 씨도 비밀 지켜줬으면 좋겠고.”

그제야 재윤의 얼굴이 조금 편안해졌다.

그사이 마음이 진정된 초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평정심을 찾기 무리였는지 초연이 휘청했다.

“다른 거 뭐 내가 도와줄 거 없을까? 차라리 나랑 결혼 예정이라고 하면…….”

재윤은 그녀를 부축하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초연이 빨랐다.

그가 잡기 전 한 발 물러선 초연이 괜찮다고 살짝 웃어 보였다.

“됐어. 혼자 해결할 수 있어.”

잡아주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지만, 그녀와 신후의 사이에 끼어들지 말라는 신호이기도 했다.

“그래. 도움 필요하면 말하고.”

재윤은 아쉬움 가득한 눈길로 허공 중에 멈칫했던 손을 거둬들여야 했다.

***

다시 마당에 나온 신후는 눈으로 초연을 찾았다.

명색이 프로그램 강사인데 다시 나올 줄 알았지만, 초연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사이 솔이 책을 다 읽었다며, 빨리 질문을 내달라고 그의 얼굴 앞에 책을 들이밀며 재촉했다.

신후는 처음엔 솔이 이기게 할 생각에 쉬운 문제를 냈다.

솔이 제법 잘 맞췄다.

그다음엔 조금 더 어려운 문제를 냈다.

그것 역시 거침없이 맞췄다.

보란 듯 으쓱하는 어깨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똑똑하다는 말이 빈말이 아닌 듯했다.

마지막 문제는 제일 어려운 것으로 내보았다.

잠시 고민을 한 솔이 신중하게 답을 내놓았다.

“맞았네.”

“와! 그럼 내일 드라이브 진짜로 시켜주시는 거예요?”

“물론. 내일 사진 무슨 포즈로 찍을지도 생각해놔.”

“아저씨. 우리 도장 찍어요.”

신후가 솔의 작은 손가락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멍청한 직원보다 낫다 싶었다.

“계약했으면 도장을 찍는 건 중요한 일이지.”

자신이 갖고 다니는 만년필보다 가늘고 그의 손가락 반만큼도 안 되는 짧은 손가락이었다. 이 작은 손으로 숟가락을 들어 밥을 먹고, 책을 넘기고 글씨를 쓸 수 있는 건가.

“아저씨 뭘 그렇게 봐요.”

“이 작은 손에 손가락에 손톱까지 다 달려있네. 애기 손은 다 이런 건가?”

진심으로 신기해서 한 말이었지만 금세 솔이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치! 나 애기 아니라니까요! 애기는 손 더 작고 이렇게 쫙 펴지도 못한단 말이에요!”

솔이 손바닥을 한참 쫙 펴 그의 얼굴 앞에 잘 보란 듯이 흔들더니 그대로 제 방 쪽으로 갔다.

“거 참 성질머리하고는.”

“저놈 태어날 때부터 성질머리가 대단하긴 했지.”

그의 옆에 다가와 은근히 말을 붙이는 건 이장님이었다.

어느새 배를 고기가 아닌 술로 채웠는지 거나하게 취해있었다.

신후는 이장과 함께 근처 평상에 자리를 잡았다. 이장의 술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어차피 초연이 나타날 것 같지 않으니 이장에게 초연의 얘기라도 들으려는 심산이었다.

“그랬습니까?”

“그치. 갓 태어났을 때도 어찌나 쩌렁쩌렁 울어대던지. 붉은 핏덩이를 안고 솔이 엄마도, 범규도 어쩔 줄 몰라 했지. 범규 그놈의 자식도 애는 처음이라 당황했지만 내가 장군감이라고 안심시켰다네.”

초연을 낳아봤으면 아이 울음소리를 알 텐데. 아들과 딸은 울음소리마저 다른가. 신후는 생각했다.

“돌아가신 염색장님에 대해 편히 부르시는 것 보니 꽤 가까우셨던가 봅니다.”

“가깝다마다. 우리 불알친구일세! 사실 이 마을 사람들은 다 그렇다네. 육이오 때도 조용했을 정도로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는 동네라 다들 옆 동네 처녀랑 눈 맞아 결혼하고, 뒷마을 처자랑 배 맞아 결혼하고.”

지나간 한평생을 추억하는 이장의 눈빛이 그와 허공 사이 어디쯤 맺혔다.

신후는 말없이 이장의 잔에 또 술을 채웠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살던 집에서 아들의 아들이 살고, 또 그 아들의 아들이 살고. 허허. 이 집도 범규 그놈이 태어난 곳에서 솔이도 태어나지 않았던가.”

신후는 이 집에서 태어난 초연을 그려보았다.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란 여자가 어쩌다가 미혼모가 되었을까.

“혹시 솔이 아빠는 아십니까? 그 사람도 마을 사람이었습니까?”

혹시 솔이 태어나기 전에 죽기라고 한 걸까? 아니면 솔이와 초연을 버리고 도망이라도 간 걸까.

지금의 철벽이 대단한 초연을 보노라면 어떻게 남자를 만나고 사랑을 해 솔이를 낳았는지 짐작이 안 갔다.

도대체 얼마나 불같은 사랑을 했기에 결혼도 전에 애를 낳는단 말인가.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 대한 질투가 그의 속을 긁었다.

“으응, 아니. 솔이 엄마가 막달 다 돼서 이 마을에 들어와 바로 솔이를 낳았으니 우리는 그 이전 상황은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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