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깊숙한 각인-14화 (14/84)

〈14〉

“아이 이름이 민솔입니까?”

“네, 이 원장님께서 그렇게 부르시는 거 몇 번 들었어요.”

굳은 신후의 얼굴을 보고 수진이 오히려 제가 뭘 잘못했나 싶어 어쩔 줄 몰라 했다.

“우연의 일치네요. 근데 저와는 상관없습니다. 그럼 이만.”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 인사를 한 신후가 자리를 떠났다.

신후가 초연을 찾은 곳은 곳간채였다.

불도 제대로 켜지 않은 공간에서 초연은 홀로 분주했다.

팔짱을 낀 채 문에 기댄 채 신후가 물었다.

“솔이 성이 민씨입니까.”

내일 있을 수업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던 초연은 신후의 목소리에, 그리고 그 내용에 놀랐다.

“아니요!”

놀라 성급히 대답하며 몸을 돌리던 초연은 그만 손에 들고 있던 무명천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천천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온 신후가 원단을 주워 먼지를 털어 건넸다.

“아니면 아닌 거지 기겁은. 받아요.”

원단을 건네는 신후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쳤다. 반면, 초연의 얼굴은 긴장감이 가득했다.

“뭘 그렇게 놀랍니까.”

“갑자기 들어오니까 놀라죠.”

초연은 놀란 가슴을 꼭 누르며 핑곗거리가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종일 그를 피하려고 도망 다녔는데 하필이면 곳간채에서 단둘이 마주쳤다.

저 멀리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여름밤 꿈같이 멀게만 느껴졌다.

게다가 불도 켜지 않은 곳에 달빛만 비추는 공간에 그와 있으려니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미안. 근데 너무 신기해서.”

“뭐가요?”

초연은 정신을 차리며 물었다.

“민신후, 민솔. 운명 같지 않습니까?”

느른하게 웃었지만, 그 속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누가 그래요?”

“박물관에서 파견 나온 여대생이 그러던데?”

신후가 제 잘못이 아니라는 듯 주먹 쥔 손으로 엄지만 세워 제 등 뒤를 가리켰다.

겨우 눈에 익은 어둠 속 그의 얼굴이 사실을 안 것 같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이민솔이에요. 성이 이, 이름이 민솔. 경상도 지방에서는 이름 끝 자만 부르는 경우가 많아서 평상시 솔이라고 불러요. 그래서 사람들이 솔이를 외자 이름이라 생각해서 민솔이라고 부르면 그게 성인 줄 착각하는 거죠.”

태연함을 유지하며 대답하려 했지만, 목소리 끝이 살짝 떨리는 게 스스로는 느껴졌다. 제발 자신의 어색함을 신후가 눈치채질 않길. 초연은 간절히 기도했다.

“아, 그렇군.”

금세 수긍하는 그를 보며 초연이 안도했다.

“난 또 나랑 같은 민씨인 줄 알고 좋았는데.”

“?”

“나중에 당신과 결혼하더라도 솔이 성이 바뀌어서 혼란스럽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웃음기 없는 진지한 표정으로 신후가 말했다.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깊은 눈빛에 초연은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온몸의 피가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농담이 지나치다는 생각 안 해요?”

초연이 발끈했다.

“그만큼 진지하다는 생각 안 합니까?”

30년 넘게 살아오면서 여자에게 이토록 끌린 적은 처음이었다.

비록 몇 번 보지 않은 여자였지만 어떤가.

어차피 규림 역시 정략결혼이지 않은가.

제 몸을 위해 아무 여자와 결혼하는 것보다 적어도 인생 처음 끌리는 여자를 선택하는 게 신후에게는 바른 결정이었다.

“말도 안 돼.”

뻔뻔한 그를 노려보는 초연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자신의 이름 석 자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지내다가 임신했다는 말에 말도 없이 도망친 남자였다.

설령 무슨 사고가 나서 그녀와 솔이의 기억을 잃어버렸다 치더라도 가짜 이름을 대고, 임신했다는 말에 사라진 건 기억을 잃기 전의 그였다.

그래놓고 결혼?

마음속에 한 바가지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 같다가 불길 속에 내던져진 기분이다.

초연이 그를 지나 나가려는 걸 신후가 잡아 테이블과 자기 사이에 가두었다.

“물론 말도 안 되지. 내가 유부녀인 줄 알았던 당신한테 끌릴 줄은 몰랐거든. 처음에 그 의사 놈이랑 같이 있는 걸 보고 뭔가 빼앗긴 기분이 들었다면 내 마음 이해하겠어?”

이곳으로 내려오며 신후는 초연과 진지하게 얘기할 시간을 애타게 기다렸다.

자신과 그녀 사이의 뭔가를 이야기해 보고, 그 감정의 실체를 확인해보고 싶었다.

“삼겹살 취향도 맞추고, 솔이와 내 이름도 그렇고. 잘 통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

조금 전에도 수진에게 솔이의 성이 민씨라는 이야기를 듣고 어쩌면 초연과 자신이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해서 기쁜 마음으로 왔는데 초연은 자신을 불한당 취급하며 피하려고만 한다.

“비켜요.”

초연이 그를 밀쳐내려 했지만 신후는 요지부동이었다.

“당신도 신경 썼잖아. 차 안에서, 병원에서.”

“그런 적 없어요.”

“그 눈빛이 나만의 착각이었다?”

어쩌면 처음 마주친 순간.

자신을 보고 굳어버린 여자 역시 어떤 운명을 느꼈던 건 아닐까?

자신을 굳이 필요 이상으로 밀어내려는 것 역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막이 발동한 거 아닐까?

“그럼 확인해봐야겠네, 당신 마음.”

분명 처음 맡는 향기인데도 익숙한 듯 기분을 저릿하게 한다.

“그리고 내 마음이 뭔지.”

어떻게 이렇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예쁘지? 어떻게 이렇게 향기마저 좋냔 말이야.

“혹시 압니까. 당신과 키스해보고 내가 별로라고 떨어져 나갈지.”

“하지 마요.”

초연이 경고했지만, 오히려 보란 듯 신후는 그녀의 양옆을 두 팔로 막았다.

그 바람에 신후가 허리를 숙이느라 얼굴은 더 가까워졌다.

지그시 웃는 모습이 초연의 눈에는 살아있는 먹이를 구석에 몰고 장난삼아 갖고 노는 배부른 맹수처럼 보였다.

“왜. 나 같은 놈이랑 잘 맞을까 봐? 해봐요. 혹시 압니까? 키스해보고 영 아니다 싶어서 내가 나가떨어질지.”

신후가 테이블을 짚었던 오른손을 들어 엄지로 그녀의 도톰한 입술을 쓸었다.

엄지에 밀려 뒤틀리는 입술 아래 작고 하얀 이가 그의 본능을 자극했다.

저 입 속으로 손이든, 혀든, 성기든 쑤셔보고 싶은 충동.

“난 좋을 거라는 확신이 있거든. 꿈에 나올 만큼.”

십 대 시절에도 안 했던 몽정을 여자를 만난 이후 끊임없이 하는 건 분명히 이 여자에게도 책임이 있는 거다.

그의 눈빛이 위험하게 빛났다.

성욕에 미쳐 할머니가 밖에 계시든 말든 덤벼들던 그때처럼.

더는 그와 함께 있으면 안 된다는 직감이 그녀에게 소리쳤다.

그의 눈빛이 천천히 그녀를 훑느라 취해있는 사이, 초연이 재빨리 탈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신후가 한발 빨랐다.

아니 오히려 상황은 최악이 돼버렸다.

그녀를 잡아챈 신후가 그녀의 몸을 부술 듯 끌어안았다.

“두 번 도망가게 하지는 않아요, 내가.”

마치 맞춤 가구처럼 제 몸에 딱 알맞게 떨어지는 키와 형태.

신후는 더욱 몸을 바짝 당겨 안으며 그녀의 턱을 치켜들었다.

“도망이 아니라 할 얘기가 없는 거예요. 민신후 씨랑 시시덕거릴 시간 없습니다.”

이렇게 온 힘을 다해 자신을 싫어하는 여자가 뭐가 좋다고.

그런데도 끝내 자신에게 따라붙는 눈빛은 뭔데.

도대체 뭐가 당신을 계속 생각나게 하는 건데.

왜 사람을 이렇게 미치게 만드냐고.

“아니면. 안달 나게 해서 내가 일도 못 하고 계속 당신 주변에 빙빙 돌게 하려는 수작인가?”

“이봐요!”

신후가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물린 입술을 탐했다.

6년의 헤어짐.

하지만 그 이전 불타는 사랑을 했던 사이였다.

신후의 키스와 체취에 초연의 몸은 그때처럼 그에게 반응했다.

미칠 듯하게 잘 맞아서, 그래서 더욱 우리는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했던 그 몸뚱이가 저주스럽게 그에게 반응했다.

기억도 못 하면서 능숙하게 입술을 빨고, 치아를 더듬고, 혀를 감아올리는 익숙한 움직임에 초연의 온몸에 전류가 흘렀다.

뱀처럼 입술을 파고드는 신후의 혀에 초연은 속절없이 농락당했다.

신후가 그녀를 가뿐히 작업대 위에 올렸다.

휘청이며 균형을 잃은 몸을 신후가 밀어 눕혔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여성으로서의 쾌락이 그녀를 미치게 몰아갔다.

순식간에 젖어 드는 아래에 초연이 무릎을 세우며 다리를 꼬았다.

펑퍼짐하게 퍼진 치마가 허벅지 위로 말리며 하얀 다리가 달빛 아래 유혹하듯 드러났다.

신후가 홀린 듯 허벅지를 쓸었다.

“아흣.”

그의 손이 닿는 곳곳 자르르 흐르는 전기에 초연이 움찔거렸다.

그의 어깨 위에 올려진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부드러운 허벅지를 쓸던 손이 풍만한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키스하는 순간부터 그동안 초연을 만나 누르고 있던 갈망이 터져 나왔다.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그를 괴롭히던 망상이 실체가 되어 손에 잡혔다.

익숙한 향기와 느낌에 신후는 미칠 것 같았다.

분명 낯선 길인데 이미 가본 듯이 익숙한 것처럼, 초연의 몸에 겹쳐진 그의 몸은 능숙했다.

그저 입을 맞추는 것인데 머리가 저릿할 만큼 좋고, 그녀의 입 안을 휘젓는 혀가 너무 능숙해 스스로 놀랄 지경이었다.

이런 게 천생연분이라는 건가.

처음인데도 처음인 거 같지 않고, 사람 미치게 하는 이런 거.

신후는 거침없이 초연을 만졌다.

이미 수십 번, 수천 번 만져온 것처럼 처음이라는 떨림보다는 아는 맛을 다시 맛보고 싶은 금단 증세가 그를 조급하게 몰아갔다.

“하.”

그를 멈추게 해야 한다는 이성과 그동안 잊고 지냈던 쾌감이 조금만, 조금만 더를 외치며 초연의 머릿속에서 싸웠다.

죽을 힘을 다해 미워해도 어느새 성큼 다가오던 그때처럼, 아무리 밀어내려고 해도 민신후라는 남자는 떨어지지 않았다.

신후가 작은 팬티를 순식간에 벗기고 음부를 갈랐다.

흠뻑 젖은 질구에 그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너무 강한 흥분에 손이 저도 모르게 떨린 것이었다.

그의 바지 속 성기가 아플 정도로 불끈거렸다.

실은 아까 초연을 볼 때부터 반쯤 서 있던 페니스였다.

어서 빨리 초연의 질구를 쑤시고 싶은 충동에 척추가 저릿할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곳간채 바로 바깥에서 났다.

“쉿.”

신후가 신음이 터지는 초연의 입을 한 손으로 막으며 자신의 몸으로 초연을 가렸다.

두 몸이 바짝 맞붙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