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여, 여길 민신후 씨가 어떻게……. 아니, 왜…….”
똑바로 저에게 꽂힌 신후의 시선에 초연은 그대로 얼어 붙어버렸다.
여기저기 웅성거리는 사람들도 잊을 정도로 놀라 더듬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초연 씨 보러 왔습니다.”
벌써 그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말을 했던 게 몇 번이었던가.
도대체 이 남자는 포기라는 걸 모른다.
“그 일, 하지 않기로 얘기 끝난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앞으로 더 얼마나 얘기를 해야 다시는 이 남자를 보지 않을 수 있을까.
초연이 억울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 보러 왔다니까.”
신후가 눈썹을 밀어 올리며 자신의 말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도통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초연은 그가 저를 보러 올 만한 다른 이유를 찾았다.
“혹시 차 수리비 때문인 건가요? 그건 비서분께서 괜찮다고 했습니다만.”
하, 신후가 어이없다는 듯 짧게 탄식했다.
그리고는 미간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극구 부정하는 초연의 반응에 신후가 옜다, 하는 반응으로 대꾸했다.
“그렇다고 칩시다. 일 얘기도 해야 하고, 자동차 문제도 이야기해야 하고. 하여튼 할 얘기가 많겠네요, 우리.”
너무 순순한 동조는 또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여전히 초연의 얼굴에는 못 미더운 감정이 가득했다.
게다가 이미 병원에서 잔뜩 화를 내고 헤어진 것 아닌가.
이렇게 웃는 모습으로 신후가 제 앞에 선 까닭을 초연은 도통 짐작할 수 없었다.
신후는 가만히 저를 올려다보는 초연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지난번에도 눈동자가 갈색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햇빛 아래 눈동자가 유난히 갈색으로 빛났다. 홍채의 무늬까지 선명히 보일 만큼.
좀처럼 보기 힘든 아름다운 갈색의 눈동자가 그의 시선을 빼앗았다. 종일 들여다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계속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미 그의 뒤에는,
“여기서 저와 회포를 다 풀 생각이 아니시다면.”
신후가 오른쪽 팔을 벌리며 몸을 반쯤 오른쪽으로 틀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고개를 오른쪽으로 까딱하며 사람들을 가리켰다.
그제야 초연은 신후의 뒤쪽, 저와 신후의 모습을 관람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깨달았다.
“아, 이 분은 〈MJ 인터내셔널〉 민신후 대표 이사세요. 사업 회의차 뵙던 분인데 어떻게 또 이렇게 천연 염색 체험에서 뵙네요.”
초연의 소개에 맞춰 신후가 사람들에게 가벼운 묵례를 하며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앞으로도 저희 전통문화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여기저기 박수가 터져 나왔다.
누가 보아도 뻔한 거짓말에 사람들이 참 착했다.
물론 그 역시 그녀의 장단에 맞춰주니 충분히 착하다고 할 수 있고.
“자, 집중해주세요.”
짝, 초연의 손뼉과 함께 사람들이 모두 그녀에게 집중했다.
오늘 사람들이 머물 민박에 대한 소개가 이어졌다.
“이쪽 곳간채가 염색 공방입니다. 여러분의 염색 작업도 내일 이곳에서 이루어질 거예요.”
신후는 천천히 사람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초연을 바라보았다.
단아한 한복에 앞치마까지 한 모습이 꽤 얌전해 보였다.
그에게 보여주었던 그동안의 성질머리를 가진 여자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단아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여러분이 묵으실 곳은 바로 옆 건물인데 오른쪽 담 쪽을 보면 중간 문이 있으니 그쪽을 통해 이동하시면 됩니다. 저녁 바비큐 파티는 이쪽 본채에서 진행할 예정이니 이따가 짐 풀고 식사는 이쪽으로 오시면 되고요.”
사실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긴 했지만 그랬다간 안 그래도 질린 초연이 쓰러질 것 같아 뒤에 선, 나름의 배려였다.
그것도 모르고 초연은 그를 배려하는 마음 하나 없는지 그쪽으로는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아니면 너무 신경 쓰고 있다는 증거겠지.
신후는 후자라고 생각했다.
차 안에서도, 병원에서도 그가 예민하게 반응한 것만큼 그녀 역시 이상했다.
겨우 어깨 상처 한 번 만졌다고 그렇게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쳐다보고, 차에서 내려 비를 맞고 가나?
자신을 보던 눈빛은 경멸이 아닌 혼란스러움이었다.
병원에서 자신과 규림을 보던 시선 역시 분명 질투였다.
설령 질투가 아니라도 자신의 옆에 있던 규림을 신경 쓰는 건 틀림 없었다.
적어도 자신이 그녀를 신경 쓰는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녀 역시 자신에게 신경 쓰는 건 틀림 없었다.
그게 좋은 뜻이든 나쁜 뜻이든.
신후는 혼자 고민하기보다 초연과 부딪히고 끝장을 보길 선택했다.
***
첫날 프로그램은 별로 없었다.
민박집과 작업실 구경과 뒷마당의 각종 염색용 식물을 삭히고 있는 항아리들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났다.
본격적인 염색은 내일부터였다.
대신 각자 숙소에서 저녁 바비큐 파티 때까지 쉬며 내일 무엇을 만들고 싶은지, 무슨 색으로 만들고 싶은지 생각해보라고 했다.
하지만 염색을 하러 온 것이 아니기에 신후는 가방을 풀자마자 밖으로 나왔다.
본채 쪽으로 와 초연의 흔적을 찾았지만 어디로 숨었는지 쉽게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짐을 푼 사람들이 하나둘씩 본채 마당에 모이자 시끌벅적해졌다.
소란스러운 건 딱 질색이었다.
식사 때까지는 나타나겠지, 하는 마음으로 다시 숙소 쪽으로 가는데 어디에선가 솔이 나타났다.
“어? 아저씨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아 참.”
그를 보고 반가워 신나게 뛰어오던 솔이 금세 뜀박질을 멈추고 유리 위라도 걷듯 종종 걸어왔다.
뭐 하는 행동인가 싶어 신후는 아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엄마가 다친다고 뛰지 못하게 해서요. 뛰다가 엄마한테 걸리면 혼나요.”
그를 따라 숙소까지 따라오며 솔이 살짝 아랫입술을 삐죽이며 설명했다.
남자아이를 뛰어놀지도 못하게 하다니 과보호다 싶었다.
하지만 남이 제 아이를 양육하는 방식에 대해 제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었다.
“그래 오랜만.”
가볍게 인사를 건네자 이번엔 아이가 양손을 앞으로 모으고 허리를 굽혀 제대로 인사를 건넸다.
“지난번엔 차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깜박 잊고 인사 못 드렸어요.”
예의 바른 아이의 모습에 그의 입이 길게 호를 그렸다.
“똘똘하네.”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 그에게는 최대한의 칭찬이었다.
처음엔 그저 좀 예쁘게 생긴 아이구나 싶었는데 어려운 책도 잘 보고 예의도 몸에 갖춰져 있다.
단정한 머리와 깔끔한 손톱. 티끌도 묻지 않은 반바지와 셔츠. 거기에 크지도, 작지도, 낡지도, 더럽지도 않은 운동화까지.
여자가 아이를 얼마나 살뜰히 챙기며 키웠는지 여실했다.
“똘똘이 아니라 똑똑한 거예요. 저 구구단도 다 외우고 천자문도 뗐거든요.”
새침하게 턱을 들고 하는 자랑이 밉살스럽지 않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위축된 사람보다는 차라리 사람 앞에 뻔뻔할 정도로 당당한 사람들이 그의 취향이었다.
“똑똑한 거 맞네. 이 아저씨도 네 나이 때 천재 소리 들었거든.”
“정말요?”
솔이의 표정이 금세 놀람에서 의심으로 변했다.
쉽게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게 꼭 제 엄마를 닮았다.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잠깐만’ 한 뒤, 방 안에서 무엇인가를 챙겨와 솔이에게 내밀었다.
“그래서 이건 선물.”
슈퍼카들이 컬러 사진으로 큼지막하게 박혀있고, 그 옆으로 상세한 스펙이 적혀있는, 슈퍼카 백과사전이었다.
“와!”
자신이 초연에게 관심 있다는 걸 깨닫고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솔이었다.
텔레비전을 보면 미혼인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이 이혼녀거나, 아이가 있다면 적어도 한 번 충격을 받던데.
이상하리만치 거부감이 없었다.
처음엔 아예 유부녀로 알아서 그런 건가.
아니면 아직 단점을 경험해보지 못해서 그러는 건가.
알 수 없지만, 굳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 문제를 일부러 키워 초연에게 가는 관심을 잘라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의외로 초연을 알아가다가 여자한테 실망할 수도 있는 거고.
난생처음 누군가에게 생긴 강렬한 끌림을 포기하기엔 아까웠다.
그러니 솔이 역시 그가 공략해야 할 대상이었다.
“네 질문 수준이 높아서 이걸로 준비해봤는데. 어려워 보여?”
“아니요! 하나도 안 어려워요. 나, 이거 다 볼 수 있어요.”
솔이 눈을 반짝이며 좋아했다.
초연 때문에 솔이의 호감을 얻었다는 마음 이외에, 그저 솔이가 좋아하는 모습에 이상하리만큼 가슴이 저릿했다.
아이란 원래 이런 존재인 건가.
“그래. 보고 모르는 거 있으면 질문하고.”
신후가 커다란 손으로 솔이의 머리를 쓸었다.
웃던 솔이 금세 정색하며 그의 손을 치웠다. 아주 까다롭기 그지없는 왕자님이었다.
“그럴 리 없다니까요!”
“그럼 이따 체크해 봐야겠네.”
신후가 허리를 일으키며 팔짱을 낀 채 솔이를 내려다보았다.
“네!”
자그마한 아이가 목이 젖혀지도록 그를 올려다보면서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하면 상 줄게.”
“치……. 제가 아가인 줄 아세요?”
“그래? 차로 드라이브시켜주려고 했는데.”
“드라이브요? 그럼 차 사진 찍어도 돼요? 만지지는 않을게요. 그냥 옆에서……. 찍어도 돼요?”
아이가 금세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사진 찍어서 뭐 하게?”
“친구들에게 자랑하려고요. 다른 애들은 맨날 아빠 차……. 아니 그건 아니고요.”
말을 하다 놀란 듯 입을 감춰 무는 아이의 뒷말이 짐작 갔다.
아이들이 순수하다고는 하지만 실은 본인의 감정, 감상을 숨김없이 내보이기에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걸 아무렇지 않아 한다.
자신이 가진 것과 갖지 못한 것.
그것들로 친구 간에 서열을 가르고 싸우는 어린 시절을 그 역시 겪어봤기 때문에 모르지는 않는다.
그에게는 늘 병약한 엄마가 약점이었다.
어린이집이나 학창시절 자신을 데리러 온 엄마 뒤에 숨어 너는 이런 엄마 없지, 하는 시선을 보내던 친구들의 시선을 잊지 못한다.
그가 아무리 그 친구들보다 똑똑하고, 잘생기고, 부잣집이고, 비싼 장난감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엄마의 부재를 채울 수는 없었다.
아마 솔이 느끼는 감정도 자신과 비슷할 것이다.
“질문 다섯 개 내서 다 맞으면 운전석에서 운전하는 모습을 찍어 줄 수도 있지.”
“와아 정말요?”
솔인 정말 말 그대로 날아갈 것처럼 폴짝폴짝 뛰었다.
그게 그렇게 좋을까.
어른인 것처럼 잘난 척을 하던 아이도 결국엔 아이임을 깨닫자 가슴 한쪽이 시큰했다.
“그러면 저 거실에서 책보고 있을 테니까 이따가 꼭 물어보세요.”
뒤돌아선 솔이 또다시 신난 발걸음으로 대청마루 쪽을 향해 뛰었다.
어어, 너 그러다가 엄마한테 혼나. 신후가 말리기 전 솔이가 다시 조심스레 걸었다.
역시 똑똑한 아이가 틀림없다. 한 번 말하면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신후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느슨해진 사이, 그들을 지켜보던 여자 대학생 하나가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그를 부른 건 초연의 옆에서 보조를 하던, 박물관에서 파견되었다던 사람이었다.
의아한 표정의 신후를 보며 여자가 긴장한 얼굴로 자기소개를 했다.
“한국대학교 의류학과 4학년 이수진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MJ 인터내셔널〉 민신후 이사님을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그제야 여자의 접근 목적을 알아차린 신후의 표정이 변했다.
부드럽지만 쉽게 범접하기는 어려운. 어딘가 벽이 느껴지지만, 딱히 예의 없다고 할 수는 없는 특유의 표정이었다.
“MJ에 입사 준비합니까?”
“네. 근데 워낙 경쟁률이 세서……. 여기저기서 인턴 생활하면서 경험을 열심히 쌓고 있습니다.”
“열심히 해봐요. 나중에 회사에서 뵈었으면 좋겠군요.”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이동하려는 그를 잡은 건 여학생의 말이었다.
“처음엔 선생님 남편분이신 줄 알았어요.”
수진의 말에 신후가 멈춰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물론 저를 붙잡기 위해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는 건 알고 있지만 딱 보기에도 초연이 저를 보는 눈빛이 곱지는 않은데 뭘 보고 부부라고 생각했을까.
남들이 보기에도 우리가 천생연분처럼 잘 어울리는 구석이 있나?
신후가 한쪽 눈썹을 밀어 올리며 말없이 대답을 채근했다.
“아드님, 그러니까 솔이랑 대표 이사님이랑 많이 닮았거든요.”
“그럴 리가.”
똘똘, 아니 똑똑하고 잘생긴 솔이와 자신이 닮았다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괜찮은 축이었다.
하지만 있지도 않은 사실을 그렇다고 했다간 초연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 화살이 자신에게 돌아올까 봐 절로 경계했다.
정색하는 그를 보며 여학생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그쵸. 아니죠……. 근데 얼굴도 닮고, 솔이 이름도 닮아서 제가 착각했어요.”
“이름? 이솔이?”
“아니요. 솔이 이름이 민솔이잖아요. 민이 특이한 성이라 그만 민 이사님 아들이라고 생각했어요.”
순간, 신후의 얼굴이 굳었다.